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11화
제 211화
탐심과 기쁨으로 가득 찼던 동탁의 마음에 조금씩 조급함이 깃들었다.
“굴복해라. 어서 굴복하란 말이다. 인간이여.”
이를 빠득 가는 동탁의 눈이 붉게 달아오른다.
그의 정면, 어둠에 휩싸여 괴로움에 몸부림치면서도 결코 굴복하지 않는 황준우가 주먹을 움켜쥐며 입술을 달싹였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네깟 돼지 새끼한테 내가 굴복할 리가…….”
이를 빠득 간 동탁의 눈이 빠르게 돌았다.
몸에서 쏟아져 나오는 기세는 언뜻 더욱 강렬해지는 듯하다. 하나 여전히 황준우의 무릎은 굽혀지지 않았다. 눈빛 역시 생생히 살아 있었다.
“헛된 발악에 불과하다. 네놈이 아무리 마왕의 좌에 오를 업을 쌓았다고는 하나 아직은 한낮 인간에 불과하지 않느냐? 그만 포기하여라. 네가 그리 버틴다고 하여서 바뀔 것은 무엇도 없다. 이쯤에서라도 마음을 놓는다면 내 선의를 베풀어 네가 이끌고 온 인간들에게 한 번의 기회를 주도록 하마.”
동탁은 어린 아이를 어르고 달래듯 말하면서도 기가 막힌다고 생각했다.
설마하니 지배의 권능이 이만큼이나 먹히지 않는 인간을 마주한다는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모여드는 어둠의 힘이 조금 더 있다면 좋으련만…….’
진군시킨 천마신교의 불사군대가 생각 외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덕분에 적들 사이에서 피어나야 하는 공포, 절규 등 음기(陰氣)에 속하는 감정의 파장이 너무 얕았다.
잠깐이나마 흔들릴 때가 있었지만, 굳건하게 자리 잡은 마음이 꺾이지 않으며 오히려 양기(陽氣)를 일으키고 있다.
이 상태로 시간을 끈다면 오히려 불리한 측은 동탁 본인이 될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들 정도였다.
“왜? 일이 생각대로 안 되나…… 보지?”
이를 드러내며 진한 웃음을 보인 황준우가 그런 동탁의 생각을 꿰뚫은 듯 물어왔다.
“네게 기회를 주는 것이다.”
곧장 얼굴을 굳힌 동탁이 차갑게 말했다.
“개소리…… 하지 마. 속 뻔히 보이는 수작……에 넘어갈 정도로…… 멍청하진 않으니까. 흐흐…… 조급해 보이는걸?”
황준우의 웃음이 흐른 이후, 침묵의 시간이 지나갔다.
겉으로는 그 누구도 조급해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황준우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여유를 찾는 중이었다. 가슴 한편에 자리 잡은 채 작은 공명음을 토하는 늠군의 관이 그에게 힘을 북돋워 주고 있었다.
‘과연…… 네 덕인 거냐. 정말 도움을 많이 받는구나.’
늠군의 관이 몸을 감싸는 어둠을 밀어내는 것을 느끼며 황준우의 얼굴엔 점점 평안이 떠올랐다.
반면 동탁의 낯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짙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황준우를 감싸고 있던 어둠의 기운 역시 눈에 뜨이게 약해지고 있었다.
‘잘하면 움직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기회이면서도 위기다.
만약 몸이 반응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으면 조급해진 동탁은 여포를 통해 그의 목을 단숨에 베려 들 수도 있었다.
황준우는 최대한 침착하게, 몸의 상태를 확인하면서 동탁을 예의주시했다. 동탁 역시 묵묵히 황준우를 살펴보던 끝에 허탈한 음성을 흘렸다.
“과연…… 네놈, 기이한 물건을 가지고 있구나.”
늠군의 관을 들켰다.
어둠이 짙을 때는 나타나지 않던 가슴 한편의 빛이 이제는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탓이었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 게냐…… 내게 기회를 주고 다시 빼앗아가다니…….”
이를 간 동탁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래, 인정하마. 네놈을 굴복시킬 순 없겠구나. 하늘을 원망하지도 않겠다. 먼 과거에서부터 하늘은 결코 나를 위하는 법이 없었으니…….”
한숨을 내쉰 동탁의 손이 허공으로 떠오른 후, 천천히 지면으로 떨어졌다.
“이번에도 역시 역천(逆天)을 따르겠다. 여포여, 나의 양자여. 살아 있는 무신의 목을 베어라.”
목소리는 느긋했지만, 여포의 행동은 빛살처럼 빨랐다.
