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190화
제 190화
북무림이 전란(戰亂)에 휩싸인 사이 남무림 역시 화합이라는 명목하에 전쟁을 시작했다.
마치 전국시대(戰國時代)를 보는 것 같은 어지러운 무림의 상황에 일반적인 백성들의 걱정은 늘었지만, 무인들의 피는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검이란 것은 쓸데가 많은 것 같으면서도, 하등 쓸모가 없어 놀릴 때가 많다.
올곧은 심성을 가진 무인은 천하에서 가장 밥 곪기 좋은 직업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전란의 시대는 다르다. 어느 때보다도 검을 필요로 하는 시기인 만큼 무인들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는 것이다.
자연스레 무인들의 시선은 남무림을 누가 통합할 것이며, 이후 어떤 활동을 이어나갈지, 그리고 북무림과 천마신교의 전쟁이 어떠한 방향으로 향할 것인지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벌써 삼국시대에 빗대어 무림삼파시대(武林三派時代)를 예언하더군요.”
남궁세가가 준비한 비무장.
아니, 실상 합비 외곽의 숲길 일부를 밀어 넓은 공터를 만든 것뿐인 장소에 선 전왕이 황준우에게 말했다.
“이제야 삼국시대?”
황준우의 질문은 의미는 간단했다.
천마신교가 끼어들기 전, 무림맹과 남기연합, 정의회 역시 삼강체제였으니 말이다.
“시대가 달랐던 거지. 지금과 같은 때는 난세(亂世)를 더 떠올리기 쉽게 만들지 않는가?”
답은 전왕이 아닌 건너편에서 모습을 드러낸 서문지언에게서 돌아왔다. 함께 도착한 네 사람은 각기 다른 표정으로 황준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심하거나, 분노하거나, 경계하거나. 하나 누구도 쉽게 경거망동하지는 않는다. 이 자리가 가진 무게를 모두가 잘 아는 탓이다.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네.”
“…….”
황준우의 말에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은 서문지언의 고집스러운 시선이 주변을 느리게 훑는다.
“그래도 모인 사람은 제법 많군.”
넓은 공터 주변으로 모습이 보일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사람은 몇 없었다.
하나 실질적으로 먼 거리에서 내력을 이용하여 공터를 지켜보고 있는 시선은 상당히 많았다. 가까이 다가와서까지 지켜보는 이들은 두 가지 경우에 속했다.
이 거리에서밖에 볼 수 없는 하수(下手)들과, 초인들의 격전 속에서도 제 한 몸은 지킬 수 있는 진짜 고수들!
양측 모두 어떠한 상황에서 목숨을 잃더라도 감내하겠다는 입장만은 분명했다.
“굳이 구경꾼은 오지 말라고 할 필요도 없었으니까.”
“좋다. 관객이 있어야 증명도 편히 할 수 있겠지.”
서문지언은 나지막이 말한 후, 황준우를 직시했다.
“그대가 만금검존인가?”
“딱히 마음에 드는 별호는 아니지만, 맞아.”
“자신감이 넘치는군.”
“그런 소리 많이 들어.”
황준우와 서문지언의 시선이 짧은 시간 묵묵히 오간다.
그사이 황준우의 표정에 짧게나마 미묘한 변화가 스쳐 지나갔다.
“너…….”
“나머지 녀석들은 어디에 있지? 얼마나 기다려야 되는 거냐?”
짧은 고민이 지나고 입을 여는 순간, 참지 못한 당철이 말문을 가로막는다.
“뭘 기다려? 시작하고 싶으면 곧장 해도 되는데?”
황준우가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잘됐구나. 나머지 녀석들이 오기 전에 네놈부터 찢어발겨 주마. 이후 개새끼들의 먹이로 던져 잘근잘근 으깨 네 아비와 어미의 밥상에 올려주마. 흐흐, 그 표정이 어떨지 벌써부터 궁금하구나.”
당철이 짙은 검미를 꿈틀댄 후 음흉한 웃음과 함께 앞으로 나섰다.
서문지언은 팔짱을 끼며 한 걸음 물러난다.
이후 짧은 침묵이 흘렀다.
“뭐하는 것이냐? 나서지 않고? 혹시 자라 새끼처럼 겁을 먹은 게냐?”
당철이 황준우에게 비웃음을 날렸다.
