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01화
제 201화
좋지 않은 예감이다.
차가워진 황준우의 눈동자에 신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 짚이는 일이라도 있느냐?”
“그냥 직감 정도. 아니길 바라고 있어. 만약 그리되었다면, 나 정말 화날 것 같거든.”
“흐음…….”
조심스럽게 황준우의 눈치를 본 신아가 고개를 주억였다.
“어찌 되었든 조금만 더 기다려다오.”
“알겠어. 아, 조금 거리가 있어도 금방 쫓아올 수 있지?”
“물론이다.”
혹시 하는 마음에 직접 살펴보기로 마음먹은 황준우가 물었고, 신아가 고개를 주억였다.
“오늘은 날씨가 맑네.”
이른 아침, 눈을 뜨자마자 객점 바깥에서 들어오는 햇빛을 바라본 황서연이 상큼한 웃음을 지었다.
“요 며칠 기분이 안 좋았는데 오늘은 조금 나으려나.”
괜한 혼잣말을 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린 황서연은 검을 들고는 곧장 창문 바깥으로 뛰어내렸다.
객점 뒷문을 지나며 데운 물을 준비 중이던 점소이가 그런 황서연을 보고는 놀란 목소리를 흘리며 뒷걸음질 친다. 갑작스럽게 하늘에서 사람이 떨어졌으니 당연한 반응일 터였다.
“아아, 미안. 미안해요. 많이 놀랐나 보네.”
“아니, 아닙니다. 괜찮습니다요.”
그녀가 요 며칠째 객점에 머물고 있는 손님임을 깨달은 점소이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표정에는 여전히 경악이 가득했지만 말이다.
“아하하…… 제가 조금 힘이 넘쳐서요. 그나저나 목욕물 준비 중이시면 제 것도 부탁드릴게요. 지금부터 땀을 뺄 거라.”
“예, 예. 그리하겠습니다.”
“그러면 이따가 봐요.”
웃으면서 손을 흔든 황서연이 휙 하고 멀어진다.
잠시 멍하니, 그 빈자리를 바라보던 점소이는 고개를 내저었다.
“무림인은 정말 알 수가 없다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객점을 벗어나 인근 야산으로 향한 황서연은 곧장 검을 빼 들고는 기감을 일으켰다.
초인의 경지에 오른 이후 더욱 날카롭게 벼린 그녀의 기운은 자연스럽게 조화를 일으키며 강인한 힘을 북돋는다.
아침의 상쾌한 기분을 여흥 삼아 온 힘을 쏟아내고 싶은 심정도 들었다.
“안 되지, 안 돼.”
황서연은 짧은 말로 스스로를 달랬다.
지금의 기분은 최상이다. 몸 상태도 그만큼 좋다. 내력이 움직여 주변과 동조되는 감각도 너무나 훌륭한 상태였다.
지금 정도의 몸 상태에서 그녀의 단짝과 마찬가지인 매영검을 휘두른다면, 당장 발을 딛고 있는 야산의 일부가 통째로 잘려나갈지도 모른다.
“나 하나 신나자고 다 때려 부술 수는 없잖아.”
적당히, 의외로 중요하다.
그녀도 얼마 전에야 확실히 깨닫게 된 사실이지만 절제란 것은 상당한 부분이 무공 수련에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때문에 황서연은 넘치는 기분과 힘을 가라앉히며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 움직임은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릿하여, 도저히 초인의 영역에 오른 무인다워 보이지 않았다. 또 한편으로는 사람이 저렇게까지 느리게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감탄을 자아내기도 했다.
고작 한 번의 찌르기.
그를 위해 일각에 가까운 시간을 소비한 황서연의 이마 위로 송글송글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다음은 횡 베기다.
이번에는 찌르기보다는 빨랐다.
물론 여전히 하품이 나오는 속도라는 것은 변치 않았지만 말이다.
이때쯤 황서연의 상의가 땀으로 흠뻑 젖었다.
마지막 종 베기.
반쯤 내려오던 검이 중간부터 급작스럽게 무너지듯 빠르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으아악-!”
동시에 비라도 맞은 듯 땀에 흠뻑 젖은 황서연이 비명을 내질렀다.
“망했어, 망했어. 오빠는 이것보다 세 배는 느리고 정확했다고!”
황준우가 보았다면 어이가 없어서 머리에 꿀밤을 놓았을지도 모를 말이다.
초인에 오른 지 얼마 안 된 황서연이 이만큼이나 느림의 영역을 파고들었다는 것은 사실 제법 놀라운 일이었으니 말이다.
