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재생-213화 (213/373)

학사재생 213화

제 213화

4. 새로운 질서

무림대전.

군부가 협력하였지만 그 규모가 미미하였으며, 주적인 천마신교를 비롯하여 구성원 대다수가 무림인의 싸움이었기에 그리 명명된 대전투는 많은 변화를 만들어냈다.

첫째로 세외 무림의 일각으로 가장 오래도록 중원을 위협하였던 천마신교가 와해되었다.

한 번이라도 목숨을 잃었던 이는 동탁의 소멸과 함께 영원한 잠에 빠져들었으며,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끝까지 살아남았던 이들은 도망치던 중 마주한 무신의 검에 무릎 꿇었다.

천산 어딘가에는 여전히 천마신교의 교인들이 살아가는 마을이 남았지만, 그들 중 무공을 익힌 이는 극소수였다.

무공을 익힌 이들 대다수는 강제로라도 전쟁에 동원되었으니 당연한 일일 터였다.

결국 더 이상 천마신교라는 이름이 다시 중원강호에 나올 일은 없어졌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두 번째로는 신규 세력, 남천맹의 득세(得勢)다.

당시 전장에 있던 이들 모두가 인정할 만큼 남천맹의 무인들은 강인했다.

또한 강호인의 열기로 가득했다.

무존 서문지언은 마치 전장의 대장군처럼 전장을 호령하였으며, 거검(巨劍)으로 명성 높은 거기검 경호는 가장 용맹한 선봉장수가 되어 적들을 가로질렀다고 하였다.

새로이 강호의 여중고수 중 하나로 이름을 올린 검봉(劍鳳), 황서연의 등장 역시 충격적이었다.

남천맹주이자 무신이라고 불리는 제 오빠의 재능이 단순한 우연이 아님을 증명한 것이다.

뿐만이 아니었다.

전쟁 이후 남천맹에서는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던 많은 영웅이 탄생했다.

쌍룡창(雙龍槍) 홍산, 지악검(支惡劍) 벽제운, 철쇄권(鐵碎拳) 창우량 등.

남천맹이 단순히 젊은 혈기로만 이루어진 조직이 아님을 단단히 보여 준 셈이다.

그러한 수많은 영웅들의 정점에 남천맹주, 무신 황준우가 섰다.

전쟁 이후 그를 남측의 무신이라 부르는 이는 누구도 없었다.

전장의 하늘에 떠, 하늘을 뒤덮는 거대한 검을 휘둘러 땅을 가른 무신의 명성은 천하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무신의 탄생과, 수많은 영웅들의 발호는 은연중에 떠돌던 가설을 천하 전체에 뿌리내리게 하였다.

우내십존의 시대가 끝을 맺었다.

천하무림은 무신의 발아래 새로운 영웅들의 이름으로 재편될 것이다.

일신시대(一神時代)의 개막이었다.

우내십존이라는 낡은 명호도 모두 파괴되었다.

호사가들은 강호의 새로운 영웅들을 무신의 이름 아래 줄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새 잔에는 새 술을 채워야 하는 법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남천맹이 득세하는 동안, 본래 무림제일세력으로 이름 높던 무림맹은 침묵을 지키는 듯했다. 하나 그 내부사정이 제법 바쁘게 돌아가고 있음은 분명했다. 맹주 운백이 그 어느 때보다도 과격하게 움직이며 변화를 주도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나 그렇다고 하여 크게 이름을 떨친 남천맹의 독보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누구도 없었다.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몰아내듯, 그야말로 신(新) 무림의 새로운 질서가 자리 잡은 것이다.

전쟁이 끝난 이후, 합비로 돌아온 황준우는 무림맹 측에서 보낸 합의 전서를 확인한 후 고개를 주억였다.

“향후 오 년간 매해 황금 이십만 문을 주겠다는군.”

“나쁘지 않은 제안이군요.”

전왕이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체면치레 이상은 하려 한 게 분명하네. 오 년이면 황금이 백만인데, 무림맹이라고 해도 쉽지 않은 금액이지.”

“예. 무림맹주가 부탁하며 했던 말이 괜한 허언은 아니었던 셈이지요.”

“아아, 그날은 제법 놀랐지. 자존심 제법 강한 양반으로 알고 있는데 말이야.”

