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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186화 (186/373)

학사재생 186화

제 186화

본단조차 없고, 딱히 누군가 권력을 휘두르지도 않지만 남기연합은 마치 한 몸인 것처럼 움직인다. 이를 보고 평하기를 천하에서 가장 마음이 잘 맞는 무림단체라고들 한다.

하지만 여화이를 비롯한 천하의 흐름을 읽는 군주의 자리에 오른 이들의 생각은 달랐다.

과연 남기연합이 정말 마음만 맞아서 저렇게 하나가 될 수 있을까? 어디 가서 빠지지 않을 거대한 세력 셋이 뭉쳤는데 분란이 하나도 없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셋을 강하게 묶어놓는 위엄과 힘이 있다고 봐야 한다. 여화이는 이번 일에서 그 답이 바로 황준우임을 알았다.

그는 과감하고, 냉정했다.

무엇보다 힘이 있었다.

부정하고, 또 억지로 외면한들 본질적으로 무림에서 힘이란 곧 법이 된다는 것을 모를 이는 없다.

황준우는 단순히 무공만으로 그러한 힘의 법도에 정상에 가깝게 위치한 사내다.

심지어 그런 그가 남기연합을 진정으로 제 수족처럼 부린다.

금도 많다.

하오문을 지탱하는 하위세력의 대다수가 제 목숨과, 금전에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는 것을 모르는 여화이가 아니었다. 애초부터 거지인 개방과는 본질이 다른 것이다.

본래는 하오문의 일을 돕던 이들이, 남기연합의 지지를 받는 천조회의 발호 이후 순식간에 그들에게로 달라붙은 이들이 과반수 이상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지위를 가진 최강의 무인이 힘과 금력까지 사용하며 하오문을 무너트리려 한다면 과연 견딜 수 있을까?

백관오와 여화이 두 사람 모두 회의적인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내젓고 굴욕을 감내해야만 했다.

감히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작금의 황준우를 막을 수 있는 이는 무림에 몇 없다.

아니, 단 한 명뿐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천하에서 가장 거대한 무림 집단의 수장.

북두와 남존, 그러니까 소림과 무당의 과한 주도를 막고자 다른 칠파에서 합심하여 세운 화산파 제일고수 매화검존만이 전 무림에서 유일하게 황준우의 적수가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그조차도 최근 무림맹 내에서의 입지가 좋지 못하다고 들었다.

자세한 사정은 개방의 방해공작에 의해 알 수 없었으나, 그간 묻어두었던 정치적 비리가 크게 엮인 듯했다.

누구보다 공명정대해야 할 무림맹주의 위치를 생각하자면 큰 위기라 할 수 있었다.

운이 없다면 이 상태로 매화검존은 무림맹주의 자리를 내놓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무림맹은 차기맹주 선정으로 또 한 번 시끄러워질 터였다.

결국 하오문은 현재 무림맹에 기댈 수 있는 상황도 되지 못했다.

이야말로 용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짓이다.

그간 하오문이 은연중에 벌인 일 중 몇몇은 국가적 중범죄에 해당한다. 황궁에 고개를 숙이고 들어간다면 이 모든 사실이 속속들이 밝혀질 테고 하오문은 잘 익힌 생선처럼 뼈만 남긴 채 모두 잡아먹힐 터였다.

그야말로 사면초가(四面楚歌).

하오문은 어떤 경우에도 황준우 앞에 양팔을 들어 올리고 항복 선언을 할 수밖에 없는 입장인 것이다.

그렇게 하오문을 받아들인 황준우가 제일 처음으로 요구한 정보는 간단했다.

정의회의 모든 것.

여화이와 백관오, 두 사람의 눈에는 명약관화한 사실이 하나 보였다.

이제 정의회는 끝장이다.

긴 시간도 필요하지 않았다.

수족이 잘리고 숨통까지 막힌 정의회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겠는가?

천하 무림은 무림맹과 남기연합으로 나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터였다.

뾰족하게 솟은 봉우리의 수를 무림고수가 멀리서 보아도 한눈에 담을 수 없다 하여 십만대산, 달리 천산(天山)이라고도 불리는 거대한 산맥의 어딘가에는 한때 천하에서 가장 난폭하고 강인하였던 집단의 본거지가 있다.

