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189화
제 189화
“서신에 적힌 내용 그대로 읊었을 뿐이지. 그리고 불쾌하지만 농락이랄 것도 없지. 사실 틀린 말도 아니지 않은가? 지금 우리가 어디 비빌 언덕이라도 있나?”
서문지언의 입가로 냉소가 스쳐 지나갔다.
“사실 누구 탓할 필요도 없네. 각자 가문의 일을 핑계로 정의회 운영은 나 몰라라 하고 있었지 않나? 활협단이 있을 때야 아무렴 상관없었다지만, 그 이후에는 바뀌었어야 옳았었지. 엉덩이가 무거워도 너무 무거웠어. 결국 이 꼴이 된 건 우리 모두의 탓이란 말이야.”
“그래서 선배는 놈들의 말대로 비무를 하자는 거요?”
황보진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남기연합이 그들에게 건넨 서신에는, 마지막 기회라는 말과 함께 모든 것을 건 비무를 펼치자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기실 정의회의 입장에서는 기가 찰 일이었다.
현재 정황이 꼬여 세력에서는 불리하다지만, 고수의 수는 엄연히 정의회가 많다. 남기연합에 숨겨둔 수가 있다고 한들 이 결과는 다르지 않다.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는 감춘 바가 많은 것은 정의회 역시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자존심이 상했고, 농락이라 여겼다.
유리한 입장의 남기연합이 굳이 그런 제안을 할 정도로 정의회가 우습게 보였다는 뜻이니 말이다.
“나는 동의한다. 놈들의 뜻에 따르는 건 내키지 않지만, 쓴맛을 제대로 보여줄 수는 있겠지.”
당철은 두 눈에 열기를 가득 담은 채 말했다.
상황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 결과를 흡족하게 만들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선배는 어쩔 생각이시오?”
황보진휘는 서문지언의 눈치를 보았다.
호전적인 모습의 당철과 다르게 서문지언은 어딘지 모르게 계속해서 침착한 모습을 보였다. 어쩐지 이 비무를 피하고 싶다는 느낌마저 보일 정도였다.
“어쩌겠나. 말했듯 비빌 언덕이 없는데, 해 봐야지.”
하나 돌아온 답은 긍정이었다.
당철과 서문지언 두 사람이 승낙했으니 이미 이 비무는 승낙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어딘지 모르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라는 느낌이 보였지만, 황보진휘는 애써 그를 외면했다.
‘자그마치 무존 선배 아니신가?’
현 강호에서, 호사가들이 제일 강한 무인을 뽑을 때 검선과 함께 가장 자주 거론하는 이름이 바로 서문지언이다.
남기연합에서 대표로 나올 수 있는 이들을 여러 상황에서 가정해보았지만 무존의 이름을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이는 없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기껏해야 위휘봉선 정도일까…….’
승기는 확실하다.
황보진휘는 애써 치밀어 오르는 걱정을 접었다.
정의회의 승낙 답변이 돌아왔고, 일자는 빠르게 잡혔다. 이 역시 예정되었던 결과였다. 남기연합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나름대로 자신감도 있을 터였다.
“전력비무(全力比武), 그것도 연승제(連勝制)라…….”
처음 전왕의 꿍꿍이를 전해 들었을 때 헛웃음 지었던 황준우는, 일이 뜻대로 풀려가는 모습을 보며 또 한 번 비슷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제대로 물었군.”
언뜻 보자면 남기연합이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아직 두 세력 간에는 고수의 질과 수가 제법 차이가 나는 면이 있으니 말이다.
오랜 시간 압박을 주며 명분으로 제압하는 편이 더 안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확률이 높은 상황인 것은 분명했으니 말이다.
하나 이는 분명 정의회의 입장에서 함정에 빠져든 것이었다.
남기연합에는 어쨌거나, 황준우가 있었으니 말이다.
전왕의 꾀는 애초부터 황준우를 믿는 데에서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남은 것은 무혈입성(無血入城)뿐입니다. 주공.”
“그것 참, 기분 좋은 말이긴 한데. 만약에라도 내가 지면 어떻게 하려 그래?”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멀뚱멀뚱한 두 눈을 한 전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 눈에는 한 치의 의심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황준우도 스스로의 승리를 의심한 적 없지만, 전왕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과하게도 느껴질 정도였다.
