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168화
제 168화
그 힘이 적아를 가리지 않고 제멋대로 날뛸 것임을 알면서도, 오태악은 지금 분노에 휩싸여 힘을 토한 것이다.
“저걸 어찌하나…….”
고민과 함께 한 가지 방법이 떠오른다.
‘가능할까?’
의문은 잠시, 황준우의 신형은 이미 전방을 향해 달려나가고 있었다. 발밑에서는 황금빛 강기 장막이 흘러나와 거대한 힘을 품은 화염구를 순식간에 휘감아 버린다. 한데 어찌나 그 힘이 강렬한지, 황금빛 강기가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조금만 참아라.’
마음속으로 읊조린 황준우의 발끝이 곧 터질 듯 흔들리는 화염구를 강하게 차올렸다.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우내십존 중 한 명인, 폭존 오태악이 만든 열양강기가 황금빛 강기에 둘러싸여 마치 축국에서 사용하는 공처럼 하늘로 날아오른 것이다.
힘을 버티지 못해 완전히 새빨갛게 변한 황준우의 황금빛 강기는, 마치 작은 태양과도 같아 보였다.
“수고했다.”
황준우는 그를 바라보며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허공에서 폭발이 일어나며 뜨거운 열기가 지면까지 강타했다.
무공이 조금 낮은 무인의 경우 살결이 조금 따갑다고도 느꼈지만 딱 그 정도일 뿐.
주변을 모두 집어삼킬 것 같던 열양기가 그렇게 허망하게 사라졌다.
“뭐……?”
분노라는 감정에 휩쓸려 모든 힘을 쏟아 낸 오태악의 두 눈이 격렬하게 떨렸다.
“믿을 수 없겠지만 이게 현실이야.”
그 정면에 선 황준우가 수왕검을 뽑아 든다.
“넌 제법이지만, 그래도 제일은 못 된 거지.”
검극이 오태악의 목젖을 향했다.
겉으로만 보기에는 완연한 황준우의 승리다.
하나 아직 오태악의 두 눈에 담긴 투지(鬪志)가 남아 있다. 아직 끝이 아니다. 황준우는 싱긋 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보여 줄 게 있으면 빨리 해 봐. 나름 기대하고 있거든.”
남궁세가에서 만났던 원원괴존의 경우는 무엇도 보여주지 못한 채 쓰러졌지만 천마 용중호는 달랐다. 그는 천마신검을 가지고 있었고, 그를 통해 생각 이상의 무공을 보였다. 진무영 역시 이름 모를 명력의 무기를 가지고 있다.
오태악이 믿고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런 종류다.
황준우는 그 힘이 보고 싶었다.
전장은 방금 전의 사태로 순식간에 소강(小康)되었다. 두 사람의 전투가 감히 넘볼 수 없는 경지에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는 탓이었다.
“기왕이면 확실하게 꺾어야지 뒷말이 안 나올 테니까.”
“……후회하게 해 주마. 폭렬단은 전원 물러나라!”
망설이던 오태악이 이를 아득 물며 품에서 강철로 된 상자를 꺼내 들었다.
주춤하던 폭렬단 무인들은, 그 모습을 보더니 사색이 되어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무기가 아니네?’
황준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나 곧 납득했다.
명력을 가진 도구 혹은 보패가 꼭 무기의 형태일 필요는 없다. 늠군의 관도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환 왕관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저 상자 자체가 보패?’
하지만 상자에서는 영험함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사색이 되어 달아나기 시작하는 폭렬단원들을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다.
오태악은 떨리는 눈빛으로 그 상자의 뚜껑을 열어젖혔다.
내부에서 꺼내 든 것은 붉고 작은 단환이다.
한데 뜨겁다.
단순한 착각은 아니었다. 단환이 상자를 벗어나는 순간 황준우의 살결에 맞닿는 열기가 느껴졌다. 이 자리에 모두가 그렇게 느꼈다. 오태악은 그것을 망설임 없이 한 입에 꿀꺽 삼켰다.
즉시 오태악의 몸에서 하얀 김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크으으…….”
신음을 흘리는 오태악의 전신이 붉게 달아올랐다.
스스로가 내뿜는 강렬한 열양강기에도 꿈쩍도 않던 그의 미간이 크게 일그러졌다.
“다들 전력으로 달아나!”
황준우는 그때서야 열화궁 무인들이 기겁을 한 이유를 알았다. 지금 오태악이 억누르고 있는 힘은 화염구 때보다 더 격렬하다.
