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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188화 (188/373)

학사재생 188화

제 188화

“서신?”

“예. 뭐, 하오문이 남기연합에 완전히 복속되기로 하였다는 사실을 전했을 뿐이지요.”

“오호…….”

턱을 가볍게 쓰다듬은 황준우의 눈에서 이채가 쏟아져 나왔다.

“하긴 지금 정의회의 상황에서는 그 말이 헛소문이라고 해도 아찔하겠지.”

물론 그렇다고 단순한 거짓이라면 오히려 손해가 될 수 있다.

당황한 남기연합은 곧장 진실규명에 나설 터고, 서신이 거짓임이 탄로 나는 순간 남기연합을 향한 규탄을 자행할 것이다.

이간질은 정도를 표방하는 입장에서는, 쉽게 용납할 수 없는 종류일 테니 말이다.

하나 지금 전왕이 보낸 서신은 분명한 현실이다.

정의회는 오래지 않아 그를 파악할 테고, 아찔함을 벗어나 막막함을 느낄 터였다. 그들의 눈앞에 떠오를 선택지야 뻔했다.

“아마 꼬리를 말고 무림맹과 손을 잡거나, 결사항전을 외치려나?”

황준우의 의견에 전왕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보다는 협상을 시도하려 할 것입니다.”

“협상? 이 와중에?”

자연스레 코웃음이 나왔다.

하오문을 쏘아 떨어트림으로써 남기연합과 정의회 사이의 차이는 극명해졌다.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답답함을 느낄 것이고, 어떤 식으로든 급하게 행동을 취하리라는 예측을 했다.

한데 그중 하나에 협상이 들어갈 줄은 몰랐다.

“미치지 않는 한 그럴 수는 없겠지.”

“…….”

전왕은 어떤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묵묵히 황준우를 바라보았다.

“정의회의 머리 역할을 하는 놈들이 미쳤다고?”

짧은 정적이 지나고 어이없는 표정이 된 황준우가 되물었다.

“주공……, 천하에는 생각보다 미친 사람이 많습니다. 특히 권력과 황금, 무공은 형체 없는 독처럼 파고들어 사람을 미치게 만들고, 멋대로 자리를 잡아 버린 후에도 도통 빠져나갈 줄을 모릅니다.”

“하긴…….”

황준우의 입 안으로 쓴 신음이 흘렀다.

무공의 소중함은 누구보다 잘 안다.

그리고 권력과 황금.

전생에 가지지 못했던 것을 현생에는 쥐고 있다.

이것들이 가지는 편리한 효율성은 어떤 의미에 있어 무공보다도 더욱 뛰어나다.

없었다면 모를까, 한 번 손에 쥔 이상 쉽게 놓을 수 있을까?

황준우는 내심 고민한 후 웃음을 흘렸다.

“꽤나 매혹적이네. 나도 놓기는 아쉽다는 생각이 먼저 들 정도니까. 하지만…… 지금 가진 모든 것과 바꿔야 할 정도의 가치는 없는 것 같아.”

“그렇습니까?”

“응. 돈과 권력은 다시 쌓으면 돼. 설령 단전이 파괴돼도 새로운 무공의 길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사람만큼은 돌아오지 않아. 이것만큼은 확실한 것 같아.”

질문을 한 전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황준우를 바라보았다.

입가로는 큰 미소가 걸렸다.

“지금 주공께서 말씀하신 것이야말로 제왕이 갖춰야 할 가장 위대한 덕목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그런가?”

“예. 그런 생각, 말 하나, 하나가 저와 같이 주공을 따르는 이들의 양식이 되고 힘이 됩니다. 부디 지금의 마음을 결코 잊지 않으시기를 바라게 되는군요. 정말 훌륭하십니다.”

“거, 칭찬 들으니 기분이 나쁘진 않구먼. 그런 의미에 있어 전왕도…… 정말 많이 성장했어. 예전 모습을 떠올리지 못할 만큼 제법 당당해졌잖아.”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요. 다 주공을 모시기로 한 덕입니다.”

잠시, 서로를 향해 덕담을 나누며 웃음 짓던 두 사람이 곧 얼굴을 붉히고는 헛기침을 했다. 기분이 좋아 시작했지만 그도 계속 이어지니 막상 민망한 탓이다.

“큼큼, 뭐 본론으로 돌아와서 결론적으로 정의회는 고개를 숙이지 않을 것이라는 거지?”

