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198화
제 198화
“우리 무림맹의 용두방주께서는 얼마 전 직접 남무림에 찾아가 지원 병력을 약조 받았습니다. 한데 천하가 시름에 잠긴 이때에 천자께서는…….”
“네 이노옴!”
호재익이 몸을 날려 표천의 어깨를 강하게 때렸다.
“어디서 망발을 지껄이는 게냐! 예가 어딘 줄 알고! 썩 나가거라!”
“하, 하나 장로님……!”
호재익의 불호령에 표천이 납득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외친다.
“네 정녕 물러서지 않겠다면 문파의 존장으로서 너를 벌할 것이다.”
“…….”
눈을 부릅뜬 호재익의 권고에 분한 표정으로 입을 닫은 표천이 막사 바깥으로 거칠게 나갔다.
그 방자한 행동에 운백을 비롯한 장내 모두의 얼굴에 싸늘함이 스쳐 지나갔다.
“죄송합니다. 본문의 실수로 제자가 방약무인하게 컸으니, 큰 벌을 주어 엄히 다스리겠습니다.”
방금 전, 표천의 행동으로 인해 종남은 무림맹과 황궁 양측의 원한을 살 뻔했다.
때문에 호재익이 직접 나섰고, 아슬아슬하게나마 사태가 커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다.
“괜찮습니다. 젊은 혈기에 누구나 실수할 수 있으니까요.”
마찬가지로 젊은 군부의 대표, 초호서가 웃으며 말한다.
“감사합니다! 과연 군부의 기재다운 넓은 도량이십니다.”
“과찬이십니다.”
호재익이 공수를 취하며 머리를 깊게 숙였고, 초호서는 손을 내저었다.
“큼큼, 본 맹주도 심심치 않은 사과를 표현하는 바이오.”
“너무 염두에 두시지 마시지요. 지금 우리는 이런 작은 소란에 흔들릴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맞는 말이다.
표천 덕분에 잠시 분위기가 흐려졌지만, 작금의 그들이 처한 위기에 비하자면 그야말로 작은 사건일 뿐이다.
“황궁에는 지속적으로 연락을 보내고 있습니다. 다만 아직 돌아오는 소식이 없을 뿐입니다. 최선을 다하고 있으나 결과를 보여드리지 못해 죄송할 따름입니다.”
“아닙니다. 천자께서도 나름의 고심이 있으신 거겠지요. 들으셨다시피 용두방주가 잘 해내어 다행일 따름입니다.”
분위기를 돌리기 위한 부드러운 말이 오간 이후, 운백의 시선이 다시 한 번 굳었다.
“어찌 됐든, 다소 불만이 있더라도 우리는 안타까운 결정을 해야만 합니다. 적이 우리보다 강하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니까요.”
다시 한 번 뱉어진 운백의 말은 기실 너무나 무거웠다.
초호서를 대표로 한 군인들은 어지간한 현령의 권위로는 움직이기 힘든 대인원이다. 황제의 윤허 없이 이만한 병력이 하나로 뭉쳐 움직인 것은 성도에 자리 잡은 각 성주들, 그리고 왕(王)의 윤허가 있었던 덕이다.
이번 천마신교의 사태를 주변에서 그만큼이나 무겁게 보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무림맹.
천하제일 무림 단체로 인정받는 무림맹은 그야말로 천하에서 내로라하는 무인들의 집합소였다. 오죽했으면 무림맹 내에서 우내십존의 이름을 건 무인만 세 사람이다.
최근 남무림에서는 우내십존이 옛말이다.
시대는 이미 흘러가고 있다라는 말이 나오고 있으며, 그를 무림 전체가 실질적으로 납득하고 있는 분위기라지만 어찌 되었든 우내십존 역시 한 시대를 풍미한 무림의 지배자들이다.
그런 그들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말했다시피 무림맹은 천하에서 실력을 자랑할 수 있는 무인들의 집합소다.
그중에는 이름을 알리지 않은 실력자도 여럿 존재했다. 혹은 명성보다 더 뛰어난 무공을 가진 이들도 있었다.
예를 들자면 권후 지명사태 같은 인물 말이다.
이런 무림맹의, 전쟁에 익숙한 다수의 군인들이 힘을 합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마신교 하나를 이기지 못하고 있다.
약하다고 인정해 버린다.
무인으로서, 군인으로서 자존심이 너무나 상하는 일이다.