따지자면 황서연 스스로도 본인의 성취가 결코 부족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말 그대로 어쩔 수 없는 답답함일 뿐이다.
“후우, 한 번 만 더 하고 들어가자.”
처음 찌르기부터, 다시 수련을 시작해 나가는 황서연의 눈에 의지가 불타올랐다.
초인의 영역에 오르기 전까지 황서연이 아는 무인의 세계란 성장할수록 더욱 가속화되는 것이었다. 한데 초인이 되고, 조화의 경지를 넘어서니 더 이상 가속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영문 모를 벽을 만났다. 황준우는 그 부분에 대해 이 느림의 세계가 정답이라고 말해주었다.
서로 검을 겨누고 상대와 싸우는 무공이란 빠를수록 유리하다. 물론 그 외의 여건도 많이 필요하지만, 느려지라는 황준우의 말은 처음에는 쉽게 이해가 안 되었다.
하나 막상 스스로 느림의 세계에 파고들며 황서연은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또한 어떠한 깊이를 가지고 있는지 깨달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알려줘도 모를 수 있지만 사실 천재인 그녀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어찌 됐든, 이 느림의 세계를 끝까지 가다 보면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
당연하게도 황서연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황준우였다.
그렇게 다짐했던 것보다 한 번 더, 총 세 번이나 둔공(鈍功)을 수련한 황서연이 지쳐서 제 자리에 쓰러졌다.
“하악…… 하악…… 이건 정말…… 너무 힘들어.”
앓는 소리를 낸 황서연은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기 위해 몇 번이고 큰 호흡을 마시고 내쉬기를 반복한 이후에야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유난히 상태가 좋은 아침이라 그런지 조금 더 무리를 했더니 팔다리가 다 후들거렸다.
“으으, 거의 한 시진 가까이 이러고 있었나. 우리 아저씨들 걱정할 텐데 빨리 돌아가야지…….”
마음은 그랬지만 무거워진 몸이 어디 쉽게 따르겠는가? 그래도 황서연은 최선의 노력을 다해 객점으로 빠르게 돌아왔고, 당황한 표정의 두 사람과 마주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경호 아저씨, 홍산 아저씨. 좋은 아침.”
어느덧 호칭이 통일된 두 사람의 표정에 안도와 분노가 동시에 스쳐 지나간다.
“대체 어딜 다녀오시는 겁니까!?”
“말이라도 하고 가시라니까요!?”
어느덧 참으로 닮아 있는 두 사람이었다.
객점으로 돌아온 이후, 목욕을 하고 진수성찬처럼 차려진 식탁 앞에 앉은 황서연은 아귀라도 들린 듯 끊임없이 음식을 먹어대기 시작했다.
옆에서 함께 식사를 하던 경호와 홍산은 말없이 고개를 내젓는다.
황준우의 명령에 의하여 그녀 옆에 호위로 달라붙은 이후로 매일을 보아온 모습이지만 도저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한결같이 잘 먹으니 어느 정도 질리는 면도 있었다.
그 체구가 어마어마하기라도 하면 모를까, 황서연의 체형은 뭐랄까, 비정상적으로 완벽했다. 음식이 건네는 지방은 흉부로만 모여들고 나머지 부위로는 일절 나누어지지 않은 느낌이랄까? 그렇다고 하여 완전히 말라 보기 싫은 정도는 아니게 또 살이 분배되어 있다. 무엇보다 얼굴 크기에 따른 비율마저 완벽했다.
매일 같이 그녀를 지켜봐 온 두 사람도 가끔씩 황서연이 제법 예쁜 편이라는 사실을 자각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이기적인 몸매를 자랑하는 것이다.
‘저렇게 먹어대면서 말이지.’
심지어 밤낮을 제멋대로 생활하는데 피부도 곱다.
누군가가 사기가 아니냐고 소리친다면, 경호는 고개를 주억일 터였다.
이 모든 것이 황준우가 황서연에게 가르친 무공의 특성이란 것을 잘 알고 있는 탓이다.
‘도련님이 만든 선자기공…… 무림의 여인들에게만 판매해도 만금장을 하나 더 세울 정도의 부(部)를 쌓을 수 있지 않을까?’
장담 정도가 아니라 확신을 할 수 있었다.
어쨌든 그렇게나 엄청난 식사를 쉴 새 없이 한 황서연이 마지막으로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상쾌한 얼굴로 소리쳤다.
“아! 잘 먹었습니다! 이제야 조금 힘이 나네!”
“힘이 안 나면 큰일이죠. 그렇게나 드셨는데요.”
