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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233화 (233/373)

학사재생 233화

제 233화

하나 조문영이 갑작스럽게 꺼낸 천마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나 뜬금없었다.

시간을 끌거나, 혼란을 가중하자는 의미로밖에 보이지 않을 수준.

적호가 알던 조문영이라면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다.

“이것 참, 상황이 곤란하게 됐네.”

고심에 빠진 적호의 귀에 그들을 따라 쫓아 나온 황준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다수 금의위들이 어쩔 줄 몰라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또다시 그 홀로만 무리를 이탈한 것이다.

“네놈은 눈치가 없는 것이냐?”

“겁이 없는 거지. 겁낼 게 없거든.”

옆에 선 당당한 황준우의 말에, 적호의 마음에 또 한 번 용암이 들끓었다. 하나 이제야말로 진짜 일개 위사 따위를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는 지금이라도 둘 중 한 측이 자존심을 굽히고 물러나기를 바랐다.

“정말 돌릴 생각이 없느냐?”

심정에 담긴 말을 대신해서 뱉어준 이는 조문영이었다.

하나 두 사람의 중앙에 선 그의 시선은 담담하기만 하다.

“애송이의 도전을 피할 이유가 없지.”

무호가 조소를 보이며 말했다.

“내 저놈의 입과 사지를 찢어놓기 전에는 결코 물러날 수 없소.”

백균의 눈에는 이미 막을 수 없는 불길이 솟았다.

“어쩔 수 없군.”

조문영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금의위 부장 둘이 무인으로서 서로의 자존심을 걸었다.

대영반도 아닌 선임부장이 두 사람을 억지로 뜯어말릴 수도 없는 것이다.

“부디 서로 함께했던 날들을 조금씩은 생각해주길 바란다. 또한 이곳이 황궁임을 잊어서도 안 될 것이야.”

결국 적호가 나서 나지막한 권고를 남겼다.

지금으로써는 이 말만이 그의 최선이었다.

무인의 법도는 분명 강자존을 따른다.

하나 이곳은 황궁이다.

또한 본래 금의위의 목숨은 황실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사결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황제와 대영반, 양측의 자리가 모두 공석인 탓일 뿐이다. 언제고 이 결과에 대해 누군가 추궁하려 든다면 금의위 전체가 낭패를 볼 수도 있다.

오래도록 금의위로 살아온 두 사람이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되도록 자존심을 세우는 선에서 끝내주면 좋겠거늘.’

내심 몇 번이고 혀를 차는 적호의 말을 아랑곳 않은 두 사람의 주변으로 순식간에 살의(殺意)가 솟았다.

먼저 움직인 측은 백균이었다.

술병 뚜껑을 따 입에 꽂아 넣은 그의 목울대가 크게 출렁인다.

“제정신으로 죽기는 힘든가 보군.”

무호가 비웃음을 날릴 때였다.

백균의 신형이 연무장에서 사라졌다.

적호도, 조문영도, 잠깐이지만 무호도 그의 움직임을 놓쳤다.

“빠른데?”

황준우가 짧은 감탄을 흘렸다.

일전에 그와 만났을 때보다 조금 더 빠르다.

짧은 시간 실력이 늘었다기보다는 당시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쪽으로 보였다.

‘그날은 술이 과했다 이건가?’

어쨌든 백균의 선공은 성공적이었다.

“크악!”

허리춤에 느껴지는 격통에 무호의 몸이 크게 들썩인다.

백균은 한 번 잡은 승기를 놓칠 생각이 없는 듯 연속적으로 공격을 이어나갔다. 몸이 회전하고, 휘고,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곳에서 쏟아지는 백균의 취권을 바라보는 조문영과 적호의 입이 떡 벌어졌다.

“백 부장…… 저런 실력을 숨기고 있었단 말인가?”

“저 보법은 분명 대영반의…….”

두 사람의 시선이 연무장에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무호가 유리할 것이라는 예상과 다르게 백균이 몰아붙이고 있다. 빠르고 자유로운 공격은 얼핏 풍혁기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들 정도였다.

‘과연…… 제법인걸.’

황준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몰아치는 백균의 공격이 매섭다.

하나 그보다는 첫 일격을 제외하고는 큰 타격 없이 조금씩 자신의 공간을 확보해나가는 무호 측이 더 놀라웠다.