심지어 그 말을 내뱉은 이가 무림맹주인 마당에야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젊은 표천이 다소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나선 것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거듭 말해, 저도 그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의미 없는 피는 불필요 합니다. 하나 의미 있는 피를 다소 흘려야 한다는 사실도 분명합니다.”
“음…….”
반짝이는 눈을 한 초호서의 말에 운백이 짧은 신음을 흘렸다.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서 물러나면 화산을 비롯하여 많은 백성들이 피해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최대한 멀리 달아날 수 있도록 시간 정도는 벌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화산…….”
운백이 고개를 주억였다.
현재 무림맹의 주력이 먼 섬서까지 나서 전쟁을 시작한 데에는 맹주의 사문인 화산을 지키자는 명목이 컸다. 이제 그 화산이 무너진다.
하나 화산의 모든 것을 잃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분명 시간을 벌어야 한다.
하나 일반적인 양민들에게까지 여유를 만들어주려면 대체 얼마나 버텨야 할까?
운백은 초호서가 자신의 말에 동의를 할 뿐 실제로 물러날 생각이 없다고까지 느꼈다.
그러한 시선을 느낀 듯, 다소 어색한 웃음을 보인 초호서가 말문을 열었다.
“알고 있습니다. 말씀하셨다시피, 우리가 적보다 약할진대 어찌 무작정 버티고자 하겠습니까. 그래도 되도록, 오랜 시간 해내 보자는 것이지요. 무림인의 마음은 잘 모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 군인은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존재합니다. 백성이 있어야 제국이 세워질 수 있으며, 군인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지키고자 하는 군인의 도리입니다.”
운백은 내심 쓴 신음을 삼켰다.
초호서의 이야기는 언뜻 어느 정도 융통성을 발휘하겠다는 말로 들리지만, 결국 백성이 있어야 무림 문파도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 중점이다.
결국 피해를 감수하고 싸우자는 뜻이다. 최대한 전력을 보존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운백으로서는 고개를 내젓고 싶은 일이다.
하나 그 생각을 바깥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얼마 전의 사건도 있고, 무림맹의 이름을 내걸고 싸우는 이상 그들은 초호서가 말한 도리를 저버릴 수 없는 것이다.
“알겠소. 내 도독첨사(都督僉事)의 말을 따르겠소.”
결국 운백은 고개를 주억일 수밖에 없었다.
늦은 밤, 검은 아지랑이가 천마신교의 군세를 파고든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고, 조용하게 흘러든 검은 아지랑이는 몇몇의 장소를 지나쳐 속삭이듯 누군가의 귀를 스치더니 이윽고, 음기가 강하게 느껴지는 천막 앞에 도달하여 인영의 형태를 이루었다.
내부에서는 여인과 사내의 뒤섞인 교성과, 비명이 동시에 울려 퍼지고 있다.
“으음, 들어오거라. 나의 마술사여.”
모습을 나타낸 인영, 장량이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 내부에서 옅은 신음이 섞인 동탁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그를 따라 막사의 장막을 거두고 그 내부로 들어선 장량은 주변의 살풍경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여인과 여인, 사내와 사내, 가릴 것 없이 살을 맞대고 춤을 추듯 어우러지며 서로의 생살을 씹고 쾌락에 찬 비명과 웃음을 흘린다. 거대한 동탁의 주위로는 이미 수많은 이들이 그의 전신을 덮어 마치 거대한 인육의 동산을 만든 것 같았다.
우적, 우적.
그런 인육의 동산을 포식하듯 마구잡이로 삼키는 마왕의 식탐은 그야말로 끝이 없는 듯했다.
실제로 끝이 나지도 않을 것이다.
마왕이 되어 강력한 힘을 얻은 그는 영원한 굶주림이라는 저주를 함께 얻었을 테니 말이다.
“흐…… 지배와 사리(死理)의 권능에 상응하는 대가라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일이지.”
장량의 시선을 읽었는지 인육의 동산을 마구잡이로 헤친 후,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이들을 한 손을 휘저어 다시 일으킨 동탁이 핏물과 인육의 파편이 가득 묻은 이빨을 훤히 보이며 웃음을 지었다.
꽤나 끔찍한 모습이었지만 장량은 처음 막사에 들어섰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애초부터 눈앞의 존재는 인간의 형상을 하였을 뿐, 마왕이다.
또한 장량이 걸어온 삶 역시 그에 못지않은 끔찍한 나날들이었다.