천마신교.

그 이름은 한때 무림을 비롯한 전 천하에 있어 공포의 대상이었다.

오죽하면 십만대산 인근에서는 우는 아이를 그치게 하는데 호랑이보다 마교의 마두의 이름이 더 많이 쓰였겠는가.

하지만 이십 년도 더 전, 칠야의 난 이후 그러한 마교의 시대는 저물었다.

천하제일의 칠야무신은 무림의 기준에 상관없이 날뛰며 정, 사, 마에 모두 큰 폐해를 끼쳤다. 우스운 것은 분명 그 출발이 정파였을지언데,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천마신교라는 사실이었다.

딱히 남 탓할 것도 없었다.

칠야무신의 오만함을 좌시하지 못한 전대 천마와 오대마종이 먼저 검을 뽑고 싸움을 걸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결과는 처참했다.

이후 마교는 몰락의 길을 걷는 듯 보였으나, 당대 천마 용중호의 노력 끝에 다시금 역동하여 천하를 향해 호령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데 어느 날 갑자기 당대 천마인 용중호의 모습이 사라졌다.

처음에는 단순한 외출 혹은 천하를 향한 출호를 위한 준비 중일 거라 생각했다.

한데 그 기간이 생각보다 너무나 길어지고 있었다.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며 꿈틀거리던 마교가 지나치게 조용해졌다.

천하에 나가 다시 날뛸 기대를 하던 마인들이 알 수 없는 불안감과 걱정, 그리고 분노에 휩싸여가고 있을 때였다.

거대한 묵철로 만들어진 천마신교 본단의 정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그가 왔다.

네 발로 기는 사람들로 쌓은 인차(人車) 위에 앉은 그는 지루하다는 듯 하품하며, 한 손으로는 술잔을 기울였다. 주변으로는 아래 봉우리에 살아가는 마을 주민들을 비롯한 마인, 마두들이 호위하듯 그를 둘러싼 채 외쳤다.

“중영(仲穎)!”

“중영!”

“마왕 중영!”

천마신교 본단에서 때를 기다리며 혈기를 억누르고 있던 마인들은 머리끝까지 분노가 치솟았다.

“감히 반란을 저지르는 것이냐!”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쏟아내며 누구보다도 앞서 뛰쳐나간 마인들에게 인차 위에 앉은 거대한 사내, 동탁의 손짓이 보였고, 목소리가 들렸다.

“어리석은 마의 자식들아, 그만 멈추어라.”

“……!!”

동시에 달려나가던 마인들의 몸이 마치 하나가 된 듯 제자리에서 멈추었다.

동탁은 그를 바라보며 진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 몸은 마의 왕. 마의 종주일지니. 마를 섬기는 자 곧 본좌를 따르는 것이 섭리. 하니 진정한 신도들에게 반역을 외치고, 검을 겨누는 일을 하지 말라.”

목소리는 다소 경박해 보일 정도로 높았고, 장난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가 있었다.

마음을 휘어잡는 마력(魔力)이 느껴졌다.

챙그렁, 털썩.

검을 놓은 마인 한 명이 무릎을 꿇었다.

그는 수신호에 불과했다.

챙그렁, 챙그렁.

끊임없이 이어지는 쇠울음 소리와 함께 본단에 위치한 무수히 많은 마인들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진정한 마왕을 뵙나이다.”

“시대에 마왕이 도래하셨다!”

무언가에 홀린 듯 외치는 그들을 흡족한 눈으로 바라본 동탁이 다시 한 번 손을 휘저었다.

“자아, 그만하면 예는 되었으니 더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기쁜 날이니, 연회를 벌이고 즐겨야 되지 않겠느냐.”

동탁의 말에 무릎을 꿇었던 무인들이 검을 들고 눈을 굳혔다.

처음과 달리 그들의 눈에는 어느새 진한 충성심마저 배어 나오고 있었다.

“하나 왕이시여. 안에는 아직도 진정한 마를 모르는 어리석은 자들이 가득하나이다.”

“모르면 알게 해주면 되지 않겠느냐.”

“그 어리석음이 너무 깊어 왕을 몰라뵐까 걱정되나이다.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우리가 역적들을 처단하여 이곳으로 끌고 오겠습니다.”

