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193화
제 193화
장량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진 듯했다.
검은 모래는 긴장한 표정을 한 여선위의 옷자락에 묻어난다.
몸을 떤 여선위가 재빨리 옷자락을 떨쳤지만 이미 때는 뒤늦은 후였다.
흩날리는 옷자락 위를 감싸는 하얀 손에 힘 있게 잡힌 금강저가 가슴 한복판을 파고든다.
“음……?”
당황스러운 신음을 흘린 여선위의 입가로 붉은 혈선이 흘렀다.
동시에 그의 방천화극이 다시 한 번 크게 주변을 베었다.
스르륵-!
검은 모래가 되어 다시 한 번 허공으로 흩날린 후 거리를 벌린 장량이 웃음을 보였다.
“눈치도 빠르고, 제법 훌륭한 무인인 듯하지만 자만심이 많아. 그래서야 어찌 제대로 싸울 수 있겠나.”
“쿨럭!”
핏물을 한 움큼이나 쏟아낸 여선위가 자신의 가슴 한복판을 떨리는 손길로 쓸어내렸다.
의도한 것인지, 운이 좋았는지 심장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가슴 중앙이 크게 함몰되어 무너져내려 있다. 극한의 단련에, 내력으로까지 보호 받고 있는 그의 육체가 이토록 허무하게 무너질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무릎이 깊은 모래사장에 파묻히며 무너졌다.
고개를 숙인 여선위는 거친 숨을 내쉴 뿐 어떠한 말도 내뱉지 못했다.
“그러게 권주를 먼저 주었거늘. 쯧쯧. 그나저나 이 피…….”
차가운 검은빛으로 둘러싸인 금강저의 끝에 묻은 붉은 피를 혀끝으로 핥은 장량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과연, 봉선이 남긴 방천화극의 주인이 누군가 했더니 그의 후예였나.”
눈에서는 음습한 빛이 폭발할 듯 터져 나온다.
“어쩌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군. 이런 경우를 두고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후후.”
느긋한 걸음으로 숨을 헐떡이는 여선위 앞에 다가간 장량이 손을 내뻗는 순간이었다.
쐐에엑-!
여선위의 팔이 크게 휘둘러지며 방천화극이 장량의 머리를 꿰뚫고 허공을 날았다.
파스스-!
다시 한 번 검은 모래가 되어 그 공격을 피한 장량의 고개가 다급히 돌아갔다.
“이런……!”
힘차게 창공을 가른 방천화극이 바다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어떻게 찾은 물건인데, 이렇게 허망하게 놓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장량의 몸이 자연스럽게 바다 위로 향하려는 순간이었다.
“큭큭…….”
웃음을 흘린 여선위가 몸을 일으켜 주먹을 내뻗었다.
방천화극에 온 신경이 쓰여 있던 장량이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살기에 재빨리 몸을 흔들었다.
스르륵-!
검은 모래가 허공으로 흩날리고 또 한 번의 공격이 여선위의 다리에서부터 쏘아졌다.
‘안 돼, 늦는다.’
계속해서 회피만 해서는 방천화극을 놓치게 된다.
결국 장량은 살을 주는 선택을 했다.
“크윽!”
어깨 위로 무거운 다리를 받아 낸 장량이 팔 한쪽을 덜렁거리며 바다 위를 날았다.
“어딜!”
그 뒤를 지면을 강하게 박찬 여선위가 쫓아가며 손을 내뻗는다.
바로 뒤편에서 느껴지는 섬뜩한 기운에 고개를 돌린 장량은 붉은 눈의 여선위를 보고는 신음을 토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지독한!”
가슴 중앙이 함몰되어 엄청난 고통이 육체를 넘어 정신까지 좀먹고 있을 텐데도 여선위의 격렬한 움직임에는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
‘동귀어진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발목에 닿는 여선위의 손끝 감촉에 아랫입술을 깨문 장량의 시선이 떨어지는 방천화극을 향했다. 한 번 더 시간을 끌면 무조건 놓친다. 하나 발목이 잡혀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내내 고요하던 장량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스스슥-!
결국 장량의 몸이 다시 한 번 모래처럼 흩어졌다.
손을 휘둘러 허공을 훔친 여선위였으나 입가로는 만족스러운 웃음이 떠오른다.
떠오른 파도가 방천화극을 집어삼켰다.
“쉽게 네놈…… 뜻대로는 안 될 거다.”