“헤헤, 조금 많이 먹었나? 오늘은 제법 힘들어서 말이죠~”
황서연이 쑥스러운 듯 말하며 볼을 긁적인다.
물론 표정에는 조금도 그런 기색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매일 이렇게 드시지 않습니까.”
“대수롭지 않은 건 넘어가자고요.”
“정말 여러모로 도련님을 닮으신 것 아십니까?”
“오빠랑? 그거 칭찬이죠? 우후후.”
입을 양손으로 가리며 귀엽게 웃는 황서연을 본 경호는 졌다는 표정이 되어 고개를 주억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도련님과 다르게 굉장히 귀여우시다는 거죠.”
“칭찬 고마워요. 아저씨. 근데 우리 오빠도 잘생겼어.”
“큼, 그나저나 진짜 해적소탕, 하실 겁니까?”
말없이 식사를 끝마친 홍산이 황서연에게 물었다.
동시에 황서연의 눈빛이 변했다.
“당연하죠. 다들 봤잖아요. 마을 하나가 완전히 쑥대밭이 됐어요. 그 사람들 모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고. 힘없고, 모르는 것이 죄야? 해적들에게 약탈당하고 어디 분풀이도 못 할 만한 일이냐고?”
들떠 보였던 방금 전까지와는 완연히 다른, 차가운 목소리를 흘린 황서연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저씨들. 난 절대 그렇게 생각 안 해. 아니, 못해요. 물론 쉽지 않은 것 알아요. 오빠가 말해줬거든. 단순한 동정으로 시작했어도, 한 번 벌린 이상 끝을 봐야 한다고. 그래서, 끝을 보려고요.”
“음…….”
각오까지 느껴지는 황서연의 말에 두 사람이 고개를 주억였다.
아직 어린 그녀지만, 지난 여정에서 황서연이 보고 배운 것은 제법 많았다.
그중에는 어린 나이의 소녀가 견디기 힘든 일들도 수두룩했다.
예를 들자면 살인 같은 것이 있다.
사람과 싸워 상처 입힌 적은 있지만, 죽인 적은 단 한 번도 없던 그녀는 첫 살인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고 괴로워했다.
하지만 거기서 무너지지도 않았다.
무공을 배운 이상, 언젠가는 겪었을 일이다.
그렇게 말한 그녀는 경호와 홍산에게 가끔은 의지하고, 또는 투덜대며 그 고통을 이겨냈다. 덕분에 아직까지도 살인, 그리고 피를 보는 일을 꺼리는 모습이 있지만 적어도 스스로 행한 일을 괴로워하지는 않게 되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조차 수용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터였다.
무심해지든, 받아들이든.
어느 쪽이든 무인이라면 익숙해져야 할 무게고 책임이다.
이번 여정에서 황서연이 얻은 가장 큰 소득은 바로 그런 부분이었다.
당연히도 경호와 홍산은 그런 황서연을 굉장히 대견하게 여기고 있었다.
한데 이제는 한 발 더 앞서 나가 자신만의 협을 말하고 있다. 두 사람은 자연스레 그녀의 목소리에서 전해지는 의지에 가슴 한편이 더욱 든든해지는 감정을 느꼈다.
‘정말 훌륭하게도 자라시는구나.’
누구 말대로 씨, 그리고 피가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
단순히 무공의 재능을 제외하고서라도 황서연은 어디서나 언제나 빛나고 있는 듯했다.
“어쨌든 밥도 다 먹었으니 주변을 둘러보자고. 왠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오늘은 분명히 마주칠 수 있을 것 같거든.”
벌써 일주일째.
매일 같이 똑같은 황서연의 말이었지만 두 사람은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주억였다.
동해를 목전에 둔 절강, 강소 등을 비롯한 지역의 일부에는 본래부터 가끔씩 해적이 출몰하고는 했다. 하나 그 수가 적고, 군왕인 영왕의 방비가 워낙 훌륭하여 민초들이 큰 시름을 앓을 일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실상 대다수가 동영(東瀛)에 근거지를 둔 해적의 입장에서도 조금 거리가 있는 절강보다는 가까운 복건과 광동 지역의 약탈이 수월하니 그러한 사정은 크게 변하지 않을 듯했다.
문제는 얼마 전부터 주변 지역을 통치하는 영왕의 해군에 영문을 알 수 없는 사태로 허점이 생기는 데에서 발생했다. 갑작스러운 일이었고 워낙 조용히 일어난 사건이었기에 주변의 백성들조차 그 사실을 몰랐지만, 해적들은 눈치가 빠르고 영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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