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163화
제 163화
“어젯밤에도 한 명을 잡았다고 했지?”
“예. 놈 역시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하후령은 어딘지 자존심이 상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바얀테무르가 자신보다 하나라도 앞서 나갔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승부욕이 강한 성정의 그녀가 이번에는 바얀테무르를 적수로 삼은듯했다.
실상 전쟁 중에 그와 같은 감정의 격동은 좋지 않다. 전공을 높이고자 하는 과한 마음이 성과를 거둘 때도 있지만 대다수 악효과로 돌아오는 탓이다.
하나 오태악은 그 사실이 나쁘지 않다 생각했다.
‘경쟁 상대가 있다는 것은 서로를 향한 좋은 자극이 되겠지.’
자신이 속한 위치 때문에 다소의 정치 감각을 갖추었지만 오태악의 본질은 무인, 그중에서도 과격파에 더 가까웠다.
무인에게 있어 자극을 주는 경쟁 상대란 늘 옳다는 것이 오태악의 지론이었다.
“하면 평지는 피하려 하겠군. 괜찮겠나?”
오태악이 바얀테무르를 보며 말한다.
“평지에서 회전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설령 지대가 좋지 않다 한들 상관없습니다. 우리 초원 전사들은 중원에 들어온 이후 어느 상황에서도 적응할 수 있도록 단련했습니다.”
“좋은 자신감이로군. 그렇다면 보자, 적들이 회전 장소로 선택할 만한 곳은…….”
“아마도 이곳이 아닐까 합니다.”
바얀테무르의 검지가 곽산현을 짚었다.
“낮지만 산이 있고, 호수도 있습니다. 또한 안휘의 입구와 가까우니 침략 당했다는 기분도 크게 들지 않을 겁니다.”
“전자는 알겠는데, 후자는 무슨 말이지? 쓸데없는 말을 덧붙여 혼동을 주지 마라.”
하후령이 의아한 듯 바얀테무르를 향해 쏘아붙이듯 말했다.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남궁세가는 북방까지 이름이 알려진 중원의 거대 가문입니다. 그런 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열화궁이라는 이름은 그리 가치가 높지 않지요.”
“이놈이!”
“옳은 말이다.”
하후령이 흥분하는 동시에, 오태악도 거친 콧김을 내뿜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불쾌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임을 잘 알고 있는 탓이었다.
“옳은 말이지만, 그런 발언을 한 것에 명확한 이유를 대지 않는다면 참을 수 없을 이야기로군.”
“폭렬단주께서 후자의 연유를 물으신 탓입니다. 남궁세가는 자신들이 강호 최대의 집단 중 하나임을 보증하고 싶고, 현재 이 전쟁에는 세간의 시선이 몰려 있습니다. 비교적 인지도가 부족한 열화궁에게 집 안마당 깊숙한 곳까지 내어 주었다는 평은 결코 듣고 싶지 않을 것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일리가 있다! 하지만 앞으로는 언동을 주의했으면 좋겠군.”
“죄송합니다. 아직 명(明)에 익숙하지 않아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오태악은 성난 콧김을 내뿜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방금 전 바얀테무르의 말은, 처음 오태악이 남궁세가는 회전을 피하지 않을 이유와 일맥상통했다.
“결국 자존심이 우선인 어리석은 녀석들이란 거지.”
지도의 곽산현을 검지로 몇 번이고 두들긴 오태악이 진한 미소를 지었다.
“좋다. 단숨에 가서 놈들을 짓밟는다. 우리 열화궁이 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자.”
“물론입니다. 놈들은 뜨거운 지옥불길의 맛을 보게 될 것입니다. 후후.”
하후령이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답했다.
반면 바얀테무르의 표정은 오묘했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몇 번이고 입술을 읊조리던 그는 결국 침묵을 지켰다.
계속해서 열화궁이 나아가기 시작했다.
결국 두 세력은 곽산현의 초입을 접점으로 서로의 기수(旗手)를 맞이했다.
먼저 도착해 산의 정상과 산 아래에 진영을 펼친 측은 남궁세가였다. 그들은 열화궁의 등장에도 여유롭게, 또한 도도하게 스스로의 무게를 과시하듯 조금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거대한 집단이 마치 하나가 된 듯 응집되어 있는 그 모습을 바라보는 바얀테무르의 미간이 자연스럽게 찌푸려졌다.
“생각만큼 쉽지는 않겠습니다.”
그는 전쟁을 많이 겪어 보았다.
