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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172화 (172/373)

학사재생 172화

제 172화

1. 이 년 후

시대가 변했다.

그 정확한 면모를 아는 사람은 몇 없었지만, 귀 밝은 이 모두가 변화의 흐름을 느끼고 있었다.

무림에서는 무림맹이 홀로 오롯이 독존하듯 군림하기 시작했다.

위세를 자랑하던 정의회는 다섯 주축 중 둘을 잃은 후, 신흥 세력인 남기연합의 확장마저 막지 못한 채 그저 주춤하고만 있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몇 강경파가 전쟁을 외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고 하였다.

정의회가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는, 이제는 더 이상 정치가 아닌 무림인의 본질 그 자체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다. 하나 아직 정의회는 그러한 강경파보다 현 상황을 어떻게든 유지하려는 온건파가 많았다. 강경파는 그들을 고인 물, 썩은 물이라며 침을 뱉었다.

그 분위기가 험악해질수록 호사가들은 다음 무림 전쟁은 정의회의 내부 분열로부터 시작될 것이라 추측하기 시작했다.

황궁은 조용하게 무거운 엉덩이를 몇 번이고 들썩였다.

사라졌던 황자 주고치가 돌아오고, 황녀 주연하에게 몰리는 듯했던 황권이 다시 한 번 흔들렸다.

황녀 주연하는 굉장한 융통성과 정치 능력으로 권력자들을 포섭해 제 품에 안았지만 황자 주고치가 가진 정통성은 강력했다.

차기 황권을 위한 두 사람의 다툼이 조금씩 격렬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기이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황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그저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스스로가 피의 역사를 밟았기에 후손도 그러기를 바람인가?

아니면 다른 의중이 있는 것일까?

그조차 아니라면 노신(老身)을 감당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참고 있을지도 모른다. 황제를 향한 의문은 많았지만 누구라 한들 그를 물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강호무림이 변하고, 황궁이 흔들리고 있다.

어지간히 눈치가 없지 않은 이상에야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이는 없었다.

그렇게 긴장과, 걱정 속에 이 년이라는 시간이 더 흘러갔다.

“활협단이 완전히 붕괴됐네.”

어느덧 완연한 청년의 얼굴이 된 황준우의 말에 맞은편에 앉은 전왕이 고개를 주억였다.

“전통적으로나마 지속되었던 승선모임에서 마지막 모임마저 어제부로 완전히 와해되었습니다. 애초부터 명목조차 없던 수준이니 더 이상 유지할 이유를 못 느꼈겠지요.”

남기연합의 결성 이후 황준우가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활협단의 붕괴였다. 속을 알 수 없는 진무영에, 범 천하를 아우르는 비밀단체. 언제까지고 눈에 거슬리는 것을 두고만 보고 있을 이유가 없다.

황준우는 그 싸움을 보이지 않는 전쟁이라 생각했고, 과감하게 밀어붙였다.

의중을 알 수 없는 적을 굳이 곁에 둔 채로 살아갈 필요가 없었으니 말이다. 승리의 자신감도 충만했다.

그리고 실제로 남기연합은 암중에 활동하던 활협단을 어제부로 완전히 와해시켰다.

“진무영이 완전 손을 떼 버리니 너무 싱거운걸. 고작 이 년이었나?”

“오히려 생각보다 오래 버텼습니다. 그리고 어쨌든 우리 입장에서야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승리한 셈 아닙니까? 기쁜 일이지요, 헤헤.”

“맞는 말이야.”

황준우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전왕의 말대로 조용했던 이 년의 전쟁은 남기연합 전체에 한 방울의 피도 요구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황준우가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진무영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무력적인 수단이 가장 빠르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활협단에 속한 무림 단체 몇을 홀로 괴멸시켰다. 상대를 자극해서 양지로 튀어나오게 하기 위함이다.

한데 공격당한 활협단 측이 너무 조용했다.

그사이 사마정은 활협단 내의 정보를 꾸준히 관찰했고, 이내 진무영이 그들 사이에서 사라졌음을 알렸다.

진무영이 빠진 활협단.

미련을 버리지 못한 몇몇이 모여 어찌어찌 명맥을 잇고 있었지만 황준우는 어째서인지 김이 빠진다는 생각을 했다. 더 이상 그가 직접 나서서 싸울 필요도 없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때마침 전왕이 황준우에게 이번 일을 맡겨 달라고 부탁했다.