“음…… 뭐, 저쪽에서 오기로 했으니 나는 느긋하게 기다리면 되겠지. 그나저나 처음 듣는 이름도 몇 있네.”
황준우는 정의회 측에서 보낸 참가자 명단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존 서문지언 혹은 독존 당철, 그리고 서문세가의 대공자라는 서문제운의 이름은 익숙하다.
앞선 두 사람은 전생에서 황준우와 직접 맞부딪친 적이 있던 고수들이다.
특히 서문지언은 당시에도 우내십존 중 일인에 속하며, 우습게 볼 수 없던 강자였다.
독존 당철은 당시에는 우내십존에 속하지 못했으나, 그 재능이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 오히려 지금 이 자리에 있지 않았다면 이상한 일일 터였다.
그리고 서문세가의 대공자 서문제운.
대공자라지만 결코 나이가 어리지 않다.
벌써 그의 나이가 불혹(不惑)이며 자식만 둘이라고 하니, 일반적인 가문이었으면 벌써 가주의 직위를 꿰찼을 인물이다.
무공 실력도 대외적으로 서문지언 다음가는 서문세가의 이인자로, 초인의 경지다.
대체적으로 강자의 이름은 잘 기억하는 황준우였기에 세 사람은 명확히 떠올랐다.
처음 보는 이름은 나머지 둘이었다.
“황보진휘는 황보세가의 가주입니다.”
전왕이 조금 당황한 듯 황보진휘에 대해 밝혔다.
“아, 이 양반이? 그런데 황보세가가 오대세가에는 어떻게 끼인 거야?”
그러고 보니 전생의 기억에서도 황보세가의 인물 중 기억에 남는 이가 없었다.
따지자면 오대세가라는 명성이 아까울 수준일지도 몰랐다.
“황보세가는 지금은 형산에 자리 잡고 있지만 본래는 산동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주변으로 구파일방의 영향력이 강하니, 어깨를 펼 수 없던 처지였지요. 정의회에 속한 이후는 조금 나아졌습니다만. 아직 기지개를 피지는 못한 수준이지요.”
“그래도 황보세가의 대표라서 이 자리에 나섰다는 건가.”
“아마 본인이 직접 나설 경우는 생각지 않고 있을 듯합니다.”
황준우는 고개를 주억였다.
애초부터 이기는 사람이 계속해서 싸워나갈 수 있는 연승제다. 무공이 꽤나 부족한 황보진휘가 직접 나설 이유가 없었다.
어찌 되었든 황보세가의 가주로서, 명목을 챙기기 위해 자리에 나섰으나 남기연합 측에 패배해서 좋을 것은 없다.
그저 자리나 채우다가, 함께 승리하고 돌아왔다고 소리치는 것이 황보세가가 원하는 최상의 장면일 터였다.
“하면 이 양반은? 아무리 봐도 삼대세가 사람이 아닌데?”
“아, 귀창(鬼槍), 진공오 대협 말씀이시군요.”
전왕의 눈이 반짝 빛났다.
“황보, 서문, 당씨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데?”
“음…… 진공오 대협은 황보세가의 빈객(賓客)입니다. 십 년 전까지만 하여도 남기 일대의 제일 가는 협의도(俠義道)로 불렸던 무인이시지요.”
“뭐, 제법 사람 좋은 양반이라는 거네. 실력도 보통은 아닐 테고 말이지.”
“십 년 전에는 우내십존에 가장 가까운 이름 중 하나로 많이 뽑혔었습니다. 황보세가의 빈객으로 들어간 이후로는 강호 활동이 몇 없어 없어진 이야기지만 말이지요.”
“그렇구먼. 근데 아무리 사람 좋다고 해도 여기에 막 끼어들어도 되는 거야?”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할 테지만, 안 될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달리 빈객은 참가하면 안 된다고 한 것도 아니고, 아마 정의회 측은 우리가 대표두님을 내세울 수도 있다고 생각했겠지요.”
“그 양반은 지금 한창 서연이 지켜보느라 바쁜데 말이지.”
아무렴 상관없다.
“애초에 정의회는 우리 측 참가자가 주공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으니까요. 한 달 뒤 합비에서 볼 때의 얼굴이 궁금합니다.”
