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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204화 (204/373)

학사재생 204화

제 204화

“오빠!”

밝은 목소리가 주변을 휘감던 중압을 풀어낸다.

“그래, 내 귀여운 동생. 여기까지 와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위험하게.”

다소 가벼워 보일 정도의 웃는 얼굴로 뛰어드는 황서연을 품에 안아 머리를 쓰다듬는 황준우를 보며 에이지는 신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근래 들어 동지들을 공격하는 무인들이 있다 하여 직접 행차한 걸음이거늘…….’

모든 정황이 그의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났다.

무인들이란 것이 고작 셋이라는 사실에서, 그들 하나하나가 동영 전체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고수라는 사실, 거기에 더해 가장 어린 여자 아이가 최고수다.

몇 년이 지나면 동영삼대검호(東瀛三代劍豪)중 하나로 거론되는 그를 뛰어넘을지도 모를 천재(天才)다.

놀라운 일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버겁긴 해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탐이 났다.

저 찬란한 재능이 아직 농익지 않은 열매란 사실이 오래도록 큰 흔들림 없던 그의 마음에 파도를 치게 했다.

‘나의 검술과, 중원의 무공, 그리고 저 아이의 재능이 합쳐진다면 무엇이 두려울까.’

짧은 순간 에이지는 왕을 꿈꾸었다.

바다를 누비며 손가락질을 받는 거짓 왕, 약탈자들의 왕이 아닌 진짜 육지의 지배자가 되는 꿈이었다.

그 모든 꿈이, 마음속에 피어오르기 시작한 야망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온 무신(武神)이 강림하며 모두 산산조각 났다.

유리 조각처럼 깨어져 마음속 어디에도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채 사라진다.

“보자, 그러니까 이 배가 해적 두목의 것이란 거지? 저 녀석이 해적왕인가 뭔가 하는 놈이고?”

“예. 그렇습니다. 그나저나 도련님은 언제나 나타나는 시기가 참 적절하네요.”

“일부러 맞추시는 것 같을 정도입니다.”

“그래도 난 좋은데? 왠지 오늘 느낌이 좋더라니.”

“본능 같은 거지. 그나저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풍경에서 저들끼리만 자유로워 보이는 네 사람의 대화가 끝을 맺었다.

어깨를 으쓱하며 주변을 둘러 본 황준우와 시선을 마주친 해적들은 자연스럽게 눈을 피한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파격적인 등장에서부터, 좌중을 억누르는 기세까지 이미 인간의 영역을 한참이나 벗어난 일이다.

그들에게 보이는 황준우는 이미 인간이 아닌 신이었다.

“그대가…… 중원제일고수요?”

“호오……?”

마지막으로 시선을 마주한 해적왕, 에이지가 붉은 선혈을 입술 아래로 뚝뚝 흘리며 묻는다.

저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 얼마나 각고의 노력을 했을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현재 바다 위 주변 일대의 자연지기는 모두 황준우의 조율 아래 해적들의 몸을 그물에 엮은 것처럼 꽁꽁 감싼 채였다. 특히 에이지의 경우에는 더욱더 세심하게 신경을 써 눈 한 번 껌뻑이기 힘들게 만들어 놓았다.

한데 그 강압을 이겨내고 입을 열어 말을 건넸다.

“의지력은 칭찬해줄 만하네. 하긴, 그쯤 되니까 천재도 아닌 게 별 무공 없이 초인 지경까지 올랐겠지.”

황준우의 말에 주변에 위치한 황서연, 경호, 홍산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고?”

“저 해적왕이 말입니까?”

“아아,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익히지 않은 건 아닌데. 일류도 못 될 허접한 것이나 주워 배웠단 거지. 언제 한 번 중원에 왔었나 본데?”

“……그대가, 중원제일고수인지 물었소.”

다른 생각은 할 여유조차 없는지, 또 한 번 돌아오는 되물음에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의지력을 봐서 예우 정도라고 생각해. 맞아. 내가 중원제일고수, 남천맹주 무신 황준우다.”

어째서인지 직위를 말할 때보다, 별호를 읊을 때 목소리가 더 커진 황준우가 가슴을 폈다.