때문에 적에게서 느껴지는 기세를 명확히 읽어 내고는 했는데, 지금 남궁세가의 모습에서는 그 힘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싸우고자 하는 의지, 이기고자 하는 마음, 하나 된 응집력은 때론 전투의 상식을 뒤집고는 한다.
바얀테무르의 신음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생각보다 더 강하다. 갑작스럽게 약한 소리를 하다니, 초원 전사답지 않군.”
오태악은 코웃음을 쳤다.
그의 눈에 보이는 남궁세가의 모습은 고고함을 유지하는 선비의 자태밖에 되지 않았다.
“전투는 폭력이다. 무거운 엉덩이와 고고함이 승리를 가져다주지는 않지.”
“…….”
바얀테무르는 또다시 무언가를 말하려다 입을 닫았다.
‘열화궁주는 이성보다 본능에 의하여 움직이는 인물이다. 적을 눈앞에 두고 흥분한 이 시점에 있어 내 의견은 귀에 들어오지 않겠지.’
조언이라고 뱉은 말은 쓸데없는 자극이 되어 판단을 더 흐리게 만들 수도 있다.
“오늘은 휴식을 취하고 내일 곧바로 회전에 들어간다. 걱정 말거라, 초원의 전사여. 전투의 신은 강자에게 미소를 지어 주는 법이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결국 바얀테무르는 묵묵히 고개를 주억였다.
대신하여 뒤로 한 걸음 물러나 자신의 수하들에게 북방의 언어로 또 다른 지시를 내렸다.
“분명 매복이 숨어 있을 것이다. 놈들의 위치를 파악해라.”
“찾은 이후에는 모두 죽입니까?”
“아니, 우선 보고를 하도록.”
“아쉽군요. 알겠습니다.”
바얀테무르의 명에 입맛을 다신 초원 전사 일백이 말 머리를 돌렸다. 오태악 역시 그 모습을 보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그는 바얀테무르를 비롯한 초원전사들을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무조건적인 복종을 강요하지 않았다.
폭렬단을 대할 때와는 엄연히 다른 태도다.
바얀테무르에게는 그 생각이 뻔히 보였다.
‘선을 긋고 싶은 것이겠지.’
또한 되도록 초원전사들의 손을 빌리지 않고 승리하겠다는 마음도 있을 터였다.
그가 그토록 남궁세가를 향해 비웃음을 보인 자존심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칸께 최대한 빚을 지고 싶지 않다는 뜻인가.’
손은 벌렸지만 온전히 의존하지는 않겠다.
바얀테무르는 오태악을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열화궁이 부족하다고도 여기지 않았다.
다만 소문의 남궁세가가 이름값을 한다고만 생각했을 뿐이다.
그렇게 첫 번째 밤이 지났다.
바얀테무르가 떠나보냈던 백 명의 기마병이 모두 돌아왔다.
“인근 마을에 주민 혹은 행인을 가장하여 무림인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남궁세가의 매복자들이 분명합니다.”
정찰대를 이끌었던 부관의 보고에 바얀테무르의 입가로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그랬군.”
몰랐다면 모를까, 알면서도 당해 줄 필요는 없다.
바얀테무르는 지체 없이 오태악의 막사를 찾아가 그러한 사실을 말해 주었다.
“매복이라. 귀여운 짓을 하는군.”
이미 사실을 알았으니 그를 정면으로 부숴 버리는 것이 기실 오태악의 취향이었다.
하나 바얀테무르는 달랐다.
“제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말해 봐라.”
매복을 찾아낸 전공을 생각하여 오태악은 이번만큼은 바얀테무르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그렇게 한 시진에 가까운 대화 끝에 최종적인 전략(戰略)이 결정되었다.
하룻밤이 흘렀다.
아침 해가 뜨고 맑은 하늘이 눈에 보이는 진시(辰時) 무렵, 오태악은 정상의 남궁세가가 훤히 보이는 가장 최전방에 서 폭렬단과 바얀테무르를 따르는 초원전사를 둘러보았다.
빠른 행군에 지쳐 보였던 그들의 얼굴에는, 하룻밤의 휴식 동안 제법 화색이 돌아와 있었다. 야전이라 하여 투정을 부릴 만큼 약한 이는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어젯밤에는 다들 푹 쉬었는가?”
폭렬단 전원이 하나가 된 듯 거대한 함성을 토했다.
고작 이백에 불과한 숫자였지만 내력이 섞여 땅을 떨리게 만들 정도의 거대한 음성이다.