적, 아를 가리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주변을 완전히 파괴할지도 몰랐다.
다급한 목소리에 달려오던 만금장 무사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남궁세가는 기세에 밀려 저도 모르게 뛰기 시작했다.
바얀테무르를 비롯한 초원전사들은 이미 그보다 빨리 말을 몰아 달아나고 있었다.
동물들이 거대한 자연재해가 다가올 때 몸을 숨기듯, 그들 모두가 본능적으로 오태악이 있는 반대 방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크아아-!”
이윽고, 고통을 견디지 못했는지 비명과 같은 괴성과 함께 거대한 불의 기파가 터져 나왔다.
엄청난 폭발이었고, 그야말로 불의 축제가 시작되었다.
사방 곳곳, 시선이 닿는 모든 곳에 뜨거운 불길이 자연스럽게 솟아나기 시작했다.
오태악이 직접적으로 열양강기를 뿌린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가 숨을 쉬는 것만으로 화염이 허공에 넘실거렸다.
온 세상이 순식간에 붉은 화염으로 뒤덮였고, 그 중심에 선 오태악은 거대한 불의 화신(化身)이 되어 있었다. 더 이상 그는 오태악이라 부를 수도 없을 터였다.
그야말로 화염 그 자체.
완연한 불의 존재로 화한 오태악이 타오르는 눈동자로 황준우를 내려다보았다.
커다란 폭음과 함께 황준우와 오태악이 서 있던 지역 일대에 거대한 불의 기둥이 솟아났다.
걸음이 느리거나, 혹은 의문을 느끼며 뒤를 돌아보던 무인들이 그 불길에 휩싸여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한 채 사라져 버렸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열기는 대지를 녹이고, 주변을 집어삼킨다.
높은 정상에서 두 사람의 싸움을 바라보던 진무영은 재빨리 호신강기를 펼치며 저도 모르게 앞으로 뛰쳐나가려는 걸음을 막아야만 했다.
아직, 아직 아니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이 정도로 황준우가 쓰러질 리는 없다.
알고 있었고, 믿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이 떨리는 것은 또 어쩔 수 없었다. 가빠지는 숨을 달래기 위해 가슴을 몇 번이나 쓸어내린 진무영의 눈이 차갑게 변했다.
‘열화궁주, 이런 걸 숨기고 있던 겁니까?’
아주 젊은 시절부터 진무영은 보패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다. 때문에 신화적, 고대적 존재에 대한 진실에 집착하기도 했다. 오태악이 삼킨 붉은 단환은 그런 존재와 연관되어 있는 물건이 분명했다.
짐작 가는 바도 있었다.
“진화옥(眞火獄)…… 설마 실제로 존재할 줄이야.”
믿기 힘들지만, 눈앞의 펼쳐진 광경은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성영대왕(聖?大王) 홍해아(紅孩兒)의 삼매진화(三昧眞火)가 다시 현실에 재림(再臨)한 것이다.
홍해아의 삼매진화는 그 대단하다는 미후왕(美?王)조차 도저히 손쓸 도리가 없어 관세음보살에게 부탁해 사해(四海)의 물을 모두 옮길 수 있는 정병(淨甁)을 이용해서야 간신히 진압한 무시무시한 불이다.
허구(虛構)로 만들어진 이야기 속에서 말이다.
하나 그 모든 이야기가 거짓만은 아니었다.
또한 누군가가 당시 힘겹게 꺼트린 삼매진화의 불씨를 일부 모아 작은 단환 형태의 감옥에 가두었다. 언젠가 쓰일 일이 있을 것이라 믿으며 말이다.
진무영이 알고 있는 진실은 여기까지였다.
누가 그 진화옥을 만들었는지, 왜 잃어버렸는지, 마지막으로 어찌하여 그것이 오태악의 손에 들어가 있는지는 그조차 알지 못했다.
기실 그 위력조차 예측만 했을 뿐 명확히는 몰랐다.
한데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저 불길에 휩싸인다면 진무영이라고 하여도 몸 성히 나오지 못한다.
고작 일부에 불과하다고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완전했을 때는 전설 속 존재인 미후왕조차 기겁하게 했던 삼매진화인 것이다.
그 중심에 서, 타들어가는 옷자락을 바라보는 황준우 역시 계속해서 헛웃음을 토했다.
“허허, 허허허. 이것 참.”
조율의 힘을 사용하여 끊임없이 흩어내도 사방에서 몰아치는 열기에서 옷을 보호하는 것조차 무리다. 용중호와 싸웠을 때처럼 상대의 힘 자체를 흩어낼 여력이 있을 리가 없었다.