“응? 무슨 혀가 그렇게 길어? 독존이 아니라 독설(毒舌) 정도밖에 안 되나 봐? 싸우고 싶으면 그냥 덤벼.”
돌아온 것은 모욕이다.
얼굴이 곧 터질 활화산처럼 붉게 달아오른 당철은 손가락을 움찔거리며 힘겹게 입술 끝을 들어 올렸다.
“마지막 기회다. 검을 뽑아라, 애송이.”
“검? 이거면 충분할 것 같은데?”
황준우가 양손에 착용한 권갑을 보인 순간이었다.
“캬앗-!”
기합을 내지른 당철의 신형이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가며 길게 늘어졌다.
양손에서는 언제 뽑았는지 모를 암기 열 자루가 허공으로 흩날렸다.
카가가강.
가벼운 손동작으로 열 개의 암기를 동시에 허공으로 튕겨낸 황준우의 입가로 더욱 짙은 웃음이 그려졌다.
“양손 다 쓸 필요도 없을 정도로 허접하군.”
명백한 격장지계였고, 당철도 그 사실을 알았다.
“어디 뜻대로 한번 지껄여 보거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발하는 감정을 억누르지 않은 당철의 손이 춤을 추듯 움직인다.
그러자 놀랍게도 황준우의 손길이 튕겨냈던 암기들이 허공을 선회하여 황준우의 목을 노리며 벌처럼 날아들었다.
제법 아슬아슬한 순간 등을 돌려 막아내며, 정면의 당철을 향해 일장을 내지른 황준우의 눈에 흥미가 생겼다.
“연사(練絲)?”
첫 기습이 무력하게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표정의 당철이 콧방귀를 꼈다.
그 순간 황준우는 코끝에 느껴지는 저릿한 향에 잠시 머리가 아찔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약간이지만 내력의 운용에도 흐트러짐이 생기는 듯했다.
‘과연 독왕. 언제 독을 풀었는지도 모르겠네.’
게다가 효과도 엄청나다.
만독불침의 경지에 가까운 황준우를 이만큼이나 위협할 수 있는 독은 천하에 있어 몇 없다.
만약 황준우가 순수하게 하단전의 내력만 사용하는 무인이었다면 다음 공격에 큰 낭패를 봤을지도 모른다.
짧은 시간.
쉬이익-!
벌처럼 날아오른 열 개의 비수가 다시금 쏘아졌다.
약간은 흐릿한 시야 너머로 그 모습을 확인한 황준우는 눈을 감았다.
‘보이지 않는다 하여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지.’
마치 태극을 그리듯 원을 만든 황준우의 양손과 열 개의 비수가 또 한 번 허공에서 부딪쳤다.
카가강-!
하나 이번에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뻗어 나간 황준우의 손이 당철의 손끝에 연결된 연사를 움켜쥐고 잡아당긴다.
“……!”
놀란 당철이 재빨리 연사를 끊어내려 했지만 황준우의 동작이 훨씬 더 빨랐다.
“크악-!”
비명을 내지른 당철이 하늘을 날았고, 동시에 눈을 뜬 황준우가 허공으로 비상해 그의 목덜미를 빠르게 낚아챘다.
“눈 한 번 감았다 뜨니 잘 보이네.”
독존 당철의 목덜미를 한 손으로 강하게 쥔 채 지면에 내려선 황준우가 웃으며 말했다.
“꺼걱…… 꺽!”
붉어진 얼굴로 눈에 핏발을 세운 당철이 괴로움에 신음을 토하면서도 온몸으로 독을 내뿜었다.
“아쉽게도 한 번쯤 겪어보면 잘 통하지 않아서 말이야. 내 몸이 조금 면역성이 좋아.”
황준우는 가볍게 말하며, 높게 팔을 들어 올렸다.
이후 당철의 몸을 바닥에 크게 내팽개쳤다.
지면이 깊게 패이고 그 중심에 내다 꽂힌 당철이 피를 토했다.
“꺼어억-!”
눈은 허옇게 뒤집혔다.
의식이 완전히 날아간 순간.
황준우는 망설임 없이 몇 번이고 당철의 신형을 바닥에 내다 꽂았다.
쾅! 쾅! 쾅!
모두가 말문을 잃은 채 그 모습을 지켜봤다.
너무나 압도적이고, 강하다.
천하의 독존이 백 초는커녕 십 초도 제대로 버티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다.
