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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221화 (221/373)

학사재생 221화

제 221화

“진짜로,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느냐?”

“그 질문만 백 번을 넘게 들은 것 같다. 너 의외로 같은 말 반복하는 취미가 있구나.”

“…….”

황준우의 능청스러운 말에 입을 닫은 주연하의 눈에 은은한 분노가 올라왔다가 꺼진다. 분명 과거에는 안 그랬는데, 이번 만남 이후 유난히 신경을 긁는 말을 많이 하는 황준우다.

“농담하는 게 아니지 않느냐. 지금 보이는 저 입구를 넘어서면, 우리는 무엇도 돌릴 수 없게 된다.”

두 사람의 시선이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붉은 지붕이 있는 거대한 문으로 향했다.

승천문(承天門).

붉은 벽돌로 쌓은 황성으로 통하는 정문을 처음 본 이들의 감상은 대체적으로 하나같이 통일된다. 거대하다. 또한 압도적이다. 그야말로 천하를 다스리는 황제가 기거하는 곳의 정문이라고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위압마저 어려 있다.

때문에 승천문 자체를 높이 여기며 그에 대한 존중과 감동까지 느끼는 사람들도 많았다.

황제의 권위를 곧장, 가장 가까이서 느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주연하 역시 한때 그와 비슷한 마음으로 승천문을 바라보고는 했다.

황궁이라는 장소에 대한 선망이 가슴속 한편 어딘가에 남아있을 때였다.

하나 지금은 다르다.

저 승천문 안쪽은 밝은 북경의 저잣거리와는 완연히 반대되는 세상이다. 너무나 화려하면서도 그 이면에는 천하에서 가장 잔인하고, 무서운 현실이 펼쳐진다.

견뎌내지 못한다면 황궁은 현세의 지옥이라는 표현이 부족하지 않은 끔찍한 곳이다.

무엇보다 가장 무서운 사실은 한 번 저 세계에 들어서면 쉽게 발을 뺄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지금과 같은 상황에 태풍의 중심이나 다름없는 자신과 가까이 있음에야, 얽히면 뒤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단단히 다잡지 않은 마음으로 그런 길을 걷길 바라지는 않았다.

황준우를 믿지만, 또한 겁이 나는 탓이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나는 아주 만약에라도, 너를 잃고 싶지 않다.”

주연하의 진중한 말에 웃음을 보인 황준우가 오른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나도 동감이야.”

순간적으로 깜짝 놀란 표정이 된 주연하는 곧장 제자리에서 펄쩍 뛰며 소리쳤다.

“무, 무슨 짓이냐!”

“귀여워서.”

“나, 나보다 어린 주제에!”

“친구 사이에 나이 따지는 것 아니다. 그리고 마음의 준비는 단단히 했어. 이제 걱정은 접어두고, 시원하게 밀고 나가자고.”

쏟아지는 빗줄기를 강기로 만든 막으로 튕겨내던 황준우가 주연하의 손을 부여잡고는 걷기 시작했다.

“너…….”

투덜거리며, 옆으로 시선을 돌린 주연하의 눈에 황준우의 바뀐 모습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황궁으로 향하기 전 들른 상점에서 산 수염을 덧붙이고, 죽립을 깊게 눌러쓴 모습이 제법 잘 어울린다.

진지하게 가라앉은 눈빛에서는 장난기를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하긴, 목숨이 걸린 일이다.

심지어 본인뿐만이 아니라 가족들, 주변인들까지 위험하게 할 수 있다.

아무리 황준우라고 하여도 대충 결정할 리가 없는 것이다.

조금은 홀린 듯 그 옆모습을 바라보며 따라 걷던 주연하의 손을 황준우가 놓았다.

“아…….”

따뜻하게까지 느껴졌던 그 감촉이 사라지자 저도 모르게 짧은 아쉬운 탄성이 흘러나왔다.

“조금 더 가면 우리가 확실하게 보일 거야.”

황준우의 말에, 얼굴을 굳힌 주연하가 고개를 주억였다.

“우산 펼쳐. 감기 든다.”

“…….”