핏물을 가득 머금은 채 미소를 지은 여선위의 몸 역시 바닷물을 향해 빠르게 추락했다.
모래에서, 본래의 형태로 돌아온 장량의 두 눈에도 핏줄기가 섰다.
“이놈! 보내 줄 줄 아느냐!”
금강저를 양손으로 움켜쥔 장량이 주문을 읊조리는 순간이었다.
마지막 힘을 짜내, 주먹을 내뻗은 여선위의 손끝에서 강기가 물결처럼 퍼져나가 장량에게로 다가간다. 한참 주문을 외우던 장량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아직까지도 이런 기력이 남아 있단 말인가……!’
결국 장량은 또 한 번 포기를 강요받았다.
마술사인 그의 육체로 강기를 온전히 받아 내는 것은 자살 행위와 다름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 짧은 틈새 여선위의 몸도 바닷속으로 집어 삼켜진다.
쏴아아-!
순간적으로, 꽤나 높은 파도가 단숨에 몰아쳐 여선위의 육체를 감추고 밀어내기까지 한다.
허공 위, 조금은 허망한 눈빛으로 바다 물결을 바라보던 장량의 입에서 한숨이 떨어졌다.
“더 늦기 전에 빨리 움직여야겠지.”
아쉬움이 담긴 시선은 여선위를 삼킨 파도를 잠시 지나쳐, 방천화극이 떨어진 물결 위를 향한다.
“팔자에도 없던 수영을 하게 생겼군.”
입가로는 쓴웃음이 떠오른다.
6. 무신(武神)
구파일방 중 하나였던 공동파에 이어 종남파마저 무너졌다. 무림맹 창설 이후, 이와 같은 큰 사건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전통과 역사, 그리고 그만한 힘을 갖추고 있던 구파 중 둘이 이렇게 짧은 시간에 무너지리라고는 누구도 생각 못 했던 일이다.
와중에 괴상한 소문이 감돌았다.
천마신교의 무인들은 죽어도 살아나서 다시 싸운다. 자연스럽게 가장 먼저 대두한 이야기는 강시에 관한 것이었다.
하나 이 이야기에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다. 천마신교의 무인들은 살아 있는 사람과 다를 바 없이 행동한다고 들었다.
일반적인 강시들 중, 그처럼 움직일 수 있는 종류는 없었다.
오로지 전설로 전해지는 활강시(活?尸)만이 그와 같은 일이 가능한데, 천마신교는 비록 마도(魔道)로 취급되나 강시술과는 거리가 먼 무문(武門)이었다.
한데 이제 와서 뜬금없이 전설 속의 강시를 재현해 내었다고? 가능성이 지극히 낮았다.
자연스럽게 무림맹 측에서 떠오른 의견은 천마신교가 세외의 다른 마문(魔門)과 손을 잡았다는 것이었다. 작금의 천마신교는 과거의 성세를 따를 수 없으니 그와 같은 선택을 할 수도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런 이야기에 분노한 것은 바로 화산파였다.
탁상공론(卓上空論)이다.
지금은 적의 정체를 파악하기보다 본격적으로 전력을 움직여야 할 때다.
종남이 무너지며 눈앞에 천마신교를 둔 화산파의 입장에서야 당연한 반응이었다.
비록 위태로운 상황을 겪었지만 천마신교의 등장으로 다시금 맹주의 권위를 움켜잡은 무림맹주, 매화검존은 화산파를 향해 빠르게 병력을 움직였다.
한편으로는 천마신교의 군세에 화산파가 무리하게 맞서기보다는 자존심을 굽히더라도 조금씩 물러나기를 종용했다.
본토를 잃는 뼈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을 테지만 화산의 문도들을 모두 잃는 것보다는 낫다.
다행히 화산파는 매화검존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화산으로부터 물러나는 길을 택했다.
이들과 무림맹의 병력이 합쳐지고, 천마신교와 마주치는 순간 무림대전(武林大戰)이 발발할 것이다.
북무림의 분위기는 점점 긴장된 과열로 달아올랐다.
반면, 남무림을 뜨겁게 달구던 작은 전쟁은 결론을 맺었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누군가는 기적이라고까지 칭하였다.
남기연합의 승리.
정확하게 말하자면 만금검존, 황준우의 독보적인 완승이었다.
남무림이 들썩였다.