전쟁이 끝난 당일 저녁, 사후처리를 고민하던 때 찾아온 운백이 황준우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모두가 깜짝 놀랐지만 눈 하나 아랑곳하지 않은 운백은 최선을 다하여 지원군에 대해 보답을 할 터이니 무림맹의 존속을 부탁했다.

운백의 부탁은 제법 주효했다.

본래는 비무를 통해 어느 정도 기를 꺾어두려 하였으나, 먼저 찾아와 무릎을 꿇을 정도니 괜한 피를 볼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무엇보다 전왕의 요청에 의하여 보여주었던 황준우의 무위와, 남천맹 무인들의 분투가 이미 모두의 머릿속에 크게 새겨졌다. 괜한 명성을 얻고자 무리를 할 필요도 없게 된 상황이었다.

덕분에 황준우는 어렵지 않게 고개를 주억였다.

무림맹과의 관계를 정리하니 나머지 사후처리는 크게 할 일이 없었다. 황준우를 비롯한 남천맹은 합비로의 복귀를 선언했다.

그로부터 한 달이 흐른 지금, 무림맹 측에서 일종의 공물을 바치겠노라고 전해왔다.

체면치레나 하겠다고 대충 적어 보낸 금액은 아닌 듯하니 남천맹 입장에서도 물고 늘어질 부분이 없었다.

“그렇게 하라고 답신해주면 되겠네. 아, 그리고 첫 황금은 들어오는 대로 이번 전쟁에서 피해를 입은 유족(遺族)이나 부상자들에게 전액 돌려줘.”

황준우의 말에 전왕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면 공로자들이 받아간 황금은…….”

“그건 내 돈으로 처리한 거니까 별개지.”

“음…….”

“왜 그래? 나 이제 개인 자산도 많아. 남천맹주 여기에 그냥 앉아 있기만 해도 너랑 사마정이 돈을 쌓아주는데 가난할 리가 없잖아.”

“알고는 있습니다만…….”

“내가 뭐 사치 부릴 일이 많은 것도 아니고, 많은 돈 이런 때 써야지 어디 쓰겠어.”

사실 황준우가 사치를 조금 부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전왕이었지만 생각을 입 바깥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본디 사치품이란 권력을 상징하기도 하거늘…….’

아무리 정치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하여도 이런 부분은 황준우의 성정상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 뻔했다.

무엇보다 지금의 소탈한 모습이 젊은 무인들로부터 지지를 이끌어내고 있기도 하니 마냥 사치품으로 치장한 허장성세가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알겠습니다. 뜻대로 하시지요.”

결국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이는 전왕을 바라본 황준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좋아, 그러면 오늘 업무는 여기서 끝.”

“예?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는데요?”

“뭐, 이거?”

황준우의 검지가 책상 좌측에 가득 쌓인 서류 뭉치를 향했다.

“예. 바로 그것 말입니다.”

전왕이 진중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남기연합 때와 다르게, 남천맹은 제대로 된 무림의 조직으로서 본단을 구성 중에 있었다. 사실은 이조차도 귀찮아한 황준우가 거절하려 했지만 서문지언과 전왕이 하나 되어 목소리를 높여 본단 구축을 주장했다.

어느 정도 빈틈이 있던 남기연합 때라면 모를까, 남천맹은 엄연한 강호제일의 조직이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계속 몰려들고 있었다.

이런 때에 제대로 된 구심점을 갖출 본단이 없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단순한 허세나 겉보기용이 아니더라도 본단의 존재는 필수적이라는 것이 두 사람의 의견이었고, 황준우는 마지못해 그를 승인했다.

자연스레 황준우의 임시 집무실에는 본단 건축에 대한 서류들로 가득 쌓여갔다.

자잘한 결재 서류라면 모를까, 큰돈이 들거나 상징적인 물품을 만드는 데에 있어서는 맹주의 동의가 필요할 수밖에 없는 탓이다.

“아니, 난 솔직히 하지 말자고 한 건데 너랑 부맹주가 우겨서 시작한 일이잖아. 이렇게 서류가 많이 나올 줄도 몰랐고…….”

“하지만 해주셔야 합니다.”

“난 어린 시절 학문 공부를 마친 이후로는 어지간하면 책상에 앉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야.”