과거에는 별것 아니었던, 허장성세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말이다. 한데 인간은 역시 잃은 뒤에야 소중함을 안다고 할까? 무인으로서 제대로 된 무명(武名)이 없다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슬픈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심지어 그 무명이 황준우에게 있어서는 무신이었다.

얼마 전에야 드디어 되찾은 이름이 어쩐지 설레게 느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무신…… 과연…….”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말할 기력이 없는지 숨을 헐떡거리는 에이지를 본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그럼 궁금한 건 풀린 것 같고, 일단 좀 맞자. 딱 죽기 전까지만.”

동시에 황준우의 신영이 허공에서 수십으로 변해 번쩍였다.

퍼버버벅-!

호흡을 다섯 번도 내쉬지 않을 시간에 해적 잔당들이 모두 바닥에 쓰러졌고, 홀로 남은 에이지의 얼굴은 자연스레 창백하게 떠올랐다.

“우선 네 죄목을 알아야겠지? 넌 건드려서는 안 될 사람에게, 해선 안 될 말을 했어.”

누가 말릴 틈도 없었다.

에이지의 귓가로 음산한,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고 눈앞에 별빛이 번뜩였다.

‘밤하늘이…….’

유독 맑은 탓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도 별이 너무 많았으니 말이다.

또한 몸이 너무 아팠다.

기이할 정도로 괴로웠다.

치명적인 검상을 열 번도 넘게 입어 보았지만, 그때도 이렇게까지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몸에 화살 열 대를 꼽은 채로 달려본 적도 있지만 지금보다 아찔하지는 않았다.

비명을 지르고 싶은데, 소리조차 나오지 않는 것 또한 지옥이었다.

동영과 고려에게 바다의 재앙이라 불리는 해적왕, 나가사와 에이지는 머리털이 난 이후 처음으로 코끝이 시큰해지고 눈 끝이 팽 돌며 물줄기가 흐르는 감각을 느끼며 다시 한 번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난 하늘을 보고 있지 않은데…….’

바닥에 드러누운 채 고개를 돌릴 생각도 못 하고 배의 갑판만 바라보며 맞고 있는데 왜 자꾸 밤하늘을 떠올리고 있는지, 입가로는 자연스레 눈물 섞인 핏물이 가득 묻은 조소(嘲笑)가 어렸다.

나가사와 에이지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환한 태양이 하늘 가장 높이 떴을 때였다.

“진짜…… 해인가?”

맞아서 기절하기 전까지 내내 밤하늘이라 착각했던 칙칙한 나무 갑판을 손으로 더듬어 뒤집은 후에야 에이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맞아 죽지는 않은 것 같은데.”

“맞아 죽기 싫으면 한어로 말해라.”

귓가에 들려오는 섬뜩한 목소리에 에이지의 몸이 조건반사적으로 굳었다.

잘 뜨이지도 않는 흐릿한 시야를 돌려보니 중원의 무신이 처음 등장했을 때와 같은, 팔짱을 낀 자세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おれくじけない.”

부러질지언정 꺾이지는 않는다.

사내로서, 해적왕이라는 이름을 얹은 바다의 재앙으로서 눈을 부라린 에이지가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래, 역시 의지력은 좋아. 그것도 재능이다. 동영 놈아.”

다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강인한 인간의 정신은 결코 폭력에 무너지지 않는다.

해적으로서 바다를 누비는 동안 수많은 일을 겪었다. 같은 검호라 믿었던 실력자에게 배신당하여 함정에 빠져 죽을 뻔도 하였고, 작은 실수로 귀계에 빠져 타국의 관아에 끌려가 끔찍한 고문도 당해 보았다.

눈앞에서 자신의 생살이 수십, 수백으로까지 얇게 뜨여나가는 모습을 볼 때에도 참아냈던 에이지였다.

한데 자칭 아니, 확실히 중원제일고수가 분명해 보이는 어린 청년의 주먹은 달랐다.

아무리 지독한 고통도 어느 순간의 임계점을 넘으면 분명 견뎌낼 만한 수준으로 내려앉는다. 그것은 혹독한 수련과 같았다.

