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30화
제 230화
“이건 정말 예상외인데. 그 영감이 제자를 남겼을 줄이야.”
“사칭을 인정하는 건가?”
백균의 눈이 가늘어졌다.
“의도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없으니, 인정해야겠지.”
황준우가 가볍게 고개를 주억였다.
동시에 마필이 놀란 눈으로 그를 돌아본다.
“죽어도 달리 할 말이 없겠군.”
“미안하지만 죽어줄 입장은 또 못 되어서.”
“그걸 결정하는 것은 네가 아니다.”
“너 또한 아니지.”
웃음을 보인 황준우가 손을 내저었다.
백균이 풍막을 펼칠 때와 같은 동작이다.
“저 녀석 설마 부장을 따라 하는 건가?”
“제가 진짜 풍막이라도 펼칠 수 있을 줄 알고? 푸하하!”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사내들이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목소리는 울리고, 또 울려 자신에게 돌아온다. 그 사실을 눈치챈 몇몇의 눈이 굳어졌다.
자리에 앉아 술병을 들어 올리던 백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 이 골목 전체에 풍막을?”
“제법이지 않나?”
웃음을 보인 황준우가 어깨를 으쓱였다.
제법 정도가 아니다.
골목 안쪽은 결코 좁다고 할 수 없었다.
말했듯 거대한 기루 정도의 크기를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심지어 내부도 아니고 외부다. 그런 넓은 공간을 완전히 단절시켰다.
백균이 아니라, 풍혁기 본인이 와도 해낼 수 없는 일이다.
“미쳤군.”
고개를 저은 백균이 들고 있던 술병을 젖혔다.
목울대가 크게 출렁이며 술 한 병이 순식간에 동이 난다.
그렇게 연거푸, 세 병을 먹어 치운 백균이 바닥으로 뛰어 내린다. 첫걸음을 떼었다 생각한 순간에 뻗어진 손길이 마치 뱀처럼 휘며 황준우의 목을 휘감아 들어오고 있었다.
하나 손이 잡은 것은 무엇도 없었다.
백균의 시선에 고개만 젖힌 채 웃음을 짓는 얼굴이 보였다.
“흐음…….”
입에서는 짧은 신음이 흘렀다.
신형이 비틀거리며 무너져 내린다. 이후 눈 한 번 깜짝할 시간에 황준우의 코앞으로 양발이 창처럼 솟아올랐다.
“취권인가?”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한 황준우가 의문을 남길 때였다.
바닥을 쓸듯 흘러온 손이 단숨에 발목을 낚아챘다.
황준우의 세상이 뒤집혔다.
“건방진 놈.”
어느덧 반전하여 히죽거리는 웃음을 보인 백균의 발이 황준우의 복부에 닿는 순간이었다.
폭음과 함께 먼지구름이 자욱하게 일었다.
“크으읍…….”
신음을 흘리며 물러선 측은 백균이다.
반면 공중에서 반 바퀴 회전하여 위태해 보이는 상황을 연출했던 황준우는 어느덧 들고 있던 검을 집어넣고는 한 손으로 지면을 짚은 채 물구나무서서 웃음을 보였다.
“방금 그게 검이었으면 적어도 손목 하나는 사라졌겠지.”
한 손의 힘으로 공중에 떠올라, 다시금 양발로 지면을 딛고 선 황준우가 말했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에 어찌 된 일인지 분간도 못 하고 있던 주변에서 소란이 일었다.
“백 부장은 검술의 대가라고 들었는데…….”
마필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순식간에 이어진 공방, 결론적으로 밀리기는 했지만 백균의 취권은 어중간하게 흉내만 낸 솜씨라고 볼 수 없었다. 오히려 놀라울 정도였다. 절정고수인 마필 본인은 그 첫 초식조차 감히 받아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바람은 어떠한 형태에도 구애받지 않지. 자유롭지 않다면 바람이 아니다.”
혼잣말에 대한 대답을 들려준 이는 놀랍게도 황준우였다.
“그게 무슨 말인가?”
마필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고, 가면 속 눈빛의 동요를 감추지 못한 백균이 입가로 흐르는 핏물을 닦으며 눈을 부라렸다.
“말 그대로다.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지.”
“정녕 사부님의 또 다른 제자인 것이냐?”
“말했지 않나? 그건 아니라고.”