“그게 그들의 권위를 유지할 유일한 수단이자, 자존심이니까요. 하지만 끝까지 버티지도 못할 겁니다.”

“부러지느니 굽힐 사람들이니까 말이야.”

“옳은 말씀이십니다.”

“흠…… 하지만 그러기까지 시간이 제법 걸리겠지.”

어쩌면 쥐고 있는 권위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황준우는 그 긴 싸움을 할 생각이 없었다.

아마 전왕도 다르지 않을 터였다.

“서신 내용, 단순히 하오문 이야기가 전부는 아니지?”

“헤헤…… 들켜버렸나요.”

전왕이 머쓱한 듯 어깨를 으쓱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황준우가 흥미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그냥 탈출로를 알려줬습니다. 너무 길이 많으면 골라내는 데에 또 시간이 걸릴 테니까요.”

“오호.”

“벼랑 끝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문다고 하지만, 지금 우리는 오히려 그러길 바라는 입장 아닙니까? 아마 정의회는 결코 이 미끼를 놓지 못할 겁니다. 여러 의미로 말이지요. 헤헤.”

간신처럼 양손을 싹싹 비비는 전왕의 두 눈에서 꽤나 즐거운 기색으로 가득 찬 음흉한 빛이 번뜩였다.

약 십오 년 전, 처음 정의회가 설립될 당시 본래 산동에 터를 두고 있던 황보세가는 하나 된 오대가라는 명목하에 호남의 남악(南嶽), 형산으로 본가를 옮겼다.

그로 인해 얻은 황보세가의 이득은 간단했다. 정의회 본단이 바로 황보세가의 옆자리에 세워진 것이다.

가문을 근거에 둔 황보세가는 자연스럽게 발언권이 강해지리라고 믿었고, 실질적으로도 크게 다른 결과를 얻지는 않았다.

그 콧대 높다는 남궁세가는 물론, 고집 세다는 당가의 인물들마저 정의회 본단 내에서는 황보세가에게 한 수 접어주는 일이 많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일은 될 수 없었다.

언제나 정의회라는 집단의 가장 높은 곳에는 다른 가문의 이름이 있었다.

바로 서문세가다.

전통의 남궁세가와 함께 오대세가의 수좌를 자주 논하는 서문세가가 가진 장점은 단 하나였다.

서문세가는 다른 오대세가에 비해 압도적인 무력을 갖추고 있다.

기본적으로 고수의 수가 훨씬 더 많으며, 질적으로도 따를 수가 없다.

일례로 정의회가 오대세가로 완전했던 당시 자랑하던 우내십존의 수는 총 세 사람이었고, 그중 둘이 서문의 성씨에 속했다. 이 수는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남궁세가와 제갈세가, 양측 모두 공식적으로 우내십존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으니 말이다.

암중에 진행되었던 제갈세가 공격 당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가문 역시 서문세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건하다.

죽음은 안타깝지만 그곳이 전장이라면 서문세가의 무인들에게는 명예가 되기도 한다.

또한 서문세가에는 그 패전의 복수를 할 수 있는 고수들이 아직 많았다.

이러한 서문세가의 존재가 있기에 작금의 정의회가 지탱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나 이제 그것도 끝이다.

하오문이 남기연합과 결탁했다.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이나, 진실은 명확했다.

이제 정의회 본단에 머무는 각 가문의 장로들이 왈가왈부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가 가진 권력을 지키기 위해 앉은 자리에서 고민하던 그들에게 날벼락과 같은 소식이 떨어졌다.

남은 삼대세가의 가주들이 모두 정의회 본단에 도착한 것이다.

장로들은 허겁지겁 자리를 정리하고 문주들을 맞이하러 나섰지만 머리 위로 떨어진 것은 각 가문 가주들의 불호령이었다.

또한 가지고 있던 모든 권한도 박탈당했다.

“지금부터 정의회는 삼대세가의 가주들이 직접 운영한다. 장로들은 모든 일선에서 물러나 휴식을 취하도록 하라.”

우내십존의 무존(武尊)이자, 서문세가의 가주, 또한 일선에 직접 나선 적은 몇 없지만 정의회주의 직함도 가지고 있는 서문지언이 명했다.

골방의 늙은이로 전락하라는 명이었으나, 누구도 반박할 수 없었다.

서문지언은 결단력이 강하며, 우내십존 중에서도 패도적이기로 손에 꼽았다.