주연하가 말없이 고개를 주억인 후 우산을 펼쳤다.

동시에 빗방울이 그녀의 몸에 닿기 직전 사방으로 튕겨내던 강기의 막이 사라졌다. 유달리 서늘한 바람에 섞여 차가운 물방울이 옷 이곳저곳에 묻어났다.

“가자.”

마음을 굳게 다잡은 후 옆을 바라보니 빗물에 흠뻑 젖은 황준우가 죽립을 더욱 깊게 눌러쓴다. 주연하 역시 얼굴을 가리는 면사를 내렸다.

걸음이 이어지고, 점점 승천문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거대한 위용이 깊게 다가온다.

‘그러고 보니 황궁에 이렇게 가까이 와본 적도 처음인가?’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을 뿐, 딱히 인연이 없다고만 생각했던 황성으로 향하는 길에 선 황준우의 첫 감상은 역시 거대하다는 것이었다.

거리를 두고 내공을 이용하여 안력을 강화해 보았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또한 입구를 지키는 관병의 숫자도 제법 많아 보였다.

그도 그럴 게 승천문의 입구는 하나가 아니다.

그중 중앙은 예외적인 몇몇 경우를 제외하자면 아무리 황녀라고 하여도 이용할 수 없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걸음은 다른 방향으로 이어졌다.

“누구냐?”

소박한 옷차림에, 간소한 구성, 눈에 보이는 사실로 두 사람의 신분 귀하를 판단한 관병이 창대를 높게 세우며 눈을 부라린다.

“…….”

주연하는 대답 대신, 품에서 하나의 패를 꺼내 관병에게 보여주었다.

의아한 눈동자로 빛나는 황금패를 받아든 관병의 눈이 곧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무, 문을 열어라!”

관병이 다급히 외쳤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성으로 향하는 거대한 정문이 열렸다.

주연하가 당당히 또한 무표정하게 그 정문을 지나치고 황준우가 그 뒤를 따른다.

죽립 밑으로 주변을 살피는 황준우의 입가로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흘렀다.

‘정말 엄청나게 크군.’

승천문을 통과하면 곧장 황궁의 본 모습 정도는 보일 줄로만 알았다. 하나 승천문을 통과하니 또 다른 문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하긴 무림맹도 비슷한 구조였지.’

문 안의 또 다른 문.

그리고 그 문 안의 또 다른 문.

심처로 갈수록 더욱 높은 직위를 가진 이들이 기거한다. 황제가 머무는 황궁이라면 당연히 더할 것이다. 그렇게 또다시 몇 개의 문을 지나 비가 오는 궁을 한참이나 걷고 있을 때였다.

멀리서부터 다급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궁녀들이 보였다. 얼굴 가득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은 그들이 근처로 다가오기도 전, 손을 들어 올린 주연하가 입을 열었다.

“거기 멈추어라.”

다급히 달려오던 궁녀들이 마치 돌처럼 제자리에서 굳었다.

“누가 보낸 것이냐?”

지극히 경계심이 가득한 주연하의 물음에 눈치를 보던 궁녀들 중 중년인이 앞으로 나서며 고개를 숙였다.

“영수궁(永壽宮)의 상궁께서 보내셨습니다.”

“조 상궁이 보냈단 말이냐?”

주연하의 물음에 잠시 몸을 흠칫 떤 중년인이 고개를 조아리며 다시금 답했다.

“예. 마마.”

곧 주연하의 입가로 조소(嘲笑)가 어렸다.

“희한하구나. 내 조씨 성을 가진 상궁을 둔 적이 없거늘.”

그 서늘한 말에 대답을 하였던 중년인이 당황한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썩 물러가라. 내 궁으로 향하는 길은 내 발로 갈 것이다.”

“하오나 마마!”

“길을 비키라고 하였다.”

궁녀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는다.

쏴아아-!

쏟아지는 빗줄기 소리만 가득한 침묵이 흐르지만 다른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는다.

전신에서 냉기를 풍기기 시작한 주연하가 앞으로 나서려는 때였다.

“마마께서 길을 내어달라고 하지 않느냐.”