어이가 없어 하거나, 화를 내거나.
보일 반응이야 뻔해 보였다.
황준우는 그 부분은 막상 만났을 때 생각하기로 하였다.
대신해서 전날 밤 사마정에게 전해져 온 서신에 대한 주제를 꺼냈다.
“아아, 그렇지. 참. 사마정한테 연락이 왔는데, 아무래도 천마신교가 천산을 빠져나와 중원으로 향했다는 것 같던데?”
“마교가 말입니까?”
전왕의 눈이 가늘어졌다.
짧은 턱수염을 쓰다듬는 손길도 바빠진다.
그렇게 생각이 더욱 가속화되는 듯싶다가, 어느 순간 턱 하니 막혀버린다.
“천마와 오대마종 중 둘을 잃은 지 고작 이 년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한데 중원으로 진격한다고요? 이상합니다.”
황준우에게 듣기로 얼마 전 당대 천마가 죽었다.
아무리 다른 준비가 만반이라 한들 머리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심지어 한때 무림제일이라 불렸지만, 지금의 천마신교가 과거와 같지 않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무모하다.
아니 그 정도를 벗어나 괴상했다.
“이상하지. 나도 동의해. 사마정도 정보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판단하느라 전달하기까지 오래 걸렸다고 하더군.”
“그러니까, 진짜 나서기는 했다는 거군요.”
“서역은 이미 벗어났다고 하더군. 방향은 청해를 벗어나서 감숙으로 향하고 있어. 곤륜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다고 하니…….”
곤륜파를 읊는 황준우의 눈이 잠시 기묘하게 변했다.
‘아직 도움을 요청할 사건은 아니란 건가?’
생각이 짧게 지나가고, 다음 말이 이어진다.
“공동과 제일 먼저 마주치겠군요.”
구파일방 중 하나!
무림맹의 주축이라 할 수 있는 대문파와 천마신교가 만난다.
아마 개방 측에서도 이미 이 소식을 접했을 터였다.
무림맹도 모르고 있지는 않으니 바빠질 테고 말이다.
천마신교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지만, 작금 남기연합의 입장에서는 사실 기꺼운 일이다.
전왕은 영문 모를 사실을 일단 머리 한 편에 묻어두며 당장 유용한 사실을 떠올렸다.
“이거 하늘이 우리를 돕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군요.”
천마신교와의 본격적 회전이 시작되기 직전.
아무리 무림맹이라 한들 남측에 신경을 쓸 여력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렇지. 비무를 끝내고 흡수까지 일사천리로 진행할 수 있을 거야.”
“가장 좋은 그림은 무림맹이 천마신교와 예상외의 혈전을 펼치는 것이고 말이지요. 물론 꿈에 가까울 정도로 가능성은 적습니다만…….”
아니,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준우는 전왕의 말에 곧장 동의를 하지 못했다.
“분명 그게 맞는데…… 또 느낌이 묘하단 말이야. 사마정한테 주시하라고 했으니 기다려 보자고. 우리의 할 일을 하면서 말이야. 전왕 너도 만약에 무림맹과 천마신교의 전쟁이 오래 끌어질 데에 대한 경우를 생각해 둬.”
“알겠습니다.”
두 사람 모두, 이후 전 천하에 어떤 바람이 불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한 달의 시간이 흐르고, 공동파가 무너졌다.
단순한 봉문도 아니었다.
전멸(全滅).
무림 최고의 성세를 자랑하던 구파일방 중 하나가 고작 보름도 안 되는 시간 사이에 시체만 남기고 완전히 무너졌다. 무림맹 차원에서 지원한 병력들도 모두 당했다. 당연히 무림맹을 비롯한 북무림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마치 전성기 시절 천마신교의 진군을 보는 것 같은 모습에 북무림 전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 시점, 남무림 내에서도 큰 사건이 벌어졌다.
남기연합과 정의회의 비무대전.
천하의 안녕을 위해 서로가 피를 보기보다는 화합을 추구하려 한다는 명목으로 밝혀진 이 비무는, 사실상 승자독식(勝者獨食)의 규율을 선언했다.
정의회와 남기연합.
두 세력의 비무에서 승리한 쪽이 모든 것을 가지기로 공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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