괴롭다 한들 목숨을 포함한 모든 것을 내놓고 그에게 대항할 용기는 지금까지 정의회의 장로라는 직위에 앉아 호의호식하던 이들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게 장로들을 모두 쫓아내고 정의회의 넓은 대전(大殿)에 각 가문의 가주들이 마주 보고 앉았다.

서문세가주를 제외하자면 정의회 본단 내에서 어깨를 좁혀 본 적이 없던 황보세가주, 황버진휘는 평소와 다르게 제법 몸을 움츠린 모습이었다.

가장 상석에 앉은 무존, 서문지언은 당연히 그에게 부담되는 존재다.

거기에 더해 맞은편에 앉은 사천당가의 가주, 독존(毒 尊) 당철의 기세가 날카롭다 못해 서슬 퍼렇다. 세 사람 중에 무공이 가장 처지는 황보진휘로서는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우리 세 사람이 모두 이 자리에 모였다 함은, 같은 서신을 받았다고 보아도 무방하겠지.”

짧은 침묵이 지나고, 서문지언이 입을 열었다.

다소 오만할 수 있는 언사에도 굳이 불만을 표하는 인물은 없었다.

올해로 서문지언의 나이가 종심(從心)에 가깝다.

따지자면 황보진휘와 당철보다 한세대 앞선 선배인 것이다.

물론 단순히 그뿐이라면 괴팍하기로는 밀리지 않는 당철이 참지만은 않았을 터였다.

문제는 여전히 무공이었다.

서문지언은 늦은 나이에도 아직까지 가주의 직위를 수행할 수 있을 만큼 정정하고, 또 강인했다. 단순한 속임수라고 볼 수도 없었다.

마주 앉은 자리에서 부딪친 눈빛에서 형형하게 쏟아져 나오는 기세는 아직 그가 노쇠하지 않았음을 명백히 일러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대체 그 무공이 얼마나 고강할지는 당철로서도 쉽게 점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건방진 놈들이다. 한 번 승리했다고 해서 우리를 크게 얕보고 있는 거지.”

서문지언의 입가로 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어딘지 모르게 화가 나 보이는 듯하면서도, 자조(自嘲)적인 모습이다.

때문에 황보진휘는 제법 놀랐다.

‘서문가주가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알던가?’

언제나 자신감 넘치는 모습만을 보았다.

실제로 서문지언은 그럴만한 실력과 명성을 갖춘 무인이었다.

“주제 모르는 건방진 녀석들은 쳐 죽여야지. 살점 하나까지 발라내어 개 먹이로 던져버릴 게다.”

당철은 그런 서문지언의 모습을 눈치채지 못한 듯 거친 음성을 흘렸다.

“소식은 들었다. 아끼던 아이들이 좋지 못하던 꼴을 봤다지.”

“아들놈은 괜찮다. 다만 문혜는 우리 당가의 미래였다. 희망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만금검존 만큼은 내 손으로 죽일 것이다. 사지를 찢어 만금장의 땅에 직접 뿌려줄 게야.”

당철의 부리부리한 눈이 서문지언의 강인한, 하지만 침착한 두 눈과 마주했다.

선배며, 고수이기에 한 수 접어주고 있지만 그 일 만큼은 절대로 양보하지 못하겠다는 기세가 가득하다.

“……할 수 있다면.”

서문지언이 고개를 주억이며 말했다.

그 모습에 어딘지 모르게 감정이 상한 당철이 가슴을 두드렸다.

“나 당철이다. 독존, 독왕 당철이란 말이다.”

“잘 알지.”

“그 어린 애송이가 아니라 선배라 한들 팔 한 짝쯤은 날려버릴 자신이 있단 말이다.”

거친 당철의 음성에 서문지언의 입가로 그려진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럴 테지. 응원하겠네. 어차피 기회는 저쪽에서 주었지 않은가?”

기회, 그 단어에만큼은 황보진휘의 검미도 무겁게 꿈틀거렸다.

“놈들이 우리를 농락하는 것 아니오?”

서신은 정의회뿐만이 아니라, 삼대세가의 가주들에게도 전달되었다. 심지어 한날한시에 도착할 수 있게끔 서신이 도착하는 시간이 조금씩 엇갈렸다. 그리고 그 내용에는 하오문과 남기연합의 결탁. 그리고 최후의 승부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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