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181화
제 181화
“쓰레기 같은 자식.”
아무렇지도 않게 같은 가솔을 죽이고 거칠게 콧방귀를 뀌는 당문혜의 시선이 다시 주변을 훑었다.
화전민 마을이 한눈에 보이는 산등성이에서 팔짱을 끼고 선 그녀의 눈은 이후 조금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그 어떤 거칠고 가혹한 행위도 그녀에게 감흥을 주지 못하는 듯했다.
당절운은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결국 눈을 질끈 감고 모든 것을 외면했다.
‘문혜의 말이 틀리지 않다. 나라고 다를 것이 뭐가 있을까?’
완전히 사태를 외면한 당절운을 잠시 곁눈질로 바라보고는 콧방귀를 뀐 당문혜의 눈매가 다시 찌푸려졌다.
“무림인?”
화전민 마을의 반대편으로부터 처음 보는 얼굴의 사내 넷이 달려오고 있다.
표정을 보아하니 이미 화전민 마을의 상태를 모두 파악하고 있는 듯싶었다.
“우라질, 피를 더 봐야겠네.”
걸쭉한 욕을 하며 침을 뱉은 당문혜가 목소리를 높였다.
“멍청한 새끼들아! 빨리 옷 입어! 적이 온다!”
내공이 섞인 외침과 동시에 주변에서 끔찍한 풍경을 만들던 당가 무인들의 눈빛이 변했다.
적이 온다.
제갈세가?
의문은 잠시였다.
당문혜가 그리 말할 정도면 우스운 이들은 아닐 테니 말이다. 곧장 아랫도리를 챙겨 입고는 한 손에 암기를 가득 채운다.
흉흉한 얼굴에는 즐거운 시간을 방해당한 탓에 더욱 커진 불쾌한 살기가 넘쳐났다.
그 앞으로 뛰어내린 당문혜 역시 암기 몇 자루를 한 손에 끼어 쥐고는 정면을 노려보았다.
적이 곧 당도한다.
당가의 움직임을 들키면 안 되는 상황에서 유쾌하다고 볼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어째서인지 웃음이 흘러나왔다.
“기왕 이렇게 된 것 부디 재밌게 해주면 좋으련만…….”
지루한 것은 당문혜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불타는 화전민 마을과, 마치 도적 떼와 다름없는 약탈 행위.
그를 백장 밖에서 본 황준우의 눈에 불쾌함이 어렸다.
“아주 개판이구먼.”
“무슨 일입니까?”
경호가 물었고 황준우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당가 놈들이다. 고약한 성정을 못 참고 날뛰고 있는데, 보기 조금 역겹네.”
황준우는 이런 장면을 처음 보는 것이 아니었다.
겉으로만 깨끗한 척하는 무림인들과 정치인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스스로의 욕구를 어찌 달래는지 이미 몇 번이나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때마다 끔찍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 들이닥쳐 날뛰었다.
어차피 당시에는 이미 천하의 적이었던 마당이니 두려울 것은 더욱 없었다.
지금이라고 다르겠는가?
마지막으로 황준우를 자극한 것은 귓가에 들려온 당문혜의 목소리였다.
“조금 협상의 여지를 남겨둘까 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다 죽여 버리자.”
그 말과 함께 황준우가 제일 먼저 정면에서 뛰어나갔다.
네 사람도 최선을 다해 뒤를 따라붙었는데,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쫓을 수가 없었다. 단지 방향을 알아보는 정도가 최선이었다.
“이놈들 봐라.”
패악을 보고 분노하여 화전민 마을 인근까지 도착한 황준우는 약탈을 멈추고 순식간에 전투태세로 변한 당가 무인들의 모습을 보고는 내심 감탄했다.
‘저 어린 계집애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 같은데 저 거친 놈들이 이렇게 말을 잘 듣는다고?’
과연 명문이라고 말할 수 있으면서도, 당문혜의 정체가 궁금해지는 상황이기도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대화부터 나눌 생각은 없었다.
황준우의 신형이 빛살이 되어 전투태세를 한 당가 무인 열 명의 목을 꺾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당장의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다. 바로 옆, 혹은 앞 또는 뒤에 있던 동료의 목이 기괴한 모양으로 꺾이며 눈빛이 죽은 것을 확인한 때는 허공에서 갑작스러운 황준우의 목소리가 들려온 직후였다.
