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191화
제 191화
모두가 탄성을 발하기도 전, 황준우의 신형이 또 한 번 움직였다.
“어딜!”
황보진휘가 깜짝 놀란 목소리로 도를 뽑아 들며 소리쳤다. 하나 정작 황준우가 모습을 드러낸 곳은 서문제운의 앞이었다.
파앗-! 꽝!
벼락이 번쩍이는 듯한 소리와 함께 권각(拳脚)이 어울렸다.
“오오……!”
처음으로 황준우의 일격이 막힌 것을 확인한 주변인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탄을 토했다.
“호부호자(虎符虎子)라……, 제법이네.”
빙긋 웃음을 보인 황준우의 주먹과 얼굴을 굳힌 서문제운의 다리가 연신 부딪친다.
그러기를 십여 초.
어딘지 모르게 종이 울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서문제운의 몸이 비틀거렸다.
틈새를 놓치지 않은 황준우는 어느덧 그 품으로 파고들어 지근거리에서 주먹을 내뻗는다.
“꺼어억-!”
폭음과 함께 핏물을 쏟은 서문제운의 신형이 허공으로 떠오른 후,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제법 재밌었어.”
가볍게 그런 서문제운을 스쳐 지난 황준우의 시선이 서문지언을 향했다.
“대단한걸. 부자(父子)가 모자람이 없으니 서문세가의 미래가 밝아 보여.”
“……만금장만 할까.”
칭찬에 잠시 당황한 것 같은 표정을 보였던 서문지언이 허탈한 웃음으로 말했다.
“뭐, 우리 아버지가 조금 복 받으신 편이지.”
어깨를 으쓱한 황준우의 신형이 또 한 번 움직였다.
“이번에야말로!”
황보진휘가 또 한 번 도를 휘둘렀으나 지나간 곳은 허공뿐이다.
“음…….”
입가로는 절로 쓴 신음이 흘렀다.
이번에야말로 제 차례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쓰러질 테지만 그래도 서문제운만큼 멋지게 지자고 생각하며 행운의 일격을 노렸던 황보천휘의 얼굴이 붉어졌다.
민망함이 그의 가슴에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그런 황보진휘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어느덧, 황준우와 서문지언은 지근거리에서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겉으로만 보자면 서문지언이 단연 압도적이었다.
칠 척에 가까운 거대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친 기세와 강렬한 시선은 어딘지 모르게 풀어진 듯 보이던 방금 전까지와는 전혀 상반된 느낌이다.
새삼스레 그가 검선과 함께 천하제일의 이름에 자주 뽑히는 무존, 서문지언이란 것이 확실히 느껴졌다. 그 명성과 강호 경험에 빗대어 생각해 본다면 아직 이립도 되지 않은 황준우는 애송이에 불과하다.
하나 좌중에 자리 잡은 구경꾼들 대다수가, 머리로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가슴 한편에는 기대감을 품었다.
당철과의 일전에서도 볼 수 있듯, 황준우의 무력은 단연코 같은 우내십존 중에서도 압도적이었다.
서문지언 역시 만만치는 않지만, 어쩌면 새로운 역사가 쓰일지도 모른다.
만약 여기서 황준우가 서문지언마저 쓰러트리면 그야말로 강호의 척도가 모두 뒤집히는 것이다.
누군가는 벌써부터 그때가 되면, 더 이상 우내십존이라는 이름은 무의미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동안 누구도 불리지 않았던 이름, 천하제일의 무신이 돌아올 테니 말이다.
짧은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은 아무런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과연…… 두 사람의 무공이 막상막하(莫上莫下)인 것인가. 어느 한쪽이 쉽사리 움직이지를 못하는구나.”
황보진휘가 긴장된 표정으로 혼잣말을 흘렸다.
고수들 간의 대전에서 침묵이란 결코 의미가 없지 않다. 선공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서로의 빈틈을 찾으며, 기세를 끌어올리는 과정인 것이다.
때문에 서로의 실력이 비슷할수록 이 시간은 지루할 정도로 길어지기도 한다. 며칠 밤낮을 노려만 보고 있다는 고수의 싸움은 농담이 아닌 것이다.
“누가 먼저 움직일까?”
“아무래도 기세가 밀리는 측이겠지.”