‘아직……!’
몸이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를 악문 황준우는 도박을 하듯 몸을 내던졌다.
여포의 공격을 볼 여유도 읽을 틈도 없는, 순수하게 직감에 의존한 움직임이었다.
황준우의 목울대가 얕게 베어 나가며 핏물이 허공으로 왈칵 튀어나갔다.
‘죽을 뻔…….’
아니, 아직도 죽을 위기다.
한 번 명령을 받은 여포는 망설임 없이 다음 공격을 감행해 왔으니 말이다.
다행인 사실을 뽑자면, 피가 쏟아지며 정신이 제법 돌아왔다는 것이다.
이제는 여포의 공격을 보지는 못해도 읽을 수준은 되었다.
‘제법 꼴사납겠지만, 피할 수 있어.’
황준우는 바닥으로 엎어지며 망설임 없이 몸을 굴렸다.
방천화극이 내리 찍히는 충격으로 지면이 파괴되며 황준우의 몸이 실 풀린 연처럼 허공 높이 떠올랐다. 퍼지는 충격파에 저항하지 않고 몸을 실은 덕이었다.
“크아아-!”
괴성을 내지르며 허공으로 솟아오른 여포의 방천화극이 단두대의 칼날과 같이 떨어져 내렸다.
더 피할 공간이 없는 허공에서, 수왕검을 휘둘러 막아선 황준우가 지친 웃음을 보인다.
“이제 몸이 조금 풀리기 시작한 것 같은데?”
“크아악!”
“대화라도 할 수 있다면 더 좋았겠는데 말이지!”
콰과광-!
폭음이 연달아 터져나가며 예리한 충격파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여전히 압도적일 정도의 공격이었지만 더 이상 황준우에게 큰 위협은 아니었다.
괴상한 방해만 없다면, 오히려 이러한 상황은 즐거움의 일부일 뿐이다.
격전을 통해 상대와 나 자신의 무를 겨룬다.
익히고, 배우고, 쫓아 나가며, 싸운다.
다소 오만해도 될 만큼 혼자만의 영역에 있던 황준우에게 있어 수준이 맞는 격전을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흥분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뜨거운 감정이 다시금 가슴 한가운데에서 폭발하듯 용솟음쳤다.
하나 언제까지고 그 감정에 취해 춤을 출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열심히 싸워준 동료들을 위해서라도…….’
이 싸움도 끝을 내야 한다.
삼국의 무신이라 불리는 여포의 움직임을 쫓고, 쫓아, 그 뒤를 완전히 읽어낸 황준우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어찌 보자면 여포의 무는 황준우의 심상지기와 닮아 있었다.
가장 효율적인, 비상식적일 정도의 움직임으로 적을 격멸하는 힘.
‘공간참(空間斬).’
길게 뻗어진 수왕검이 짧게 떨리며 울음을 토했다.
시간을 수천 분의 일로 가른 그 틈새에서 공간을 가르며 사라진다.
이윽고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적의 목울대를 파고든 살결 깊숙한 틈새다.
“크륵!”
휘두르던 방천화극을 멈춘 여포의 시선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자신의 목을 향했다. 핏물이 목 아래로 축축이 젖어 내리고 있다.
“덕분에 더 빠르게 날릴 수 있게 됐어. 방금 그 검은 내가 만들어 낸 최고의 쾌속(快速)이야.”
마음의 힘이 자연에 닿아 공간마저 뛰어넘은 그 공격은 황준우의 최선이자, 최고로 빠른 일격이었다.
“크흐으…….”
우는 듯, 웃는 듯 알 수 없는 신음을 흘린 여포가 핏물이 흐르는 가슴에서 시선을 떼고는 고개를 들었다.
죽어있는 것만 같던 검은 눈동자에는 옅은 빛이 어려 있었다.
“고맙…… 다. 제대로…… 싸워볼 수 있었다면…….”
마지막 말을 남긴 여포의 신형이 허물어지듯 지면으로 떨어져 내린다.
“뭐야, 말을 할 수 있었어?”
아마 죽음이 그를 속박하던 마왕의 권능을 앗아간 덕일 터였다.
“어쨌든…… 이걸로 가장 큰 장벽은 뛰어넘은 셈이로군.”
마음을 가라앉힌 황준우의 차가운 시선이 경악한 안색을 한 동탁을 향했다.
“이럴 수가…… 봉선이 지다니, 아무리 권좌의 명(命)을 타고난 존재라 하지만 아직 인간에 불과한 자에게?”
“뭐라는 거야. 빌어먹을 뚱땡이 자식.”