먼저 앞으로 나선 황준우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 두 자루 중 하나를 뽑아 든다.

정체를 감추기 위하여 대장간에서 대충 골라온 검이다.

하나 궁녀들에게는 그것만으로 큰 위협이 된 듯했다.

“어, 어찌…….”

“이곳이 어딘 줄 알고!”

“어디긴, 황성이지. 그리고 너희는 감히 마마의 앞에서 명령에도 불구하고 길을 막고 있지. 목을 베도 할 말이 없는 처지 아닌가?”

말이 이어질수록 황준우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기세가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그 기운을 정면으로 받아들인 시녀들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진다.

짧은 대치가 더해지자, 대다수가 다리에 힘이 풀려 제자리에서 쓰러졌다.

심한 경우 몇몇은 의식을 잃기까지 하였다.

결국 막아서던 궁녀들이 길을 열 수밖에 없었다.

그 틈새로 또 다른 궁녀 무리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 선두에 선 인물은 황준우에게도 제법 낯이 있는 인물이었다.

“마마!”

“소호…….”

주연하의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대영반의 암살 소식이 전해졌다.

더 이상 앞을 막아설 것은 없다는 생각에 곧장 주연하를 확보하고 그녀의 목을 조를 준비를 하려던 모충기의 인상이 확 일그러졌다.

“황녀가 처음 보는 무인과 함께 입궐했다고? 심지어 그 탓에 황녀를 놓쳤어?”

“……죄송합니다.”

강하게 탁상을 내려친 모충기의 눈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낭인이 막아서면 놈을 베고서라도 데려왔어야지! 황녀의 무공이 만만치 않다 하여 궁녀로 위장한 무인들도 있었지 않는가!?”

“그게…… 모두 당했다고 합니다.”

“뭐? 죽었다는 뜻인가?”

“아닙니다. 다만…… 기세를 못 견뎌 기절하였다고…….”

“이런 미친 자식이!”

모충기가 거친 음성을 흘리며 탁상 옆에 있던 벼루를 들어 보고하는 사내의 이마를 향해 던졌다.

강렬한 타격음과 함께 피와 검은 먹이 섞이며 사내의 이마를 타고 흘렀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게냐!? 비화대(秘花隊)가 기세를 못 견뎌 기절했다고!?”

여인이란 존재는 무림뿐만이 아니라 황성 내에서도 다양하게 이용된다. 그런 그들을 마음먹고 육성한 무인들로 만들면 어떨까? 모충기는 그러한 생각으로 비화대를 만들었다. 어마어마한 황금을 투자해서 천하의 재능 있는 여아들을 모아 영약을 먹이며 길렀다. 성정 또한 유약해지지 않게 혹독한 훈련을 감행하라 일렀다.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몇 번, 비화대의 훈련장소에 찾아가 그들의 모습을 확인한 결과 어린 소녀들은 모충기가 바라는 모습으로 훌륭히 성장하고 있었다.

냉정하고, 악독하며, 강인했다.

살수들도 흔히 겪지 않을 지옥과도 같은 생존 훈련에 던져졌으니 당연한 결과였을 터다.

그런 비화대가 고작 기세에 밀려 의식을 잃었다고 한다.

화가 머리끝까지 솟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죄송합니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사내의 모습에 찌푸려졌던 모충기의 미간이 조금씩 펼쳐졌다.

생각해보자면 사내의 탓을 할 것이 아니었다.

그는 비화대의 교관이 아니었다.

단지 그들을 이끌고 이번 임무를 맡았을 뿐이다.

따지자면 실패에 대한 책임만을 말하면 될 일이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쉰 모충기가 자리에 앉아 이마를 짚었다.

“먼저 선수를 쳐서 황녀를 확보해 놓는다면 좋았으련만…….”

입맛을 다신 모충기의 생각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황녀의 외출소식을 접하여 꼬리를 붙이려 했으나 실패했다. 오히려 정체 모를 조직의 방해 탓에 아끼던 수하들만 여럿 잃었다.

이는 좋지 않은 일이다.

좋은 일을 찾자면, 오래도록 계획해왔던 풍혁기 암살은 성공했다.