지켜보고 있던 중년의 무인이 의문을 표했고, 황보진휘가 고개를 돌려 짧은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그리고, 공기가 폭발하듯 터져나갔다.
두 사람의 양다리가 허공에서 격렬하게 맞부딪친 순간, 대기 중에 거대한 기운이 폭발하듯 쏟아져 나오고 빛이 번쩍였다.
재빨리 고개를 돌린 황보진휘가 팔짱을 끼고는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만금검존이 먼저 움직였군!”
“헛소리하고 있군. 무존이 먼저 움직였다.”
황보진휘의 곁으로 하나의 기척이 내려앉으며 혀를 찼다.
겉모습은 오 척도 되지 않는 작은 소년이다.
몰골은 꾀죄죄하고 옷도 해져 보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하나 황보진휘는 감히 그를 얕보지 못했다.
“어째서 당신이 이 자리에……?”
허리춤에 꽉 조인 아홉 겹의 매듭과 끝부분이 바닥에 맞닿은 두터운 나무 몽둥이까지, 누군가가 흉내 내고자 하면 얼마든지 겉모습을 똑같이 꾸밀 수 있을 것 같은 행태를 한 이 소동(小童)이 개방의 용두방주(龍頭幇主)인 탓이다.
백만 개방 방도의 정점!
걸왕(乞王), 여상욱이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겉모습은 영락없는 어린아이지만 속내는 서문지언과 같은 동년배의 노괴(老怪)인 그는 황보진휘의 상식으로 이 자리에 있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현재의 무림맹은 천마신교의 갑작스러운 침공으로 혼이 나간 상태일 터니 말이다.
“아무리 정신이 없다 하여도 천하의 무존이 오랜만에 무공을 쓴다는데 보러 오지 않을 도리가 있겠더냐.”
여상욱이 코웃음을 치며 말한다.
물론 황보진휘는 그 말이 진심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작금의 무림맹 상황에서, 다른 사람의 무공을 보고자 용두방주쯤 되는 인물이 합비까지 내려온다고? 말도 안 된다.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했다.
황보진휘는 눈치껏 그 생각을 읽고자 했지만 여상욱의 표정에서는 무엇도 읽을 수 없었다.
“과연, 만금검존…… 소문보다 훨씬 더 대단하구나.”
감추지 않는 감정이라고는 눈에서 연신 번뜩이는 이채뿐이다.
실제로 점점 더 격렬해지고 있는 두 사람의 싸움은 언뜻 보기에도 황준우가 우세해 보였다.
서문지언의 표정에 어린 다급함과 황준우의 여유로운 동작은 벌써 두 사람의 승패를 갈라놓은 듯도 보였다.
“일부러 밀리는 척하시는 것 아니겠소? 틈을 만들기 위해…….”
황보진휘의 말에, 혀를 찬 여상욱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나 그를 한심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이 거지 녀석을 당장 때려잡을 수도 없고…….’
속에서는 욕지기가 올라오고 얼굴이 붉어졌지만 차마 입 바깥으로 감정을 토해 내지는 못했다.
실제 무공도, 강호 배분도 여상욱이 그보다 훨씬 윗줄이었으니 말이다.
그 순간 또 한 번 폭음이 일고 거대한 기파가 주변으로 번져 나갔다.
“우악-!”
황보진휘는 비명을 내지르며 볼썽사납게 바닥을 굴렀다.
기파에서부터 전해진 반동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끙…… 이제 두 사람 다 본격적으로 할 셈인가.”
마찬가지로 기파에 밀려 인상을 찌푸린 여상욱이 오묘한 눈으로 황준우와 서문지언을 바라보고는 등을 돌렸다.
“네놈도 헛된 자존심 세우지 말고 어서 달아나라. 휩쓸렸다가는 분명히 죽는다.”
살벌한 경고를 남긴 여상욱의 신형이 다시 사라졌다.
잠시, 그가 남아 있던 자리를 바라보던 황보진휘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한다.
“아니, 헛소리나 하다가 겁먹어서 금방 도망갈 거면 왜 나타난 거야…… 우악!”
또 한 번 기파가 터져 나왔고 이번에야말로 바닥을 몇 번이나 굴러 나무 등치에 머리를 부딪친 황보진휘가 벌떡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진짜 죽겠다!’