시간은 조금 걸릴 테지만 가장 확실하게 활협단을 붕괴시키겠다고 말한 것이다.

진무영이 사라지며 여러모로 약화된 활협단이었지만, 그냥 놔둘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 황준우는 곧장 전왕에게 모든 일을 일임했다.

그가 어떤 식으로 활협단을 무너트리는지 지켜보며, 스스로의 무공 수련에 더 열을 쏟았다.

그리고 바로 어제, 활협단이 완전히 와해되었다.

그들 모두가 한때는 서로 한자리에 앉아 있던 이들이었는데 이제는 서로를 향해 등을 돌리다 못해 창, 칼을 겨누고 있다.

“신기하긴 해. 이런 식으로도 싸울 수 있다는 것, 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거든.”

“저도 주공을 따르기로 한 이후 열심히 고민했습니다. 제가 가장 잘하는 일이 뭔지. 주공께서 그러셨지 않습니까. 재능 있다고요. 헤헤. 그러다 보니 사람이란 동물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더군요.”

“그래서 이간질을 시켰다?”

황준우의 짓궂은 목소리에 전왕이 사색이 되어 손을 내저었다.

“이간질이라니요. 그냥 저들의 본심을 조금 더 쉽게 끌어내게 도와준 것뿐입니다요.”

실제로 전왕은 활협단의 와해를 위해 단 두 번을 움직였을 뿐이다.

그 첫째는 바로 활협단에 정도문파와 나머지 세력들 간의 대립을 부추기기 위해 백수귀존 차무열을 만난 것이었다.

전왕은 그가 활협단의 완전한 와해와, 대문파들의 억압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눈에 꿰뚫고 나머지 세력을 통합하여 그들의 목소리에 맞서기를 조언했다.

차무열은 전왕을 의심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기에 그의 말에 따랐다.

무공조차 제대로 익히지 못한 문인인 전왕과, 강호의 대문파. 만약의 수가 틀어질 경우에는 자연스레 전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쉽게 말해 얕보였다.

실제로 전왕은 남을 향해 머리를 숙이고 얕보이는 행동을 잘했기에 일은 아무런 의심 없이 진행되었다.

그 결과, 활협단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며 진무영 이후의 후사를 논하던 정파의 거목들과 남은 세력의 다툼이 시작되었다.

결국 진무영을 잃고, 붕괴하여 명목만 남았던 활협단마저 둘로 갈라졌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정도문파는 본래의 자리, 무림맹으로 돌아가 충실히 자신의 자리를 공고히 하기 시작했다.

남은 이들은 신(新) 활협단이 되어 모임을 지속해 나갔다.

흩어졌다가는 구대문파를 위시한 정도 문파에 밀릴 상황이니 어떻게 해서라도 뭉칠 수밖에 없던 입장에 처한 이들이었다.

그렇게 더 이상 활협단이라 부를 수도 없는 명목 잃은 가짜들이 남게 되었다.

가장 앞장서 지금의 모임을 선도했고, 우내십존으로서 무림 위명이 높다고 볼 수 있는 백수귀존 차무열이 새 수장으로 지정되었으나 그에게는 거대한 무림 단체 전체를 이끌 힘과 인맥, 능력이 부족했다.

무엇보다 과할 정도의 예민한 성격이 문제였다. 애초부터 중구난방의 사상을 가진 애매모호한 모임인 신 활협단에서 그러한 독주가 좋게만 보일 리는 없었다.

전왕은 느긋하게 그를 지켜보며 때를 기다리다, 얼마 전 한 장의 연설문을 작성했다. 이름을 밝힐 수 없는 힘없는 신 활협단의 선원 중 하나가 되어, 이런 사태를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다는 진심을 담은 명문(名文)이었다.

이후 그 연설문을 승선모임 이틀 전 밤, 신원을 파악한 신 활협단 인원 전원에게 뿌렸다.

백수귀존 차무열 본인에게조차 신문처럼 전해졌다.

연설문은 심지였고, 그날의 승선 모임은 화탄이었다.

불은 차무열 본인이었다.

그는 자신을 모욕한 연설문에 참지 못하고 범인을 색출하고자 열을 올렸고, 그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누군가의 한마디는 마지막 단말마가 되었다.

비명이 울려 퍼졌고 혼란이 찾아왔다.

백수귀존 차무열을 향한 불만의 목소리와 분노가 터져 나왔고 승선모임은 단숨에 전쟁터가 되었다.