황준우의 검이 동탁의 몸을 반으로 가를 듯 벼락처럼 떨어졌다.
동시에 동탁의 신형이 어둠에 휩싸이며 녹아든다.
“오호…… 그 대마술사인가 뭔가 하는 놈이 보여준 일이랑 비슷한 건가?”
눈을 반짝 빛낸 황준우의 상단전이 크게 개방되었다.
어둠에 녹아든 동탁이 지면 아래에 숨어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놓칠 수 없지.”
추격이 시작되었다.
전장으로부터 백 리 밖.
드넓은 평야 위, 격전을 이어가던 검은 뱀의 육체가 푸른 거북이의 배아래 깔려 허물어진다.
작은 먼지 가루처럼 흩어지는 검은 기운을 무심히 내려다보던 푸른 거북이의 등껍질 위, 짧은 지팡이를 든 채 거친 숨을 내쉬던 어린 소녀가 지면으로 내려선다.
소녀의 발끝 앞, 입가로 핏줄기를 쏟으며 무릎을 꿇은 장년인이 헛웃음을 흘렸다.
“젊은 괴물 놈에 이어 곤륜의 도사까지…… 정녕 대업을 이루기가 이리도 힘들단 말인가!”
한탄 섞인, 어딘지 모르게 분노까지 느껴지는 장년인의 외침에 소녀, 신아가 차가운 음성을 흘려 답한다.
“네 대업은 하늘의 뜻이 아니니, 당연한 이치다. 어리석은 길을 택한 그릇된 마술사여.”
“도(道)에 그른 것이 어디 있고, 어리석음은 또 어디에 있겠는가. 네놈, 곤륜의 도사들이 떠드는 말이야말로 이기적인 아집에 불과하다 생각하지 않는가?”
“도의 옳고 그름은 없지만, 적어도 천명(天命)을 따르는 윤리(倫理)는 있어야 하는 법이다. 마도(魔道) 역시 하나의 길이라 칭할 수 있으나 그로 인해 타인에게 화(禍 )를 입히거늘 어찌 공생(共生)을 논할 수 있겠는가. 길이란 본디 함께 어울러 살아가는 데에 중점을 두어야 하는 법이다.”
“그 말이 모순이란 것이다. 곤륜의 도사여. 함께 어울러 살아가는데 어찌하여 마도만을 배척하는가. 누군가 화를 입어야 한다면 그 역시 명운. 네 연놈들이 늘 떠드는 천명이 아닌 게냐?”
“…….”
미간을 찌푸린 신아의 지팡이가 높게 들어 올려졌다.
“긴 대화는 의미가 없겠지. 네가 회개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하나 지옥에서 벌을 받기는 바라마. 어리석은 마술사여.”
지팡이 끝에서부터 흘러나온 푸른빛의 기운이 넘실거리며 마술사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지면으로부터 갑자기 솟아오른 어둠의 손이 지팡이를 막아선다.
그 육중한 힘에 뒤로 몇 걸음이나 물러선 신아가 이를 아득 깨물었다.
“마왕 동탁!”
“오오, 마왕이시여!”
희비가 엇갈렸다.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머리를 조아린 장량의 눈에는 희열이, 신아의 얼굴에는 난색이 어렸다.
하나 정작 장량을 구해낸 동탁의 표정만은 좋지 못했다.
“어서, 최대한 빠르게 탈출할 방법을 생각하여라. 나의 마술사여.”
오만한 웃음을 흘릴 줄만 알았던 동탁의 다급한 음성에, 장량이 의문을 표했다.
“시간이 없다! 어서 빨리 시킨 일이나 해내란 말이다!”
짜증 가득 담긴 음색을 내뱉은 동탁이 발을 구를 때였다.
“보아하니 그 녀석이 제법 중요한가 보네. 꽁무니 빼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챙기려는 걸 보니까 말이야.”
지면을 미끄러지듯이 날아온 황준우의 스산한 음성이 동탁의 귀를 때렸다.
그 순간, 동탁이 보인 다급함의 원인을 깨달은 장량의 손이 다급히 움직였다.
하나 그보다 발밑에서 튀어나온 나무줄기가 그들의 발목을 움켜쥐는 것이 더욱 빨랐다.
머리 위로는 빛의 그물이 팔방을 뒤덮는다.
완전히 사로잡혔다.
그 사실을 깨달은 동탁과 장량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또 한 번 희비가 엇갈린 전장에 내려선 황준우가 검을 겨누며 말했다.
“차라리 잘됐네. 이참에 둘 모두를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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