그가 홀로 독존 당철을 비롯하여 귀창 진공오, 잠룡(潛龍) 서문제운을 압도하였을 때에도 놀라웠지만, 무존 서문지언마저 쓰러트릴 것이라고는 예상치 않았다.
심지어 본인들의 말로 증명하길, 압도적인 만금검존의 승리라 하였다.
남무림이 크게 들썩이며, 두 사람이 짜고 거짓을 말한다는 이야기까지 나돌았다.
그에 대한 황준우의 대답은 간단했다.
믿기지 않으면 언제든지 도전해라. 단, 목숨을 걸고 말이다.
그 도발적인 언사는 다소 과격했다.
말로만 떠드는 이들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하나 목숨을 걸고 도전하는 인물 또한 어디에도 없었다.
조금씩, 황준우를 부르는 이름이 바뀌어 갔다.
만금검존이 아니었다.
그는 정의회와의 비무전에서 단 한 번도 검을 뽑지 않았다고 하였다.
또한 그 무력은 감히 우내십존에 빗댈 바가 아니다.
무존, 서문지언을 제외하고라도 그가 이미 독존 당철을 압도하는 모습만은 모두가 보았지 않던가?
남무신(南武神).
별호가 바뀌었다.
이십 년도 더 전, 칠야무신 이후 누구도 사용하지 못했던 무신의 칭호가 황준우에게 돌아왔다.
또한 그의 주도 아래 남무림은 전체적인 통합을 선언했다.
이 와중에 반발한 것은 다름 아닌 당가였다.
그들은 황준우와 평생을 함께할 수 없는 척을 졌으며,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무림의 호사가들은 과연 당가의 기개라며 박수를 쳐주었다.
“기개는 무슨. 자만이지.”
감출 것 하나 없는, 거친 욕설로 작성된 당가의 서신을 받은 황준우는 코웃음을 쳤다.
정의회마저 통합한 작금 황준우는 무림군주라고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거대 세력의 지존이었다.
이 제법 복잡할 수도 있었던 과정이, 패배를 인정한 서문지언의 도움으로 어렵지 않게 이루어졌다. 복잡한 상황도 아니고, 빠르게 안정을 찾고 완전히 기반을 다진 때. 아무리 당가의 독이 대단하여도, 그들의 자존심이 드높다 한들 상대가 너무 나쁘다.
작금의 황준우는 마음먹는다면 직접 나서지 않고도 당가를 며칠 이내에 정리할 수 있었다.
이미 그 격차는 개미와 인간의 싸움이라 할 만큼 거대했다.
결국 그들은 저 혼자만이 아니라, 식솔들의 목숨마저 내걸고 자존심을 세우고 있는 셈이다.
황준우의 입장에서야 도저히 좋게 볼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당가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떨어진 서신 중 일부 내용을 곁눈질로 확인한 사마정이 붉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뜨겁지 않은 차가운 분노가 그의 눈에 어린 것이 보였다.
“너무 조급하게 할 필요 없어. 어차피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수준이니까. 적당한 수준에서 손 봐주라고. 진짜 모두 죽일 건 아니잖아? 우리가 천마신교도 아니고 말이야.”
“알겠습니다.”
사마정이 고개를 숙였다.
머릿속에는 당가를 어찌 처리할지 수많은 생각이 오가고 있었다.
“아, 그리고. 계속 뜸을 들여야 하나?”
황준우의 시선이 이번에는 전왕을 향했다.
그 역시 서신의 내용을 보며 불쾌한 시선을 보내던 중, 빠르게 고개를 들고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이후 천천히 고개를 내젓는다.
“아닙니다. 슬슬 만나봐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더 기다리게 하면 그쪽에서도 화가 나겠지요.”
“그렇겠지. 자그마치 개방 용두방주잖아?”
구파일방.
천하에서 가장 거대한 집단으로 취급받는 무림맹의 주축 중 하나인 일방의 수장이 찾아왔다.
황준우가 남무림의 왕이라 볼 수 있는 입장이 되었다 한들 무시할 존재는 아니었다.
하나 전왕은 곧장 그를 만나지 않아야 된다고 말했다.
지금이 바로 황준우가 남무림의 지존이 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황준우의 행동 하나, 하나가 앞으로 남무림 전체의 기준점이 될 것이다. 아무리 용두방주가 무시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는 하나, 급작스러운 방문에 곧장 마주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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