순식간에 역적의 위치가 뒤바뀌었다.

자신들의 말이 어찌나 모순되는지 조금도 모르는 듯한 그들의 말에 동탁은 앙천대소를 터트렸다.

“푸하하하! 그리하여라. 내 너희들의 충성심을 직접 지켜보도록 하마!”

기다렸다는 듯 검을 잡은 수백의 무인이 안으로 뛰어들었다.

카가강-!

검이 부딪치는 소리.

“아악!”

“어째서!?”

비명과 의문이 난무하는 소리.

피와 혼란이 가득한 그 중심에 앉은 동탁은 눈을 감고 음미하듯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그 바로 옆,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장량의 마음에 두려움이 치밀어 올랐다.

‘이것이 마왕, 동탁이 가진 지배의 힘.’

팔각마서를 통해 유계와 황천을 넘어 지상에 강림할 마왕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다만 누가 나타나더라도 결코 그 이름에 부족함이 없으리라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마왕 동탁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가 가진 지배의 힘은 단순한 력(力)이라고 표현하기에 무리가 있었다.

차라리 능(能), 혹은 권능(權能)이라 불러야 할 터였다.

고작 한두 명이 아닌 수백, 수천을 아우르는 절대적 지배를 어찌 고작 힘이라고만 표현할 수 있겠는가.

장량이 알기로는 정순한 마음과 굳건한 정신력을 가지고, 순수에 가까운 깨끗한 영혼을 가진 자만이 오직 저 힘에 대항할 수 있다.

바로 영웅이라 불리는 이들 말이다.

하나 현 천하에 그런 존재가 어디 있는가?

모두가 제 욕심을 채우기에 바쁜 이기적인 이들이다.

때문에 마왕 동탁의 권능은 지금의 시대에서 가히 절대적이라 할 수 있었다.

원하던 인물은 아니지만, 동탁 정도면 팔각마서로 뽑은 패 중에서도 최상에 속한다.

이로써 그가 원하던 마의 하늘, 마의 시대가 도래한다.

‘우리 마술사들의 염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상상만으로 짜릿한 전율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비록 장량 본인, 개인의 역사를 부정하는 일이 될 수도 있으나 아무렴 상관없었다.

‘대마술사의 위치는 언제나 숭고해야만 한다.’

숭고란 고작 개인의 욕심과 자부심 따위에 망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잘해나가고 있다.

자연스레 입가로는 미소가 떠올랐다.

“아아, 어리석은 녀석들. 충성심을 보여준다더니 오히려 당하고 있지 않느냐.”

뛰어나갔던 마인들이 점점 기세에 밀려 물러나고 있다.

진득한 혈향과 술 내음에 취해 달빛을 즐기던 동탁의 표정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사실 처음부터 당연한 일이었다.

본단의 입구에 위치한 무인들은 천마신교 내에서 보자면 하급에 속하는 마졸들이다. 더 깊은 곳에는 중급 이상에 속하는 마두(魔頭), 마장(魔將), 마종들이 자리 잡고 있다.

수만 많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킁, 이래서 무식한 놈이나마 아들 녀석이 있을 때가 좋았는데. 귀찮구나. 귀찮아.”

분노한 기세로 몰려나오는 마중고수들을 보며 인상을 찌푸린 동탁이 또 한 번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힘껏 외치며 내질렀다.

“복종하라! 이 몸만이 유일한 시대의 마왕이니, 섭리를 따르라. 어리석은 마의 종들이여!”

마치 천둥이 내리치는 듯했다.

벼락이 번쩍인 것도 같았다.

동시에 살기등등하던 마중고수들도 이전의 마졸들과 다를 바 없는 꼴이 되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다.

완벽한 지배.

그 권능을 유감없이 발휘한 동탁이 신이 난 목소리로 외쳤다.

“피도 충분하고, 시체도 가득하니, 이제 술과 여자만 있으면 되겠구나! 연회를 열자! 나의 종들아!”

동탁이 한 손을 크게 내저으며 외치는 순간 저 멀리 떨어져 있던 북이 크게 울렸다.

“주지육림(酒池肉林)이다!”

끔찍한 연회의 밤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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