“대체 뭘 처먹은 거야.”
저도 모르게 흘러나오려는 욕지기를 삼킨 황준우는 거대한 불의 존재가 되어 우뚝 선 오태악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살아 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눈과 코, 입을 통해 불을 뿜어내고 있었지만 직접적으로 황준우를 어찌하지도 않았다. 스스로의 화기(火氣)를 견뎌 내는 것이 전부란 뜻이다.
황준우는 그를 무심히 바라보았다.
“이걸 어찌한담. 오래 끌면 벌거숭이 상태로 나가겠는데.”
조율의 힘을 이용해 흩기에는 화기가 너무 강하다.
오행 중 하나인 수(水)의 힘을 강제로 잡아 당겨도 보았는데 불길은 더욱 거세지기만 할 뿐이었다.
몇 가지 방법을 고민해 보았지만 역시 해답에 가까운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래도 불은 물로 끄는 게 제일 빠르지.”
조금의 물쯤이야 삼켜서 소화해 버릴 정도라면, 배가 터질 정도로 먹여 주면 된다.
문제는 황준우 본인을 보호하기 위하여 조율하기도 바쁘다는 것인데, 그 역시 해결책이 어렵지 않게 생겼다.
품에 가지고 있는 늠군의 관이 어째서인지 기쁜 듯 날뛰며 상단전의 길을 광활하게 넓히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꽤나 위기였음에도 불구하고 황준우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상단전이 하늘과 닿을 듯 개방되며 느껴지는 해방감은 감히 이루 말할 수 없는 정도.
지금이라면 할 수 있다.
전왕과의 대화를 통해 불현듯 찾아왔던 작은 깨달음의 갈피.
기본적으로 술을 발동하듯 내력을 끌어올려 조형을 시작한다.
순식간에 황준우의 눈앞으로 감괘(坎卦)의 형상이 떠올랐다.
“네가 좀 도와줘야겠다.”
그런 감괘의 형상에 수왕검을 올려놓았다.
떠오른 수왕검이 감괘에 반응하듯 몸을 떤다.
이 상태로 팔괘술을 발동한다면, 또 얼마 지나지 않아 허망하게 사라질 것이다. 이런 화기에 덮인 상태라면 애초에 생성조차 안 될지도 모른다.
때문에 황준우는 마지막으로 심호흡을 한 뒤, 조율을 멈추었다.
화르륵-!
기다렸다는 듯 화염의 뱀이 황준우의 옷을 순식간에 집어삼키기 시작한다.
하나 황준우는 차분한 눈으로 그러한 조율의 힘을 조형된 감괘에 반강제로 떠밀어 넣어 버린다.
본래라면 힘들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완연하게 열린 상단전은 황준우가 상상으로만 떠올렸던 수많은 경우의 수를 모두 가능하게 만들어주었다.
우우웅-!
허공에 투명하게 형성되었던 감괘의 모습이 푸른빛으로 선명하게 떠올라 수왕검을 감싸기 시작한다.
‘성공이다.’
황준우는 활짝 웃으며 거대한 불의 주최지인 오태악을 바라보았다.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으나,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거대한 물의 기운을 품은 수왕검이 푸른 꼬리를 남기며 불의 화신의 형상을 한 오태악의 미간을 향해 날아간다.
‘이건 수룡(水龍)으로 하자.’
황준우가 그를 감상하듯 바라보며 결정하였고, 동시에 수왕검을 감싸고 있던 기운이 거대하게 찰랑이는 푸른 용의 형상이 되어 입을 크게 벌렸다.
크아앙-!
그러자 실제로 용이 포효했다.
‘수왕, 네가 우는 거냐?’
황준우의 마음속 질문이 끝맺을 무렵.
수룡의 날카로운 이빨이 오태악의 미간을 꿰뚫고 화염의 벽마저 길게 관통한다.
짧은 정적이 일고.
콰드드득-!
불의 화신이 몸을 비틀며 입을 열었다.
소리 없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거대한 불의 화신이 사라진다.
화염의 벽이 무너진다.
황준우의 소매와 바지 자락을 모두 집어 삼킨 화염의 뱀이 순식간에 모습을 감춘다.
이윽고…….
지면에 무릎 꿇은 오태악이 무너지며 핏물을 쏟았다.
“쿨럭…… 대체 네놈은…….”
마지막 유언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한 오태악의 두 눈이 흐릿하게 흩어졌다.
불이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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