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23화
제 223화
“……뭐라고?”
당황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힌 주연하가 다시금 되물었다.
뒤편에 서서 죽립을 쓰는 자세를 취하던 황준우의 동작 또한 멈추었다.
“암살당하셨다고 합니다. 당시 함께 외출하였던 무호 부장이 손 쓸 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고 합니다.”
말을 하는 자곡의 눈이 잠시 황준우에게로 향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대영반은 황궁제일고수지 않은가?”
“저도 이상하다고 여기고는 있습니다만…….”
눈매를 좁힌 주연하가 차갑게 물었다.
“확실하게 확인한 사실이냐?”
“적어도 아직까지 대영반이 돌아오시지 않은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럴 수가…….”
탄식을 흘린 주연하가 아랫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믿고 싶지 않아도, 정황이 그렇다면 더 이상 부정할 수만은 없다. 금의위에서 주연하를 비호하던 풍혁기가 사라졌다. 이 소식을 접한 황자 측의 행동이 얼마나 과감해질지는 굳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일이다.
갑작스러운 사태였지만 그에 따른 대비책을 생각해 놓아야만 한다.
“우선…….”
고심을 반복한 끝에 주연하의 입이 무겁게 열린 순간이었다.
“마마, 바깥에 금의위 무호 부장께서 뵙고자 찾아오셨습니다.”
궁녀의 말에 자곡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주연하의 시선은 소호를 지나쳐 황준우에게로 향한다.
“냄새가 조금 나는데.”
황준우가 내뱉은 나지막하고 낮은 목소리에 자곡의 시선이 다시 한 번 황준우를 향했다.
눈빛에는 그가 누구인지 묻고 싶다는 기색이 가득하다.
“예전부터 알고 지냈던 무인이다. 믿고 지낼 만한 인물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예. 마마.”
의구심이 조금은 해소된 눈빛을 한 자곡이 고개를 숙인다.
주연하의 머릿속에는 황준우와 비슷한 생각이 떠올랐다.
‘뭔가 꺼림칙하지만, 무호 부장이 이 일의 열쇠를 쥐고 있다.’
어찌 됐든 만나 보면 알 일이다.
“들이도록 해라.”
“예, 마마.”
주연하의 말에 답한 궁녀가 바깥을 향하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 후, 방의 입구로 다가오는 기척이 더 늘어났다.
그중 한 명은 멀리서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예리한 기세를 머금고 있다.
“명도(名刀)일까, 아니면…….”
주연하가 혼잣말을 읊는다.
“마마, 금의위 무호 부장을 뫼시고 왔습니다.”
“들여라.”
주연하가 고개를 주억이고, 방문이 열렸다.
날카로운 인상을 한 무호와 주연하의 시선이 짧게 오간다.
이후 무호가 방에 있는 이들을 차례, 차례 훑어보고는 흐릿한 웃음을 보였다.
“금의위 부장 무호라고 합니다. 황녀 마마를 뵙는 건 오랜만이로군요.”
“무슨 일로 찾아 왔느냐?”
인사를 무시한다고까지 보이는 단도직입적인 말에도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무호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흠……,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하신 것이 없으십니다. 금화대주를 통해 소식은 들으셨지요?”
“네가 금화대주에게 전한 말이더냐?”
주연하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아닙니다. 저는 단지 금화대주와 연이 제법 있는 이에게 사실을 알렸을 뿐이지요.”
“결국 네가 전한 말이란 것이지. 그래, 바라는 것이 있어 찾아 왔겠구나.”
주연하의 생각 정리는 빨랐다.
황준우 말대로 냄새가 나는 사건이다. 그리고 사건의 당사자라 볼 수 있는 인물이 이 자리까지 직접 찾아 왔다. 뻔히 보이는 욕심이 그녀의 눈앞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바라는 바가 있기보다는, 서로를 돕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뿐입니다. 혹시 사람들을 물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안 됩니다. 마마.”
자곡이 눈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무호는 황궁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고수다.
그런 인물과 주연하 단둘만을 방 안에 놓아둘 수는 없는 탓이다.
“물러가 있어라.”
하나 주연하의 결정은 단호했다.
대담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행동에, 무호의 눈에 어린 이채는 더욱 빛을 발했다.
“…….”
“마마…….”