“한데 네놈이 어찌 풍막에 이어 풍권(風拳)을 펼치고, 풍신공의 묘리마저 읊는단 말이냐?”
“그거야 어설픈 수준까지는 대충만 봐도 따라 할 수 있으니까. 묘리를 깨닫는 것도 간단하지. 뭐, 이 경우는 영감이 말해준 거지만.”
“개소리하지 마라! 네놈은 풍신공을 삼류무공 따위로 취급하는 것이냐!?”
흥분한 백균이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잘 만들어진 무공이지. 가히 신공절학이라 불릴 만해.”
“한데도 헛소리를 지껄인단 말이냐? 그럴 리가 없다. 불가능하다. 네놈은 지금 거짓을 말하고 있음이 분명하구나.”
상식적으로 본다면, 백균의 말이 옳다.
삼류검법인 삼재검법조차 한 번 보고 따라 할 수 있다면 박수를 쳐 줄 일이다. 초식의 형(形)을 갖춘 이류 무공부터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에 가까워진다. 하나 아주 가끔 나타나는 천재란 족속은 그러한 이류 무공조차 순식간에 소화해 버린다.
일류 무공은 형에, 묘리가 갖춰진 무공이다.
흉내를 낸다 하여도 묘리를 깨닫지 못하니 무공의 본래 기운이 살지 못한다. 하니 이때부터는 천재라 한들 감히 따라 할 수가 없다.
무림에서 신공절학이라 볼 수 있는 무공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었다.
주어진 형조차 탈피하고 묘리를 담아낸다.
당연히 따라 할 수도 없고, 가르침 없이 그 의미를 깨달을 수도 없다.
특히 풍신공의 경우에는 그러한 신공절학 중에서도 상당한 난이도를 자랑하는 무공이었다.
시대의 천재이자 황궁제일고수로 이름 높은 풍혁기조차 풍신공을 대성하지 못하였을 정도니 말이다. 한데 그런 무공을 흉내 낸다고? 그 묘리를 겉핥기 정도로 이해하여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백균이 아는 한도 내에 아니, 황준우를 제외하고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이의 상식에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일만큼이나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해야 믿어줄까. 당장으로써는…….”
헛웃음을 흘린 황준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시에 그의 신형이 비틀거리기 시작한다.
마치 백균의 움직임 같다.
“설마!”
마필이 헛바람을 집어삼키는 순간이었다.
황준우의 신형이 제자리에서 사라졌다.
마치 바람처럼, 백균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동시에 그의 팔이 뱀처럼 휘듯 허공을 가로지른다.
두터운 목덜미 바로 앞, 간발의 차이로 한 손을 들어 황준우의 공격을 막은 백균의 손끝이 떨린다.
“이게 무슨…….”
“역시 처음이라 어설프긴 한가 보구먼. 원래는 제대로 때려줄 생각이었는데.”
물론 처음부터 제대로 공격할 생각도 없었다.
그랬다면 내상을 입은 백균은 견디지도 못할 묵직한 내공으로 밀어붙였을 테니 말이다.
‘방금 그건 너무 서강답지 않은 농담이었나.’
하나 이미 뱉은 말은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내심 웃음을 지은 황준우가 가면 속 백균의 두 눈을 마주했다.
“어때, 이 정도면 믿겠나?”
“괴물인 것이냐?”
“그런 이야기도 많이 들었지.”
백균의 입에서 허탈한 한숨이 깊게 흘러나왔다.
“남천맹에 무신이 있다더니, 그 별호를 가져가야 될 인물은 따로 있었구나.”
“크흠…….”
헛기침을 흘리는 황준우를 곁눈질로 바라본 백균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눈에서는 불길이 타오르는 듯했다.
“화가 나는군. 돌아가신 스승님을 욕보인 자를 내 마음대로 할 수도 없다니.”
“음…….”
신음을 흘린 황준우가 묘한 시선을 흘렸다.
“대체 정체가 뭐냐? 무슨 목적으로 네놈 같은 괴물이 황녀 마마의 곁에 있는 것이냐?”
“자세한 사정까지는 말해줄 수 없고.”
“오만을 보이지 마라. 이곳에는 나 혼자만 있는 것도 아니다.”
백균이 양팔을 벌렸다.