“초원 전사들도 준비됐는가!?”
“물론입니다!”
“우와아!”
“전투를 한다! 승리한다!”
바얀테무르가 외치자 뒤를 따라 일천의 기마병이 폭렬단에 뒤지지 않겠다는 듯 함성을 높인다.
그를 흡족한 표정으로 바라본 오태악이 검지로 남궁세가의 기수를 가리킨다.
“보아라, 뜨거운 대지의 용사들이여. 저 배부른 중원의 돼지들이 잔뜩 겁을 먹은 채 제 어미 젖 무덤을 닮은 낮은 산에 엉덩이를 붙이고 몸을 웅크리고 있구나. 얼마나 불알이 쪼그라들었으면 유일한 기회인 어젯밤에도 고개 한 번 내밀 생각을 못 했겠는고?”
“푸하하!”
“겁쟁이 새끼들!”
오태악은 능청스럽게 남궁세가를 향한 모욕을 내뱉으며 아군의 사기를 끌어올렸다. 폭렬단도, 그 의미를 드문드문 알아들은 초원전사들도 하나가 된 듯 웃음을 흘리며 기세를 일으켰다.
“저들은 남궁세가다. 겁쟁이지만 약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우리는 열화궁이다. 초원의 전사들도 마찬가지다.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가, 용감하고, 또한 강하다.”
“우와아아-!”
함성은 이제 하늘을 찌를 듯 더 높아졌다.
어느덧 폭렬단 무인들과 초원전사들이 하나가 되어 목소리를 높인 탓이다.
‘과연, 전술에는 부족함이 있을지 모르나 전방에서 전선을 이끄는 장군으로서는 최상(最上)이다.’
오래토록 전장을 전전한 바얀테무르는 오태악의 선동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 이만큼에나 가슴에 불을 지펴 놓을 수 있는 장수는 초원을 비롯하여 황실의 군부에도 많지 않다.
단순한 말솜씨의 문제가 아닌 탓이다.
적들을 이기겠다는 의지, 싸우겠다는 투지, 용기, 이끄는 자의 위엄!
그 모든 것이 지금 오태악의 전심을 휘감고 있었다.
“나가자, 가서 싸우고, 어젯밤 아쉽게도 마시지 못했던 술을 대신해 적들의 피를 마시자!”
“피! 피! 피!”
초원전사들의 광란이 시작 되었다.
그들은 유독 피와 전투라는 단어를 좋아했다.
“혹여 고기가 필요하다면 적들의 살을 뜯어라!”
의도한 것이 분명한 언사를 던진 오태악이 시선을 돌려 산 위에 집결한 적의 병력을 향해 주먹을 내뻗었다.
“가자. 용맹한 용사들이여. 적들의 육체와 심장을 불태우자!”
그 말과 함께 오태악이 누구보다 앞서 전방을 향해 뛰어나갔다.
우와아아-!
엄청난 함성과 함께 열화궁의 진군이 시작되었다.
“적이 옵니다.”
“공격이 시작됐습니다!”
정상에 서, 엄청난 기세로 밀고 올라오는 적들을 바라보는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다급한 음성을 흘렸다. 당황한 와중에도 큰 흐트러짐이 없는 모습이다.
정상, 선봉대의 지휘를 맡고 있는 남궁호욱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고개를 주억였다.
“기병이 아니라 열화궁이 선봉에 섰군.”
그 최전방에는 우내십존으로 이름 높은 폭존 오태악이 서있었다.
기동력이 좋은 초원의 기마병들이 먼저 들이 닥칠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른 움직임이다.
군부의 전쟁이었다면 곧바로 활을 쏘아 적장을 고꾸라트렸을 터였다. 하나 무림의 전쟁에서 활이란 그리 자주 이용되는 병기가 아니다. 남궁세가와 같이 검으로 이름 높은 가문의 경우는 그 정도가 더 심했다. 애초에 그들은 이 전쟁에 활이라는 무기 자체를 챙기지 않았다.
때문에 선봉이 바뀌었다 한들 남궁세가의 작전은 바뀔 것이 없었다.
“기다리다가 적이 근접해 오면 적당히 싸우는 척 물러나라.”
남궁호욱과 선봉대는 일종의 미끼다.
흥분한 적을 산의 아래에 위치한 본영까지 끌어들이며 뒤편에 매복한 병력과 함께 공격하기 위해 던져 놓은 떡밥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