그 결과는 머지않아 드러났다.

검과 손이 부딪치며 불꽃이 튀긴다.

“무호가 반격에 나섰군.”

“한 번 자세가 무너졌었는데 어찌…….”

두 사람의 놀라는 음성에 화답이라도 하듯 얼굴을 일그러트린 무호의 공격이 점점 더 빨라져 간다. 초근접에서의 이점을 가져가고 있던 백균이 점점 더 뒤로 밀리고 있었다.

고수의 싸움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공간의 지배에 있어 무호가 앞서기 시작했다.

‘무공 실력보다는 감각의 문제야. 무호가 백균보다 몇 수는 위다.’

무호는 자신이 어째서 현재 금의위 제일고수인지를 확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무공 실력을 제하고서라도 한 번 휘청인 전투에서 승기를 끌어오고 기세를 유지해나가기까지의 과정이 굉장히 능숙하다.

물론 감추고 있던 솜씨를 발휘하고 있는 백균의 반격도 만만치는 않았다.

‘하지만 이 상태로면 삼백 초식 안에는 승부가 갈리겠지.’

당연하겠지만, 그 승자는 무호가 될 터였다.

황준우는 팔짱을 끼고 눈을 가늘게 떴다.

싸움이 길어질수록 감각이 좋은 무호에게 더 유리하게 흘러간다. 짧은 시간 아주 조금씩, 무호는 백균의 새로운 무공에 적응해 나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조금 모자란 실력과 압도적인 전투 감각을 메워주고 있는 이점이 사라지게 되면 완전히 승산이 사라지게 된다.

이 사실을 백균도 모르지는 않을 터였다.

승부수를 띄워야 한다.

‘최대한 빠르게 말이지.’

황준우의 눈이 차분하게 두 사람의 공방을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백균의 신형이 갑작스럽게 바닥으로 사라졌다.

길게 내뻗은 무호의 검이 허공을 찌른다.

동시에 백균의 손이 바닥을 쓸어 담는다.

공격을 지켜보는 황준우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급해.’

승부수를 띄우는 순간이 빨라야 되지만 조급함은 금물이다.

하나 백균은 조급했다.

그 안타까운 현실이 전투의 팽팽한 긴박함을 순식간에 끊어놓았다.

파앗-! 콰직-!

기다렸다는 듯 뒷걸음질 친 무호의 발바닥이 백균의 손목을 강하게 내리찍었다.

신음을 흘린 백균이 재빨리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무호의 또 다른 발끝이 그의 턱에 작렬하는 것이 먼저였다.

쿠당탕-!

연무장 바닥을 몇 번이고 굴러 볼썽사납게 엎어진 백균의 앞으로 무호가 다가간다. 백균은 신음을 흘리며 핏물이 흘러 흐릿한 시야 사이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울리는 자세로군. 앞으로는 평생을 그렇게 기어 살게 해주지.”

무호의 검이 번쩍이며 떨어졌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연무장 바닥을 다시 몇 바퀴 구른 백균의 앞섶이 길게 베였다.

“발악을 하는군.”

바닥을 짚은 백균이 휘청이는 몸을 천천히 일으키고 있었다.

하나 이미 입은 타격이 너무 크다.

무호는 여유롭게 백균을 향해 다가갔다.

“생사결이라 하지만 네 목숨을 빼앗지는 않으마. 앞으로 대영반이 되어 금의위를 이끌어야 하는데 일말의 자비도 없어서야 되겠느냐.”

“큭…….”

웃음을 흘린 백균의 눈이 가늘어졌다.

“네놈은 결코 대영반이 될 수 없다.”

“글쎄다. 그건 네가 결정할 일이 아닌 것 같은데?”

다시 한 번 무호의 두 눈에 차가운 살의가 어렸다.

‘무력하구나.’

근래에만 벌써 두 번째 패배다.

스스로의 나약함에 화가 나 견딜 수가 없을 정도였다.

시선은 무호를 지나쳐, 뒤편에서 팔짱을 끼고 있는 황준우를 향했다.

그의 표정에는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빌어먹을 놈. 네가 보기에도 꼴 보기 좋다 이거구나.’

자존심이 상한다.

하나 변할 것은 무엇도 없어 보였다.