그러자 건물 곳곳에서 흉흉한 눈빛을 흘리는 무인들의 기세가 황준우의 전신으로 쏟아졌다.
“직접 겪고도 모르는 건가? 설마 모두가 덤빈다고 해서 결과가 바뀔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적어도 우리 모두가 죽어서 네놈을 난감하게 할 수는 있겠지.”
백균의 입가로 싸늘한 웃음이 흘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곳곳에서 기세를 일으키고 있는 이들의 눈빛에도 각오가 선다.
처음에 비해 기세가 몇 배는 더 날카로워졌다.
그 이유는 백균의 입에서 밝혀졌다.
“명확한 목적을 밝혀라. 나는 금의위 부장이다. 네놈 같이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황궁에서 날뛰는 꼴을 가만히 두고 볼 줄만 아느냐?”
서늘한 음성을 흘리는 백균이 쓰고 있던 가면을 벗었다.
날카로운 눈매를 가졌으나, 인상은 전체적으로 사내답다.
두툼한 얼굴선은 사내다움을 나타내는 듯도 했다.
이제야 백균의 민낯과 마주한 황준우의 입가로는 웃음이 흘렀다.
“그렇군. 금의위란 건가.”
황실 수호의 상징.
새삼스레 그 이름의 무게가 황준우의 마음에 와 닿았다.
처음과 달리 백균은 정체를 알 수 없는 황준우를 향해 금의위로서 선 것이다.
스승을 모욕한 건방진 애송이를 혼내주려 할 때와는 마음가짐이 뒤바뀌었다. 그가 풍혁기를 존경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누구보다도 완벽하게 금의위로서의 삶을 살아온 풍혁기를 존경하기에 보일 수 있는 모습이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다.
이 자리에 모인 무인들 대다수가 금의위.
황실에 대한 깊은 충성심을 가지고 있는 그들의 입장에서야 황준우가 의심스럽게 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마지막 기회를 주지. 명백한 이유를 밝히지 못하겠다면…… 우리는 죽음을 통해서라도 네놈의 정체를 만천하에 알리겠다.”
음성만큼이나 눈빛 역시 단단하다.
열의가 느껴지는 한편, 차갑게도 다가온다.
그를 한참이나 직시하던 황준우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그냥, 그러고 싶어서.”
백균의 두터운 검미가 무섭게 꿈틀거렸다.
“황녀 마마가 좋아서. 지켜주고 싶기 때문에.”
“…….”
“그래서 마마의 옆에 섰다. 대영반이 되기로 마음먹기도 했지.”
“정녕 그뿐인가?”
질문을 하고 있지만, 이미 백균의 기세는 풀어지기 시작했다.
실소가 나올 정도의 어이없는 이유지만, 직시하고 있는 황준우의 눈엔 흔들림이 없다.
주연하를 생각하는 마음에는 한 치의 어둠도 느껴지지 않았다.
백균으로서는 아주 잘 알고 있는 눈빛이라고 할 수 있었다.
황실을 향한 충정을 갖춘 금의위들의 시선이 바로 저러하니 말이다.
“그 외에는, 무엇도 없다.”
“내 사람 보는 눈이 잘못되었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백균의 눈빛이 흔들렸다.
순수하다.
정말로 깨끗해서 흠잡을 데가 없다.
해서 조금은 불안했다.
단순한 충심, 존경이라고 보기에는 과한 빛이다.
금의위로서 결코 어겨서는 안 될 준칙 중 하나를 어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네놈은 마마를…….”
“존경하고, 따를 뿐이다.”
자르고 들어온 황준우의 말에 백균은 짧은 침묵을 지나 고개를 주억였다.
“……믿겠다.”
기세가 풀어졌다.
한순간에 극한까지 달하였던 긴장감도 사라진다.
“스승님의 제자를 사칭하였던 것도, 순수하게 마마를 돕고 싶은 마음인가?”
“그렇다.”
백균의 두 눈동자에 망설임이 일었다.
본인이 다소 삐뚤어진 행동을 할 때가 많아 구박을 받을 때도 많았지만, 풍혁기는 근본적으로 좋은 스승이었다. 무공에 관해서도, 금의위의 대영반으로서도 어느 하나 부족한 점이 없던 것이다.
그런 풍혁기가 마지막까지 걱정하였던 것은 황실이 누군가의 음모에 의하여 조종당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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