“안녕. 당가의 도적놈들아.”
“……!”
너무나도 가볍게까지 느껴지는 그 인사말에 모두의 눈에 경악이 어렸다.
소수로 움직이고 있던 만큼 채 백이 되지 않던 인원 중 십 분의 일이 단숨에 죽었다. 심지어 그 사실을 눈치챈 것도 늦었다. 무엇보다, 상대는 혼자였으며 심지어 공중에 떠 있기까지 했다.
이 자리에 있는 당가의 무인 중 이 사실을 모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초인…….”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긴장과 공포에 사로잡혀 있을 때에도 움직인 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
“개 같은 놈!”
욕을 흘린 당문혜의 신형이 허공으로 펄쩍 뛰어올랐다. 그녀의 양손에서 화살처럼 쏘아지는 암기의 다발을 본 황준우는 코웃음을 흘리며 권갑을 낀 손바닥을 펼쳤다.
타다다당-!
허공에 생성된 넓은 강기막에 부딪친 암기 다발이 지상으로 힘없이 떨어진다.
당문혜는 놀라는 한편 몸을 앞으로 내밀어 황준우의 머리카락을 휘어잡으려 했다.
살짝 놀란 표정으로 그를 피한 황준우의 입가로 미소가 떠올랐다.
“뭐야, 이거 내 동생 못지않은 천재잖아? 시대가 좋은 건가.”
진심 어린 감탄이 담긴 찬사였지만 당문혜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죽어!”
이번에는 더 가까이서 당문혜의 암기가 꽃잎처럼 흩날렸다. 놀라운 것은 그 암기 끝자락에 머물고 있는 녹색 기운이다.
처음에는 평범한 강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감각을 자극하는 짜릿한 느낌이 황준우에게 그 정체가 독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암기를 흩날리며 독의 기운을 실어 날렸다.
황준우는 당문혜가 당가가 자랑하는 독인임을 알아보았다. 또한 그 솜씨가 어찌나 좋은지 초절정 고수 아니, 방심한다면 초인이라 하여도 꼼짝없이 당할지도 모를 정도의 실력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나한테는 해당 없는 이야기고.”
정작 만들어 달라 해놓고 한 번도 제대로 써보지 못한 권갑의 감촉이 손끝에 착 달라붙는다. 그래서일까? 암기를 쳐내는 손길이 너무나 부드러웠다.
이 정도 독이야 맞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정확하게 독이 묻지 않은 부분을 쳐낸다.
그 움직임이 놀랍다 못해 경악스러울 정도인지라 성내며 날뛰던 당문혜의 몸마저 굳었다.
애초에 전생에는 검 아니, 도구 자체를 사용하지 않았던 황준우였다. 몸의 수발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했다.
다만 손끝에 느껴지는 감각의 문제는 다르다. 역시 만총의 솜씨랄까? 권갑을 착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맨몸인 양 어색함이 전혀 없었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수왕이 대단하긴 하지.’
수왕은 검임에도 불구하고 손발보다 더욱 자연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도구를 사용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때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한동안 수왕검은 봉인이었다.
‘적어도 만금검존이라는 별호가 바뀌기 전까지는 말이지.’
검존이라니, 처음 들었을 때부터 황준우는 자신에게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별호라고 생각했다.
“너, 너…… 대체 뭐야? 분명 그 넷 중 하나는 아닌데…….”
떨리는 목소리의 당문혜가 황준우를 향해 묻는다.
아마 황준우보다 조금 뒤처진 나머지 일행을 발견한 듯했다.
이제는 제법이라는 생각보다 당연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벌써 초인의 영역에 근접해 있네. 사실상 기회만 있었다면 벽을 넘어도 한참 전에 넘었겠군.’
당문혜의 솜씨는 초절정 중에서도 극상이다.
거기다 독이라는 특수성이 가진 힘이 뛰어난 탓에 같은 수준의 고수를 몇 이상 홀로 격살할 수도 있다. 전대와 당대를 통틀어 이와 같은 빛나는 재능을 가진 이는 황준우가 알기론 단둘뿐이었다.