[조금 도와줄까?]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우선 손목을 자를 것이다. 그다음에는 발목. 목은 베지 않으마. 힘겹게라도 죽게는 하지 않을 게야.”

답변은 백균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무호에게서 돌아왔다.

[도와줄 수도 있어. 네가 나를 돕겠다고 약속만 한다면.]

황준우의 목소리다.

기억에 선명히 남은 만큼 못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전음이라면 입술이라도 움직이게 되어 있다.

아무리 대단한 고수라 한들 소리 없이 상대에게 의사를 전달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 팔짱을 낀 황준우는 눈빛 하나, 입술 모양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그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시간이 없어. 백균 부장. 그놈 꽤나 성격이 급해 보이거든.]

황준우가 그를 재촉했다.

실제로 무호의 검이 조금씩 높은 곳을 향하고 있었다.

“황실의 뜻에 반하는 일은 할 수 없다.”

“후후, 공포에 미치기 시작한 건가?”

[그런 일을 시킬 생각은 없어. 그저 날 조금 도와줬으면 하는 바람일 뿐이니까.]

무호와 황준우의 목소리가 동시에 백균에게 닿았다.

“빌어먹을…… 빌리겠다.”

“이미 늦었어.”

[좌측으로 일보.]

머릿속에는 불만이 먼저 떠올랐다.

하나 몸은 미친 듯이 반응하여 황준우의 목소리를 따랐다.

비틀거리는 움직임을 잡지 못한 무호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또 발악을…….”

무호가 혀를 찰 때였다.

[앞으로 파고들어. 네 장점은 무엇보다 근접전에 있어.]

황준우의 목소리가 다시 전해졌다.

‘개 같은…… 이딴 방법으로 나를 돕겠다고?’

하나 여전히 몸은 그를 따른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물에 빠져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무호를 향해 뛰어들었다.

어차피 막살아온 인생,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일은 두렵지 않았다.

동시에 검을 회수하고 여유를 부리던 무호의 얼굴에 당황이 떠올랐다.

[더 빨리! 죽을힘을 다 쥐어짜내. 어차피 죽기 직전이었잖아! 그냥 자빠져도 괜찮다는 심정으로 들이대란 말이야.]

황준우가 재촉했다.

‘젠장……!’

속으로 욕지기를 흘린 백균의 신형이 무너지듯 앞으로 쏟아져 내렸다.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며 거리를 벌리려던 무호의 코앞으로 백균의 머리통이 날아들었다.

“아악-!”

코피가 터져 나오며 무호가 뒷걸음질을 친다.

‘한 방 먹였다.’

생각지도 못한 일격에 백균의 입가로 웃음이 흘러나오려 할 때였다.

[바보처럼 뭐 하고 있어. 물러서면 쫓아야지!]

하지만 자세가 좋지 않다.

무너져 내릴 정도로 과도하게 내달린 탓에 몸이 균형을 잃고 앞으로 쏟아지던 중이었지 않던가?

[굴러! 아까는 잘 구르더만!]

내심을 읽기라도 한 듯 황준우가 소리쳤다.

‘이젠 모르겠다.’

백균의 몸이 무너지고는 앞으로 몇 바퀴를 굴렀다.

동시에 방금 전까지 그가 서 있던 자리에 검광이 번뜩였다.

간발의 차이, 목 뒤를 스치는 서늘한 감각에 백균의 입가로 쓴웃음이 흘렀다.

[구르는 반동으로 발을 뻗어! 나한테 했던 것처럼!]

그만 명령질 하라고 소리치고 싶지만 그럴 힘도 없었다.

말을 따르기에도 벅찰 지경이다.

“어억-!”

한 치 앞도 보지 못한 채 그저 시키는 대로 뻗은 발길질에 감각이 왔다. 턱 끝을 맞은 무호의 신형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이 보인다.

‘아직 검을 놓치지는 않았군.’

하나 이제는 조금 비슷해졌다.

오히려 시간이 벌어지며 백균의 머리를 아찔하게 하던 감각은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내가 이긴다!’

승기를 잡았다.

[자, 이제 판은 마련됐다. 짐승처럼 싸워. 네놈은 그쪽이 더 어울려. 잘 알잖아?]

황준우의 마지막 권고가 머릿속에 크게 울려 퍼지며 세상이 깨어졌다.

눈앞이 환해졌다.

몸은 바람을 타고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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