그렇게, 먼지 구름이 피어날 정도로 사람을 내던지고 줍기를 반복하던 황준우의 손길이 멈추었다.
“그, 그만! 죽일 셈이오!?”
당황한 표정의 황보진휘가 다급하게 외쳤다.
황준우는 잠시 그를 바라보았고, 말없이 당철의 몸을 또 한 번 내던졌다.
땅이 더욱 깊게 패이며, 뼈가 아작나는 소리가 들렸다.
당철의 몸은 시위를 팽팽하게 당긴 활보다 더 깊게 휘어져 기이한 모양으로 굳어진 후, 바닥으로 내려앉는다.
“당연히 죽일 생각이지. 이놈은 나를 위협하고,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마저 모욕했다. 살길 바라면 욕심이지 않나?”
싸늘하게, 죽은 당철의 시체를 발로 차서 치운 황준우가 정면을 바라보았다.
“미리 경고하는데 난 성격이 그렇게 좋지 않아. 굳이 죽일 필요가 없지만, 또 안 죽일 이유도 없으니까. 눈 돌아가면 내 멋대로 하겠다는 뜻이지.”
또 한 번 침묵이 흘렀다.
하나 이전 당철이 나섰을 때와는 공기 자체가 달랐다.
무겁고 서늘하다.
설마하니 독존 당철이 이렇게 쉽게 당할 것이라 생각지 못한 데다, 갑작스럽게 흉포해진 황준우의 기세는 어지간한 고수들의 가슴마저 짓누를 정도였다.
가족의 일에 예민하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감히 그를 이용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위협이 육체를 넘어 심령까지 제압하는 탓이다.
“대체 얼마나 강한 거지?”
어느덧 저도 모르게 팔짱을 풀고 있던 서문지언이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의문이었지만, 질문이라기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회의가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적어도 여기 있는 녀석들 모두를 합친 것보다는 강하겠지. 아, 참고로 내 뒤에 사람은 안 와. 원래부터 혼자였거든.”
독존 당철이 죽기 전에 이 말을 들었다면, 아마 더욱 격분하며 달려들었을 것이다. 이 자리에 모인 대다수가 코웃음을 쳤겠지. 하나 작금의 상황은 달랐다.
황준우는 강하다.
같은 우내십존 중에서도 압도적이다.
만금검존이라는 별호에, 아주 가끔이지만 무신이라는 호칭이 곁들여지던 소문은 과언이 아니었다.
“나는…… 이길 수 없소. 하지만 가주에게 빚이 있으니 이 한목숨 다하더라도 최선을 다해보겠소.”
본래 당철 이후, 두 번째로 나서게 되어 있던 진공오가 등 뒤에 메고 있던 창을 풀어헤치며 말했다.
입가로 나오는 깊은 한숨에는 죽음의 각오가 엇비쳤다.
“음…….”
황보진휘는 그를 말리지 못하고 짧은 신음을 흘렸다.
‘이 자리에서 저 괴물을 막을 수 있는 건 서문가주뿐이다. 그렇다면 최대한 힘을 빼놓아야 되겠지. 귀창의 명성이 아깝지만 지금은 버리는 패다.’
황보진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어린 만금검존은 소문 이상의 실력자이며, 우내십존 중에서도 수위를 다툴 괴물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그렇다면 어이없게도 패배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당연히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정의회의 입장에서도, 황보세가의 가주로서도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이 힘겨운 상황을 쓴 신음으로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귀창, 진공오. 별호랑 달리 제법 협의도가 있다지?”
“과한 칭찬이오.”
진공오가 쓴웃음을 지으며 창을 겨누었다.
“당신 같은 사람은 좋아해.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 다만……, 오래 끌 생각은 없어. 여기서 그나마 어울릴 만한 건 저 영감밖에 없어 보여서 말이야.”
동시에 황준우의 신형이 사라졌고, 놀란 진공오가 창을 등 뒤로 휘둘렀다.
창이 지나간 자리 위로 나타났던 황준우의 모습이 반으로 갈라지며 흩어진다.
“이형환위!”
“맞아.”
이번에는 앞이다.
진공오는 빠르게 반응하였다 생각했다.
때문에 목덜미에 갑작스럽게 전해지는 충격에 의문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정의회의 두 번째 초인, 의문을 남긴 채 진공오가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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