‘나랑 서연이 정도…….’
그리고 방금 막 한 명이 더 추가되었지만 아쉽게도 미래의 꽃은 보지 못할 듯했다.
“네 재능이 아쉽기는 하지만 여기서 이만 죽어줘야겠다. 눈빛부터 아주 표독의 극치를 달리는구나.”
황준우가 마음을 굳히며 선언을 내렸다.
그 순간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느꼈다.
황준우의 말은 단순한 협박이나 가능성이 아니다.
분명히 그렇게 실현될 것이다.
“자, 잠시만! 고인(高人)께 아뢸 말이 있습니다!”
다급한 목소리로 손을 들고 나선 이는 당절운이었다.
그는 창백한 안색으로 황준우의 눈을 힘겹게 바라보며 말문을 이어 나갔다.
“고인, 고인이시여. 제발 부탁이니 이야기를 들어주십시오.”
비틀거리며 앞으로 걸어 나온 당절운이 무릎을 꿇으며 말한다. 황준우는 잠시 턱을 쓰다듬고는 가볍게 고개를 주억였다.
어차피 끔찍한 풍경은 멎었고 마을 사람들은 주섬주섬 위험한 공간에서 벗어나고 있다. 뒤쫓아 오는 네 사람의 실전 감각도 올려줘야 하니 여유롭게 움직여야 할 이유도 있었다.
“해 봐.”
“아시다시피 우리는 당가의 가솔들입니다. 그중 저는 부족한 주제에 당협이라는 별호와 함께 삼 공자의 직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 아이는 제 동생, 당문혜지요.”
“그래서? 설마 내가 당가를 무서워할 것이라 생각한 건가?”
황준우는 코웃음을 쳤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천하의 만금검존께서 어찌 당가를 두려워하시겠습니까.”
담담하던 황준우의 눈에 작은 이체가 어렸다.
“호오…… 알아봤어?”
기실 ‘검존’이라는 별호가 마음에 들지 않아 굳이 권갑까지 꺼내 든 황준우다.
한데 당절운은 황준우를 알아본 듯했다.
“생각해 봤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가 당가임을 알고도 쫓아올 사람들이 누가 있을까요. 무엇보다 젊은 나이에 저 아이를 홀로 압도할 수 있는 분은…… 천하에 몇 없습니다.”
당절운의 시선이 충격에 빠진 채 몸이 굳은 당문혜를 향했다. 독인이 된 이후 가문의 끊임없는 지원을 받으며 누구보다 오만하게 자란 아이다.
실제로 그만한 실력과 자격을 갖추었으니 막을 수도 없었다. 그런 자신감과 자부심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황준우가 중년의 사내라도 됐으면 모를까, 또래의 청년으로 보인다는 사실이 더욱 그녀의 마음을 거세게 두들기고 있을 것이다.
“하긴,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네. 하지만 숨은 은거고수일 수도 있었잖아?”
잠시 그 표정을 감상하듯 바라보던 황준우는 당절운의 추리가 그럴싸하다고 생각하며 물었다.
“아무리 천하가 넓고 숨은 고수가 많다 한들…… 검존과 같이 빛을 내는 소협(小俠)은 달리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상대가 말을 들어주는 태도가 되자, 마음이 진정되기 시작했는지 제법 그럴싸한 말을 뱉기 시작한 당절운의 입가로는 쓴웃음이 감돌았다.
기실 그는 천하가 아무리 넓다 한들 당문혜만 한 재능과 비견할 수 있는 인물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남기연합의 만금검존에 대한 소문은 헛소문이라고까지 치부했다. 눈앞에 보이는 당문혜만 하여도 경악스러울진데 그보다 더하다고? 그래서 만금검존을 남기연합이 만든 허상의 영웅으로밖에 볼 수 없었던 것이다.
한데 틀렸다.
천하는 정말 넓었고, 빛나는 재능은 그의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제법 재미있게 말을 하네. 상대를 높이는 척 부담되지 않게 소협이라는 단어를 섞은 건가?”
전왕과의 만남 이후, 황준우는 정치라는 것을 일부 배웠고 지금 당절운의 언사가 그런 행위와 닿아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 오대세가의 자제쯤 되면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 이러한 정치와 관련된 언사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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