때문에 스스로의 의지로, 대단한 무공 없이 오로지 검술로서 초인의 경지에 오른 에이지 본인이 폭력에 의하여 정신이 무너질 리는 없다고 믿었던 것이다.

한데 말한 바 있듯 황준우의 주먹은 달랐다.

맞아도 맞아도 계속 아팠다.

그 어떤 고문보다도 괴로웠고, 견뎌낼 만한 수준으로 내려앉지도 않았다.

이쯤 되면 차라리 기절해버리거나 죽고 싶은 심정이 들 정도인데, 어째서인지 의식은 쉽게 꺼지지도 않고 빨리도 돌아왔다.

느낌상으로는 하루는 지난 것 같은데, 들리는 이야기로는 고작 반 시진도 안 되었을 때도 많았다.

그야말로 현세의 지옥이 따로 없었다.

심지어 첫 대화 이후 황준우는 원하는 것도 말하지 않았다.

덕분에 맞고, 또 맞기만 하던 에이지의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억울함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때릴 거면 이유라도 말하던가! 원하는 게 뭔지 묻기라도 하던가!’

세상에 그 어떤 고문도 이처럼 끔찍하게, 원하는 것도 묻지 않은 채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애초에 고문이란 것이 심문을 위해 개발된 폭력이니 당연한 일이다.

한데 황준우에게는 둘 다 없었다.

유일하게 딱 하나 있었다면 처음에 말하였던 한어를 쓰라는 것뿐.

굽힐 수 없다.

결코, 부러질지언정 꺾이지는 않는다.

“おれ…….”

“열다섯 번 정도로는 너무 적긴 하나 보네. 딱 열 배만 더 하자. 이틀 정도면 시간은 넉넉할 것 같은데.”

마지막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의지를 짜내 내뱉은 말은 눈앞에서 주먹이 시계추처럼 좌우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황준우의 말을 들은 순간 와르르 무너졌다.

“이, 이걸 이틀 동안 백 오십 번을 더 하겠다고?”

“오, 이제야 말이 통하네. 왜, 못 할 것 같아?”

빙긋 웃는 황준우를 보며 에이지는 장담했다.

농담 따먹기가 아니다.

상대는 진짜다.

이야기 속에나 나올 진짜 악마가 눈앞에 있었다.

“워, 원하는 게 뭐요? 해적들을 데리고 물러나라는 게요? 그런 것이라면 당장 시키는 대로 하겠소. 그러니 이제 제발 그만…….”

자연스럽게 에이지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깃들었다.

“아니, 누가 그런 걸 바란대? 얘는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자발적으로 하려고 하지?”

“그, 그러면 대체 어떻게 하면 되겠소?”

에이지는 정말 간절했다.

이 끔찍한 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다면 설령 악마와 손을 잡는 일이라도 미련 없이 해낼 자신이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들어줄 준비가 되었다.

그 간절함을 확인한 황준우의 눈가에 미소가 어렸다.

“좋아. 그럼 우선 질문부터 해볼까. 동영의 해적 놈들이 갑자기 왜 절강까지 와서 설치기 시작했을까?”

“해군이…… 대다수 자리를 비웠지 않습니까. 우리 입장에서야 위험한 지역보다는 안전한 곳을 노려야 되지 않겠소이까?”

“그럼 해군은 갑자기 왜?”

“그, 그건 나도 모르오. 다만 우리 측 정찰선이 먼저 알아채고 연락을 해준 것뿐이오.”

“흐음…… 이 일은 단순히 우연이 맞아 떨어졌다는 걸까?”

눈치 빠른 해적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다만 갑작스럽게 해군이 빠진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다.

‘영왕 전하 측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건가?’

이 일대를 통치하는 군왕은 영왕 주윤호다. 그는 재능이 뛰어나고 통찰이 깊어 오래도록 주변 백성들에게 환호를 받은 성군(聖君)이었다.

그런 그가 해적의 침입을 염두에 두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해군 병력을 회수했다. 그만큼이나 크고 위험한 상황이란 걸까? 기분이 좋지 않았다.

“흠…… 곳곳에서 난리로구먼.”

눈가를 가늘게 뜬 황준우의 입술이 삐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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