“최근에도 하루에 한 번쯤은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보신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이제 습관같이 남은 일이랄까?”

“업무도 습관처럼 적응하셔야 합니다.”

“아, 몰라. 안 해. 솔직히 나랑 이런 게 어울린다고 생각해?”

꽤나 진지한 전왕의 대답에 황준우의 신형이 휘청였다.

“진지하게?”

“주공이라면 해내실 수 있습니다. 누구보다 훌륭한 군주가 되실 수 있어요.”

“너, 그거 누가 잘못 들으면 반역죄에 해당된다.”

“상관없습니다. 제게 있어 유일한 군주란 오로지 주공뿐이니까요.”

“와, 너 진짜 많이 변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한참을 전왕과 다투던 황준우가 눈을 감고는 팔짱을 꼈다.

짧은 침묵이 흐르고, 눈을 부릅뜬 전왕이 손을 뻗어 황준우의 팔목을 움켜쥐었다.

분명 눈앞에 보이던 황준우의 모습이 연기처럼 흩어진 것도 순식간이었다.

“이형환위를 이런 데다 쓰시다니…….”

애초에 설마하니 도망갈 줄은 몰랐던 전왕이 경악에 가득 찬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누가…….”

임시지만 본단으로 발탁된 만큼 주변에 숨어 있는 무인의 수는 제법 많았다.

그리고 그들 중 몇몇은 절정고수다.

하나 그렇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마음먹고 달아나는 무신을 잡을 수 있을 리가 없다.

“휴우…….”

결국, 산더미 같이 쌓인 서류를 마주 보고 앉은 이는 전왕 본인이었다.

사실 오래도록 황궁 생활을 해 온 그에게 있어 이런 업무는 그리 어려운 편이 아니었다.

다만 진심으로 황준우가 조직을 이끄는 수장으로서 움직이는 모습이 보고 싶을 뿐이었지만, 뜻을 이루기는 아무래도 어려울 듯 보였다.

“미안, 전왕. 하지만 진짜 못 하겠어.”

천장에 숨어 한숨을 내쉬는 전왕을 잠시 바라보던 황준우는 혼자만의 사과를 남긴 후 집무실을 벗어났다. 임시 본단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든 건물은 남궁세가 측에서 준비한 장원으로서 집무실 외로도 침소, 객실, 연무장 등 제법 그럴싸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그중 황준우의 걸음이 향한 곳은 당연히 연무장이었다.

몸이나 조금 움직이면 책상 앞에 앉아 있던 답답함이 풀릴 것이라고 생각한 탓이다.

하나 연무장 입구에 도착한 황준우는 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 넓다고 볼 수 없는 연무장 내부에는 이미 열기가 가득했다.

“하앗-!”

“타앗-!”

기합을 내지르며 무공을 수련하고 있는 이들은 다양했다. 아직은 어리다고 볼 수 있는 소년들, 또는 청년들, 심지어 중년인들도 있었다. 남녀도 가리지 않았다. 노인만 아니라면 누구든지 무공을 익힐 수 있다. 병장기 또한 가리지 않고 사용할 수 있다.

황준우가 전왕에게 건넨 칠투기의 장점을 이용해 육성 중인 남천맹의 새로운 기둥이 될 무인들이었다.

그들 사이에 황준우가 나타난다면 무슨 반응을 보일지야 뻔했다.

자칫하면 황준우의 위치를 찾아낸 전왕이 쫓아와 다시 집무실로 끌고 가려 할 수도 있다.

“침실에 앉아서 명상이나 해야겠다.”

그리 생각한 황준우가 아쉬운 걸음을 돌리려 할 때였다.

제법 익숙한 얼굴이 기척을 감춘 그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저 녀석 봐라?’

한 손에는 꽃을 든 채, 얼굴을 붉히고는 조심스럽게 걸어나가는 청년은 삼 일 전 남천맹에 손님의 자격으로 방문한 인물이었다.

도독첨사 초호서.

무림대전이라 명명된 천마신교와의 전쟁에서 군부의 세력을 이끌던 인물이다.

“너 내 동생한테 가냐?”

“와아악-!”

기척을 드러낸 황준우가 건넨 말에 제자리에서 바닥으로 엎어진 초호서가 비명을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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