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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178화 (178/373)

학사재생 178화

제 178화

심지어 기척 자체가 제법 뜬금없이 나타났다.

“뭐야, 이건 예상외의 손님인데?”

황준우는 그를 지그시 바라보다 곧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문부터 열어 주면 안 될까?”

되돌아온 높은 톤의 목소리에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이며 문을 열어젖혔다.

빗물로 발끝까지 적셔 제법 처량한 꼴을 한 여인 한 명이 황준우를 바라본다. 수줍은 눈에 주근깨가 가득한 얼굴은 풋풋해 보인다.

이제 방년은 되었을까?

황준우는 이 얼굴을 처음 본다.

하나 이 여인을 처음 본다고 말할 생각은 없었다.

“이런 꼴로 들어가도 될까?”

여인의 질문에 웃음을 보인 황준우가 방 안에 놓인 식탁에 앉아 턱을 괸다.

“당연히 말리고 들어와야지. 불쌍한 모습으로 동정심을 얻으려 했다면 실패라고, 제갈량.”

자신을 부르는 이름에 입술을 살짝 빼 내민 여인, 제갈량이 방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서는 순간 모습이 뒤바뀌었다.

빗물 잔뜩 젖은 시골 소녀에서, 어딘지 모르게 자조적인 눈빛을 한 주제에 당당히 어깨를 핀 여인이 된 그녀는 미끄러지듯 방 안으로 들어와 황준우의 맞은편에 앉는다. 한 손에는 어느덧 모습을 나타낸 백우선이 살랑였다.

“오랜만이네. 그간 잘 지냈어?”

눈웃음을 짓는 그녀의 말에 황준우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주억였다.

“모르고 찾아온 것 같지는 않은데?”

“어머, 까칠하기는. 우리 사이에 이럴 거야?”

“우리 사이가 뭐 있는 건 아니지. 본론만 말해. 나 지금 상당히 피곤한 상태거든.”

“하긴, 그 영감. 이제 막 등선하는 신선치고는 조금 과하더라.”

“그때도 보고 있던 거야?”

“직접 광경을 본 건 아니고, 흔적 정도는 확인했으니까 말이야.”

“흠…….”

짧은 신음을 흘린 황준우의 손이 가볍게 움직였다.

드르륵- 탁!

빗물이 파고들만한 틈새가 열려 있던 방문이 완전히 닫히고 짧은 침묵이 감돌았다.

“……문은 잘 닫고 다니라고. 입구가 잔뜩 젖었잖아. 또, 중요한 이야기를 할 것 같은데 누가 틈새로 훔쳐보거나 들으면 어쩌려 그래?”

“호호, 미안. 내가 조금 무심했네?”

짧은 정적 동안 황준우는 몇 번의 심경 변화를 겪었다.

그 전부가 제갈량을 어찌 대해야 될까에 대한 고민이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나를 완전히 믿지 못하는 탓이겠지.’

당연한 일이다.

서로 대화를 하고, 만족할 만한 거래 상대는 되었지만 신뢰를 나눈 적은 없다.

무엇보다 그녀는 황준우가 모르는 미지(未知)에 닿아 있다. 경계심을 보이지 않는다면 오히려 바보다.

“그래도 그렇게 너무 노골적으로 노려보지는 말아 줘. 나도 상처를 받는 여자라고.”

짧은 웃음을 보인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미안하지만 무리야. 여기는 내 집이거든. 완벽히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굉장히 불쾌하고 예민할 수밖에 없어. 무서울 것 같으면 애초에 들어오지를 말았어야지.”

“끙…… 가족 때문인가?”

“당연한 것 아니야?”

황준우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가 이토록 바쁘게 움직이며 남기연합이라는 세력을 구축하고, 미래를 그려 나가는 모든 중심에 가족이 있다. 행복이 있다.

약점이 될 수도 있는 그 사실을 상대에게 감출 생각은 없었다.

전왕이라면 그런 방식을 쓸지도 모르지만 황준우는 달랐다.

솔직하게 보이고, 오히려 그만큼이나 주의하라는 경고를 준다.

언제나 그렇듯 이것은 황준우의 방식이었다.

강자의 고압이다.

제갈량은 그를 느꼈고 때문에 웃음을 그렸다.

“정말 너란 남자는 자신감이 넘치는구나.”

“적어도 누구처럼 다 포기하고는 끝을 기다리며 살고 싶지는 않아서 말이야.”

제갈량의 얼굴이 아주 찰나 간 굳어졌다.