자곡이 아랫입술을 깨물었으며, 소호가 앓는 소리를 흘렸다. 하나 이미 주연하는 결정을 내렸다. 지금에 와서 번복을 요청하는 것은 그녀의 권위를 떨어트리는 일밖에 되지 않았다.
먼저 움직인 이는 황준우였다.
말없이 팔짱을 낀 그가 무호의 옆을 지나쳐 방 밖으로 나간다.
소호와 자곡 역시 그 뒤를 따라 밖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위험하면 이름을 부르든지, 소리를 치든지. 사실 그냥 뛰어나올 수도 있지만, 멋 좀 부려보자.]
방 안에 남은 것 중 그녀의 편은 귓가에 감도는 목소리뿐이다.
농담 섞인 이야기였지만 주연하의 입가로는 자연스레 미소가 떠올랐다.
“자신감이 넘치시는가 보군요. 과연 황녀 마마. 여제(女帝)의 자질을 갖춘 영웅이십니다.”
“말이 없는 사내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실제로 무호는 언제나 말이 짧았다.
풍혁기의 옆에서 그를 보좌하듯 서 있기만 하였으니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않습니까.”
웃음을 짓는 무호의 말에 주연하가 고개를 주억이며 조소(嘲笑)를 보였다.
“그래, 뭐가 다른지 한번 들어나 보자꾸나.”
“단도직입적인 것을 좋아하시니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마마께서는 지금껏 대영반의 비호가 있었기에 살아남으실 수 있었습니다.”
차가운 웃음을 흘린 무호가 주연하를 직시한다.
동시에 자리에 앉아 있던 주연하가 검을 뽑아 들며 몸을 날린다.
순식간에 목 끝에 검날을 가져다 댄 주연하의 입에서 차가운 음성이 흘렀다.
“실로 오만하구나. 대영반의 도움은 감사하나, 비호가 없었다 한들 나는 여전히 이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한낮 금의위 부장 따위가 황녀를 재단하려 한단 말이냐?”
“곤란하군요. 한낮 금의위 부장 따위라고 생각하십니까? 대영반이 사라진 지금, 누가 그 자리에 오를지야 뻔한 상황인데도 말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네가 죽는다면 그 뻔한 일도 사라지겠지.”
“대신 마마께서는 금의위와 완전히 척을 지실 수 있게 되겠지요.”
“그것도 모르는 일이지. 나를 함부로 재단하지 마라. 농락하려 들지도 말거라. 네가 설령 금의위 대영반이 된다 한들 그 모든 행동은 오만이다.”
주연하의 몸에서 차가운 기세가 흘러나와 무호의 전신으로 쏟아져 내린다.
내공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기세, 그리고 위엄이다.
무호의 이마 위로 옅은 식은땀이 맺혔다.
‘철혈의 황녀. 과연 그 자질만큼은 선대 황제에 비해 부족함이 없구나.’
단순히 무공으로만 치자면 주연하는 무호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육체의 외적인 면만 보아도 무호의 키가 주연하에 비해 머리 하나는 더 컸다. 여인인 주연하보다 무호의 덩치가 더 큰 것 역시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압도된다.
마치 선대 황제 앞에 섰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압도적인 위엄!
강렬한 권위!
침을 삼킨 무호는 입가로 진한 미소를 그렸다.
여태껏 보이던 흐릿한 웃음과는 선연하게 다른 형태다.
“주의하겠습니다. 마마.”
그제서야 목 끝에 겨누어졌던 검이 떨어진다.
어깨를 짓누르던 기세 역시 사라진다.
하나 다소 무거운 주연하의 음성은 그대로였다.
“묻겠다.”
“말씀하십시오.”
“대영반을 암살한 흉수가 바로 네놈이냐?”
“아닙니다.”
시선을 굳건히 고정한 무호가 차갑게 말했다.
“네 눈앞에서 대영반이 암살당하셨다. 한데 흉수를 하나도 잡지 못했다고 하였느냐?”
“흉수는 많았고, 실력자들이었습니다. 저 역시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싸웠지만, 생포는 불가능했다는 말이다.
“과연, 황궁 전체에서도 내로라하는 고수인 그대가 최선을 다했어야 될 정도의 흉수라…….”
“없을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럴 수도 있지.”
시선을 부딪친 두 사람이 동시에 웃음을 보였다.