여상욱의 경고는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의도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강한 기파를 몇 번이고 터트린 후, 사람들이 물러나는 것을 확인한 황준우가 살짝 거리를 벌렸다.
짧은 격전이었지만 서문지언의 솜씨는 확실히 알았다.
아마 서문지언도 느꼈을 것이다.
황준우의 무공이 그를 압도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역시…… 검선을 죽인 건 그대였군.”
뜬금없는 말에 황준우의 눈이 황당하게 변했다.
“얼마 전, 검선이 무당을 벗어나 어딘가로 향했다. 죽은 줄 알았던 영감이 살아 있으니 기쁜 마음으로 그를 쫓았다. 벽을 넘은 이후 적수가 없었으나, 검신이라면 다를 것이라 믿었으니 말이다.”
검선, 위자청의 출타는 하오문도 모르던 사실이다.
아마 무림맹에서도 알고 있는 인물이 몇 없을 터였다.
하나 서문지언은 눈치챘다.
서문세가 내에 따로 정보단체를 운용하고 있음은 물론, 그만큼이나 검선의 움직임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는 말이다.
‘어쩌면 무림맹 측과 닿은 연을 이용했을 수도 있고 말이지.’
황준우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서문지언의 눈에는 더욱 확신이 깃들었다.
“검선은 소주를 향했고, 그곳에서 누군가와 싸웠다. 흔적을 쫓아 봤으나 이미 뒤늦은 후더군. 흔적을 봤다. 검선이 남긴 마지막 검의(劍意)…….”
“아, 오해받는 건 싫어해서 말이야. 미리 말해서 그 양반 내가 죽인 것은 아니야. 아니, 죽였나?”
“……헛소리를 하는군.”
아련하던 서문지언의 눈에 황당함이 깃들었다.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소리 아닌가?
“아니, 그냥 나랑 싸우다가 혼자 깨달음을 얻고는 우화등선했다니까?”
“검선이 우화등선?”
“진짜야. 이거 내가 어떻게 보여 줄 수도 없고…….”
“아니, 아니. 믿을 수 있다. 검선이라면…… 그가 마지막에 남긴 검의라면…….”
서문지언의 눈이 다시 아련해졌다.
아마 위자청이 남긴 마지막 검의를 떠올리는 것일 터였다. 작금의 무존 서문지언은 조율에 입문하였을 정도다.
천하에 적수를 찾기 힘들 정도로 강하나, 우화등선의 깨달음이 담긴 검의를 뛰어넘는 방법을 찾지는 못했다. 그 사실이 서문지언의 마음 한편 어딘가를 묶어두고 있을 것이다.
“미리 말하지만 나도 나름대로 성의는 표현했다고. 죽은 건 아니지만 무덤도 만들어 주고…….”
“아, 그러고 보니 비석 하나가 부서져 있었지.”
“뭐? 부서져?”
이번에는 황준우의 눈에 황당함이 깃들었다.
“자연지기를 이용해 만든 비석이 부서졌다고?”
말도 안 된다.
최소 조율의 고수가 의도적으로 공격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무덤은?”
“그런 것은 애초에 없었다. 과연…… 누가 했는지 짐작이 가는군.”
서문지언의 입가로 쓴웃음이 떠올랐다.
“천인공노할 짓이로다. 제정신이 아닌 녀석인 건 알았지만 설마 제 스승의 무덤에까지…….”
“설마 진무영. 그놈이 벌인 짓인가?”
서문지언의 말에서 정황을 유추한 황준우의 눈에서도 쌍심지가 솟았다.
“진무영을 아는가?”
“제법 잘 알지.”
“나도 상황이 이해가 되는군. 조용히 잠적하던 검선이 왜 무당산을 벗어났나 했더니…… 그놈의 꾐이었어.”
“결국 난 그 장단에 맞춰 춤을 춰준 거고 말이지?”
두 사람의 눈에 동시에 불쾌함이 떠올랐다.
그 대상은 명확했다.
“다음에 만나면 확실히 죽여버려야겠어.”
“나도 용서하고 싶지는 않군.”
잠시, 뜻을 맞춘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미소 짓는다.
어딘지 모르게 닮은 듯, 또 다른 사내의 웃음이다.
“하나의 뜻이 맞았다지만, 역시 포기할 수는 없지?”
황준우의 물음에 서문지언이 고개를 주억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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