하나 아주 잠시일 뿐.

그녀는 오히려 흥미로운 시선으로 황준우를 바라보았다.

“무섭지 않은 거니? 이 세계에 끝이 찾아오고 있는데?”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어? 나 자신감 하나는 넘치는 남자야.”

“좋네. 때로는 그 자신감이 용기라는 말로 포장되어 기적을 일으키고도 하니깐 말이야. 기대하고 있어.”

“전혀 기대하고 있다는 표정은 아닌데 말이지.”

“후후, 기대가 너무 크면 실망도 크니까 말이야. 언젠가 내가 보고 있는 것을, 네가 보게 되면 자연스럽게 이해할 거야.”

“그럴지도.”

자신감은 넘치지만 겪지 않은 것에 확신까지 가질 필요는 없다.

황준우의 담담한 모습에 제갈량이 큰 가슴을 식탁 위로 턱 내려놓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역시 마음에 드는데.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물을게. 내 남자가 될 생각은 없어?”

“여전히 매정하네. 근데 정말?”

“방금 전에 마지막이라고 하지 않았나?”

“원래 다짐은 깨라고 있는 거야.”

“…….”

그 말에 제법 동의한 적이 많은 황준우는 더 이상 반박하지 않고 자신의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시끄럽고. 진짜 본론이나 꺼내. 정의회가 문제인 것 아니야?”

“그것 말고 내가 널 찾아올 이유가 뭐가 있을까. 아, 하나 더 있긴 하네. 보고 싶어서?”

“정확하게 원하는 바와 줄 수 있는 것만 말해.”

“원하는 건 당연히 전력 지원. 줄 수 있는 건 제갈세가…… 그리고 나?”

“제갈세가의 합류는 명분을 만드는 수준밖에 안 돼. 미안하지만 어쩌다 보니 우리가 돈도 제법 많아져서, 달리 제갈세가한테 손까지 벌릴 이유도 없고.”

황준우는 제갈량의 뒷말은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냉철하게 이야기를 이끌어 나갔다. 자연스럽게 장난기 가득하던 제갈량의 눈빛도 조금 변했다.

표정에는 협상 자리에 나온 지략가의 얼굴이 떠오른다.

“왜 그래? 모르는 사람처럼? 제갈세가의 합류가 고작 명분 부여 정도밖에 안 되지는 않잖아?”

“제갈세가까지 남기연합에 함께한다면 이름값이 제법 높아지고, 지금보다 더 관심이 쏠리기야 하겠지. 그러면 반대로 물을게. 너야말로 모르는 사람처럼 왜 그럴까?”

“남기연합에 제갈세가의 이름은 크게 필요 없다?”

“있어서 나쁠 건 없지만 없어도 손해는 아니란 거지.”

“뭐야, 무공만 아는 멍청인 줄 알았는데 제법 똑똑하잖아.”

“혹시 죽고 싶은 거야? 나 여기선 꽤나 예민하다고 했는데 말이야.”

황준우가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다.

“음…… 미안, 나도 모르게 본심이 튀어나왔네.”

“장난치지 마. 나도 옆에서 지켜보며 배운 게 제법 많은 사람이야.”

“누가 널 가르쳤는지 얄밉네. 몰랐으면 좋았을 걸. 좋아. 그러면 진짜를 이야기해 보자. 혹시 원하는 게 따로 있어?”

“멸망의 새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 정도라면 별 대가 없이 움직여 볼 생각은 있는데.”

“기각. 작은 불씨를 피하고자 재앙을 만들라는 이야기로밖에 안 들려.”

“그럴 것 같았지.”

황준우는 고민했다.

제갈량에게 원하는 것.

얻을 수 있는 바.

생각해 보면 굉장히 많을 터였다.

그녀의 지혜와 지식은 말한 바 있듯 황준우에게 미지에 가까웠으니 말이다.

예를 들자면 보패의 행방 같은 것이 있을 터였다.

‘어쩌면 본인이 몇 개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당장 그것이 필요한가?

황준우는 조금 더 넓게 봐야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때에 전왕이라면 무얼 얻으려 했을까…….’

제법 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미숙하다.

황준우는 깊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너무 욕심부리지 않아 줬으면 좋겠어. 애초에 우리가 바라는 건 많은 게 아니야. 정의회도 몰래 움직이고 있는 마당이니, 사실상 삼대 세가 중 딱 한 곳만 막아 줘도 되거든.”

“단 한 곳?”

“어디?”

“당가(唐家).”