“좋다. 하면 묻지. 이 자리에 찾아온 이유는 무엇이냐? 나와 황자 전하를 저울질하기 위함인 것이냐?”
웃음을 짓지만, 주연하의 시선은 여전히 무거웠다.
마치 무호의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듯하다.
“저는 이 자리에서 일체의 거짓도 고하지 않겠습니다. 때문에 말씀드려, 차마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군요.”
“역시 오만하구나.”
“…….”
“그 솔직함에 기회를 주도록 하마. 묻겠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대영반의 자리에 만족했다면 네가 이곳까지 찾아오지도 않았겠지.”
“저는…….”
무호의 입이 무겁게 떨어졌다.
본래 요구하고자 한 것은 머릿속에 분명했다.
자연스레 시선이 흔들린다.
‘아니, 여기서 흔들리면 안 된다.’
한 번 양보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이 밀려나게 된다.
패배에도 관성이 있다.
마음을 부여잡은 무호가 주먹을 움켜쥐며 눈을 부릅떴다.
“저는…… 승상의 자리를 원합니다.”
“승상? 지금 승상이라 하였느냐?”
“예. 저는 대 명의 승상이 되고자 합니다.”
예로부터 승상의 위란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자리라 하였다. 황제를 보필하는 가장 가까운 자리이자, 최고의 관직으로 그 권력은 어지간한 왕, 또한 황족을 월등히 앞선다.
한데 그 자리에 금의위의 무관이 오르고자 한다.
물론 무관이 승상의 자리에 오른 경우가 없던 것은 아니다.
다만 작금의 명에는 승상의 자리가 남아 있지 않다.
태조(太祖) 시절, 모반을 꿈꾸었던 좌승상을 주살한 황제가 분노하여 승상의 직위를 모두 폐(廢)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무호가 승상이 되기 위해서는 태조가 폐한 직위를 다시금 부활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네놈은 미쳤구나. 감히…….”
“쉽지 않을 결정일 줄은 압니다. 다만, 제가 굳이 황녀 마마께만 이 제안을 드릴 필요는 없다는 사실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 번 주연하의 검이 나갔으나 강기를 두른 무호의 손에 의하여 튕겨 나간다.
“네놈이 정녕 죽고 싶구나.”
자연스레 주연하의 몸에서 일어난 기세가 더욱 강해졌다.
“죽고, 살고는 하늘의 뜻. 어찌 마마께서 모두 정하시겠습니까. 저는, 끝까지 살아남을 것입니다. 하면 삼 일 뒤 밤까지는 결정을 내려주시길.”
그 말과 함께 무호의 신형이 사라졌다.
단숨에 자리를 이탈한 것이다.
[살짝 미친 녀석 같은데, 잡아올까?]
벽 너머, 황준우의 전음이 주연하에게 이어졌다.
제가 아무리 날래 봐야 어차피 황준우의 손바닥 안인 것이다.
“……아니다. 일단은 방 안으로 다시 와다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방문 앞으로 기척이 곧장 나타났을 뿐이다.
“손님을 뫼셔라.”
궁녀가 말을 건네기도 전 주연하의 목소리가 먼저 답했다.
“예, 마마.”
다시금 방문이 열리고 황준우가 그 안으로 들어섰다.
“네 생각은 어떤지 묻고 싶구나.”
“말했잖아. 냄새가 난다고. 난 놈이 분명하다고 생각해.”
풍혁기의 흉수.
두 사람이 동시에 떠올린 이름은 무호였다.
“그가 정녕 대영반이 된다면 곤란해지겠구나.”
“금의위를 제멋대로 좌지우지하려 할 테니까.”
다행인 점을 찾자면, 아직 그가 완전히 황자 파에 붙은 것 같지도 않다는 사실이었다.
만약 무호가 확실히 마음을 굳혀 황자파에 의탁했다면 남은 시간은 더욱 촉박했을 터였다.
“아무래도 책사를 만나야겠다.”
“책사? 아, 있다고 했지. 그러고 보니 왜 얼굴을 한 번도 못 봤지?”
“사정이 조금 있는 탓에…….”
입맛을 다신 주연하가 허리 치맛자락에 다시금 검을 갖추며 옷매무새를 정리한다.
“우선 가면서 이야기하자꾸나. 제발 그에게 꾀가 있어야 할 텐데.”
걸음은 다급히 방 밖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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