그리고 그 끝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각자의 이익에 따라 자리를 잡아 서로를 향해 창끝을 겨누었다.

진무영이 사라지며 붕괴되고, 전왕의 조언에 따른 차무열의 움직임에 의해 반으로 나눠진 뒤 명목을 잃었다. 어젯밤에는 끝내 저들끼리의 싸움으로 인해 모든 것을 내던졌다.

“가장 훌륭한 모략은 적에게 새로운 적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직접 내가 나서서 싸우는 일은 하책(下策)에 속할 수밖에 없지요.”

“그거 은근히 나 욕한 거 아냐?”

“아니, 그럴 리가요! 제가 어찌 주공을……!”

“나는 직접 나서서 싸우는 걸 좋아하는데.”

“하, 하지만 주공은 제가 세 치 혀로 할 수 없는 일을 모두 해내시지 않습니까.”

“전왕 너도 내 검이 할 수 없는 모든 일을 해내지.”

“…….”

전왕이 붉어진 얼굴이 되어 동공을 떤다.

최근 들어서는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이런 때에는 긴장을 하고 하는 것이다.

“킥킥, 전왕. 애초에 이건 칭찬이라고. 그리고 그거 알아? 근래 들어 너 점점 사악해지고 있어.”

“그야 모략질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그리고 주공도 못지않으십니다. 매일 놀리시기나 하고. 거기검께서도 최근 저를 찾아와 한탄을 많이 하십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면서요…….”

“우리 경호와 전왕의 가장 큰 닮은 점은 놀리기 즐겁다는 점이거든.”

“끙…….”

“무림맹 측은 어때?”

황준우의 새 질문에 당황하던 전왕의 표정이 변했다.

“천조회주가 말하길 무인 육성에 더욱 힘을 쏟고 있다고 합니다.”

“전쟁 준비?”

“그보다는 얕보이지 않기 위한 행동으로 보입니다.”

“흠, 사실 활협단을 진짜 지탱하던 쪽은 그 무림맹이라고 봐도 되니까, 주의를 늘 기울여야겠지. 이상한 데로 튀어서 이쪽을 곤란하게 하면 안 된단 말이야.”

“예. 저도 그래서 건네주신 칠투기(七鬪技)로 열심히 병력을 육성 중입니다. 전투에 있어서는 아직은 주공이라는 변수를 제외하고는 우리가 불리하다고 봐야 하니까요.”

전왕의 솔직한 분석에 황준우가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주억였다.

작금의 남기연합은 약하지 않다.

특히 무림맹조차 정확히 모르는 황준우의 무력은 모든 판을 뒤엎을지도 모를 수준이다. 지금처럼 쭉정이만 남은 정의회는 이미 남기연합의 상대가 아니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하나 무림맹도 감추는 것이 많은 곤란한 상대였다.

“어차피 그쪽에서도 이쪽이 감추고 있는 게 두려워 쉬이 움직일 수 없다는 거지?”

“맞습니다. 그래도 주공께서 늘 말씀하시는…….”

“완전한 승리.”

욕심이다.

전쟁과 전투를 아는 이들이라면 미친 헛생각이라고 손가락질할 터였다.

모든 전쟁에서 완전한 승리란 이룰 수 없다. 승자도 결국 피와 눈물을 쏟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 황준우는 그를 바랐다. 지금과 같이 무림맹과 애매한 줄다리기를 하는 듯한 감각 자체가 싫었다.

“난 욕심쟁이니까. 내 사람 중 누구라도 잃고 싶지 않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힘내고 있지 않습니까.”

웃는 표정을 한 전왕의 말마따나 모두가 힘내고 있다.

무림의 싸움은 전왕과 같은 모략도 필요하지만, 결국 전술과 전투에서의 무력도 분명 중요하다.

황준우 본인의 무공은 이미 천하에 적수가 없을 정도라고는 자신하나, 몸이 여럿이서 천하 전체에 산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쟁이란 것이 벌어졌을 때 한자리에 모여서 무작정 우와와 하고 소리 지른 뒤 싸움이 끝나면 참으로 좋겠지만 현실은 다르다.

황준우는 그 사실을 몇몇 경험으로 처절하게 깨달았다. 때문에 모두에게 강해지기를 바랐다.

그런 마음으로 황준우는 가장 효율적인 무공 수련 방식을 완전히 정립해 경호와 홍산, 흑백쌍노를 비롯한 사마정과 전왕에게까지 가장 가까운 사람 모두에게 전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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