“아무렇지 않은 척 제일 곤란한 녀석을 넘기겠단 거잖아.”

“에헤헤.”

제갈량이 혀를 쏙 빼 내밀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런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려 해도 소용없어. 융중산 내에서 진법을 펼치고 싸워도 당가의 독(毒)은 제법 위험하단 거군.”

황준우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갈세가에 방문했을 당시 황준우는 이런 진을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다면 정말 무공을 익히지도 않은 한 사람이 일천을 막아서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때문에 은밀하게 움직이며 기습을 준비하는 정의회 정도는 문제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지켜보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한데 제갈량이 직접 황준우를 찾아왔고 도움을 요청했다.

심지어 목표마저 정해 주었다.

사천당가.

비교적 중원과 멀리 떨어진 사천 지역에 위치한 당가는 세인들에게 있어 오대세가 중 가장 위험한 세력으로 첫 손가락에 꼽혔다.

무림절학으로 불리는 암기 무공 탓만이 아니다.

확실히 먼 거리에서부터 위협적으로 날아오는 절학급 암기술은 상대하기 곤란하다.

하나 그뿐이라면 당가가 오대세가 중 ‘제일 위험한’이라는 수식어를 달지는 못했을 터였다.

당가의 가장 큰 힘은 황준우가 말했듯 바로 독이다.

당가의 독은 흔히 천하제일(天下第一)이라는 말을 달고 산다. 어찌 보면 황궁에서 취급하는 화탄보다 더 위험한 이 독은 기실 전생의 황준우에게 있어서도 가장 난감했던 문제였다.

사람을 믿지 못하는 것만으로도 난감할진대, 숲길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호숫가에 담겨 있는 물, 그리고 자연을 뛰어다니는 짐승마저 의심해야 한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먹고 마시는, 인간의 생활을 위해 기초적으로 필요한 그 모든 곳에 당가의 손이 닿아 독이 배어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심지어 그 독 중 일부는 황준우와 같은 절대고수조차 절명시킬 수 있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황준우가 남궁세가의 두 권력자에게 먹인 고독 역시 이들로부터 비롯되었으니 무림인들이 사천당가라는 이름에 치를 떠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독은 무형의 물질에 더 가까워서 진법을 벗어나서도 피해를 끼칠 수 있으니까. 보았다시피 우리 가문은 그리 크지 않아.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소중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지. 나도 너랑 크게 다르지 않아.”

“호오…… 그건 나한테 약점을 알려 준 건가?”

진법도 무형의 물질을 가둘 수는 없다.

방금 전 까지의 황준우는 몰랐던 사실이었다.

“너도 나한테 보여 줬으니까. 서로의 신뢰를 위해 필요한 과정이랄까?”

“좋아. 믿어 주지.”

애초부터 경계는 하지만, 딱히 적이라고 의식하지는 않고 있던 제갈량이다.

상대측에서 먼저 저쯤 나와준다면 황준우도 마냥 날카롭게만 대할 이유는 없었다.

“당가 정도만 막아 주면 된다. 나머지는 제갈세가 수준에서 감당이 될 테고, 그로 인해 실질적으로 얻을 수 있는 건 아마 정의회의 몰락.”

“그리고 흡수.”

“나쁘지 않네.”

하지만 이건 결론적으로 얻게 될 부분이다.

제갈세가가 건네주는 보상이라 보기는 힘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당가를 막아준 대가로, 똑같이 하나의 문파에 대한 정보를 네게 건네줄 거야.”

“하나의 문파?”

“하오문 본단.”

황준우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개방을 제외한 대다수의 정보문파는 본단의 위치를 감추고 살아간다. 무공은 약하지만, 정보에 치중한 하오문 같은 경우는 그 정도가 더 심했다.

문주를 비롯한 주요 인물들이 사로잡히면 문파 전체가 흔들리니 본단의 위치에 대해서는 몇 번의 기밀을 더하는 것이다. 실제로 마음 먹은 개방이 하오문 본단을 찾기 위해 일 년 넘게 쫓아다녔으나 끝내 발견하지 못하였다는 전적도 있었다.

그런 하오문의 본단을 제갈량이 알고 있으며, 이번 일의 대가로 알려 준다.

정의회에 이어, 하오문까지 한 번에 완전히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리 되면 남기연합의 규모가 달라진다.

남무림의 통합.

가능만 하다면 황준우를 제외하고라도 무림맹과 동격의 세력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탐나는 제안인데. 좋아, 받아들이지.”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고, 제갈량이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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