“마왕께서 내리신 명을 무사히 행하고 돌아왔습니다.”
차분한 시선으로 가볍게 절을 올린 후, 등 뒤에 천으로 감추어 두었던 거대한 방천화극을 풀어낸 장량의 눈이 빛났다.
“오오…… 그것은…… 건방진 양자 놈이 휘두르던 무기가 아닌가. 생각 외로다. 백문루에 이 귀한 것이 아직 남아 있었다니!”
“아닙니다. 백문루에는 이미 그의 흔적이 남지 않았습니다.”
“하면 어디서 구한 겐가?”
“주변을 조금 더 살펴보던 중, 운이 좋게 그의 후손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후손? 봉선의?”
동탁의 눈이 가늘어졌다.
“함께 데려오지 그랬나. 더 좋은 조건이 마련될 수 있었을 텐데.”
“끈질긴 자였습니다. 무리해서 쫓았다면 지금보다 더 늦은 걸음이 되었을 것입니다.”
“흐음 과연…… 호랑이 핏줄은 어디 가지 않는단 겐가.”
잠시 거대한 턱을 출렁이며 웃음을 보인 동탁이 고개를 주억였다.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이 정도 물건이면 상당히 귀한 것이다.”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혹시나 도움이 될까 싶어 보관하고 있던 물건 중 하나를 더 가져왔습니다.”
“오호라…… 마술사는 늘 본인에게 기대감을 가지게 해주는구나.”
“슬슬 도착할 때가 되었는데…….”
장량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막사의 입구로 또 다른 기척들이 다가섰다.
그를 따르는 또 다른 마술사들이다.
“들어오라.”
동탁의 말에 장량의 때와 마찬가지로 입구의 장막을 거두며 무수히 많은 못이 박힌 거대한 관을 든 네 마술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척, 척, 척.
마술사들은 느린 걸음으로, 끔찍한 풍경 사이를 무심히 걸어 나와 관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떨어지며 울리는 꽤나 묵직한 소리에 동탁의 눈에 깃든 호기심이 더욱 짙어졌다.
“관을 통째로 묵철로 만들다니, 참으로 귀한 물건을 보관하였나 보구나.”
“예. 최상은 아니나, 마왕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에 분명 도움이 될 물건이라 생각합니다. 관을 열어라.”
장량의 지시에, 말없이 고개를 주억인 마술사들이 각자의 금강저를 들고 주문을 외운다.
어딘지 모르게 섬뜩하게까지 느껴지는 괴상한 주문이 이어지자 관에 박혀 있던 못들이 하나둘씩 뽑혀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그리고 이윽고 모든 못이 뽑혀 나가며 관의 뚜껑이 옆으로 기울었다.
통 묵철로 만든 관 뚜껑답게, 마찬가지로 묵직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진다.
분노에 일그러진 표정으로 죽어 있는 사내를 바라본 동탁의 눈에 이채가 비쳤다.
“이 또한 훌륭하구나. 누구인지 물어도 되겠느냐?”
“본래 천마신교의 주인 되던 인물입니다.”
“호오…… 하면 천마라 불리던 인계에 속한 마의 종주(宗主)렷다?”
“맞습니다.”
장량의 대답에 죽은 천마, 용중호의 시신을 바라보는 동탁의 입가로 웃음이 흘렀다.
“클클클. 누가 장가의 자식이 아니랄까 봐 생각보다 황천의 지식을 많이 갖추고 있는 듯하구나. 과연. 이 정도면 다소 아쉬울 수 있으나, 내 못난 양자 놈의 무(武)를 충분히 이어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었도다.”
“만족하시니 다행입니다.”
“인계에서 이만한 자재(資材)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으니 말이다. 흘흘. 마술사여. 본인은 지금부터 의식에 들어가겠다. 이 외로도 필요한 것은 많다. 마침 이 장소는 그를 충족하기에 부족함이 없구나. 본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느냐?”
완전히 인계를 떠난 죽은 영혼을 불러오는 일이다.
심지어 그 대상이 삼국의 무신 여포다.
마왕의 권능을 통한다 한들 그 대가가 결코 작을 리가 없다. 장량이 팔각마서에서 마왕을 소환하기 위하여 십수 년에 가까운 시간을 허비한 것과 대등한 정도의 값어치가 필요하다.
다행히, 동탁의 말마따나 이 상황은 그를 충족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물론입니다. 맡겨만 주시지요.”
장량의 입가로 잔인한 웃음이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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