문제는 풍혁기가 죽은 사실을 알게 되면 주고치에게 꼬리를 치고 있는 다른 권력자들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여태껏 풍혁기의 눈치를 보느라 조심스러웠던 승냥이들이 한순간에 주연하에게로 덤벼들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살점을 뜯어 새로운 제국의 황제가 될 범에게 가져다 바치는 아양을 부리기 위해서다.

사실 그 승냥이 무리에는 모충기 본인도 포함될 수 있었다.

때문에 갑작스럽게 황궁을 나갔던 주연하가 홀로 황성으로 돌아오는 좋은 기회를 잡으려 했다.

하나 이 역시 실패했다.

따지고 보면 여러모로 불쾌한 일이 더 많이 벌어졌다.

하지만 다행히도, 모든 것이 불리한 상황은 아니었다.

‘아직 풍혁기의 죽음을 아는 녀석은 몇 없다.’

언젠가는 소문이 날 테지만 최대한 입단속을 시킨다면 몇 번의 기회를 더 가질 수 있다.

모충기는 그 몇 번의 기회 내에 확실하게 주연하를 손에 넣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대영반의 목은?”

“여전히 답신이 없습니다.”

“설마 챙기지 않은 건 아니겠지?”

“…….”

사내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일은 사내의 주관이 아니었다.

‘만약 놈이 목을 챙겨오지 않는다면…… 난 또다시 만약을 생각해야 한다.’

혹시나 모를 걱정에 꼭 풍혁기의 목을 가져오라고 명령했던 모충기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모충기가 기억하는 풍혁기는 실상 황궁의 전설이라고 불려도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다. 그런 풍혁기가 비 오는 어느 날, 믿었던 후임의 배신으로 죽게 된다.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생각만큼 쉽게 풀리니 오히려 기분이 이상했다.

마음 한편에는 알 수 없는 허망함마저 어릴 정도였다.

하니 결과를 확인해야 한다.

물론 가능하다면 말이다.

“더 이상 일이 복잡해지지 않았으면 좋겠군.”

모충기의 입에서는 옅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쏴아아-!

빗줄기가 쏟아지는 북경의 골목길.

인적이 드문 그 사이로 두 청년이 들어섰다.

“이게 말씀하신 시체인가?”

“조용한 곳에 묻기만 하면 되는 일이지?”

“행운이네.”

골목길 사이에 누운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시체를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는 두 청년의 눈이 반짝였다.

고작 시체 하나를 치우는 일로 금화를 두 문이나 받았다.

절로 기분이 들뜰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 결국 청년들은 제 임무를 다할 수 없었다.

“물러가라.”

경장갑 울리는 소리와 함께, 두 청년의 등 뒤로 나타난 거대한 기척이 무거운 목소리를 흘린다.

“헉!?”

헛바람을 집어삼키는 둘을 거대한 손으로 가볍게 치우고는 쓰러진 노인에게로 다가간 거인(巨人)이 노인의 몸을 들쳐 업었다.

너무나도 가벼워 보이는 그 동작에 황금에 눈이 멀어 골목길로 들어섰던 두 청년은 침을 꿀꺽 삼키기만 하며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서늘하군. 그래도…… 아직 심장은 뛰고 있어. 살아남는다면 소장주께 큰 힘이 되어줄 수 있겠지.”

노인을 업고는 알 수 없는 말을 한 거인의 시선이 주변을 훑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거인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인물이 눈앞에서 훌쩍 사라지는 모습을 목격한 두 청년이 눈을 비빈 후 서로를 바라본다.

“바, 방금 우리……”

“헛것 본 건 아니야. 진짜 사람이었다고.”

“무림 고수…….”

그것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초고수다.

그 사실을 깨달은 두 청년은 기겁한 얼굴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머릿속에는 빨리 북경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연유는 모르겠지만 고작 금화 두 문에 무림 고수의 일에 엮여 죽고 싶지는 않았다.

살기 위해서는 달아나야 한다.

청년들은 생존을 위한 본능 외에는 모든 것을 잊고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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