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162화
제 162화
“움직임이 빠르다는 말씀이시군요.”
고개를 살짝 주억인 사마정이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들었다.
두루마리를 중심에 위치한 넓은 책상 위로 넓게 풀어 놓은 사마정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음…… 지도군요.”
남궁호욱이 신음 섞인 짧은 감탄과 함께 고개를 주억였다. 사마정이 펼친 것이 평범한 지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저 세간에 나도는 지도란 그런 이름으로 불리기 민망할 정도로 엉망진창인 수준이었다. 그저 평평한 지형에 지명을 적어 놓는 정도가 최대랄까?
심지어 그 위치가 정확히 맞지도 않는 것이 대다수였다. 이는 지도 제작자들의 실력이 형편없는 탓만은 아니었다.
세밀한 지형과 정확한 위치를 기록한 지도는 오로지 황궁에서만 취급할 수 있다.
군사 전략적인 품목으로 취급받기 때문이다.
황궁 외의 곳에서 그와 같은 지도를 사용 아니, 제작한다는 것만으로 역모 죄에 해당한다. 사마정이 꺼내 든 지도는 역모 죄에 해당할 정도로 안휘를 비롯한 남기 일대와 주변 지역에 대해 상세히 표현되어 있었다.
“뭘 그렇게 놀라나? 남궁세가 내에 있던 것을 가져와 조금 보강한 것에 불과하거늘.”
사마정의 말에 남궁호량과 남궁호욱이 서로를 번갈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뜬다. 잠시, 침묵 속에 그를 바라보던 사마정이 짧은 웃음을 보였다.
“검제의 처소에서 발견되었다.”
“선대께서…….”
“그런…….”
두 사람이 짧은 신음을 흘리며 다시금 지도를 바라보았다. 조금 놀란 척했지만, 전혀 예상 못했던 일 또한 아니다.
사실 구대문파나 오대세가쯤 되는 곳이라면 몰래 이런 지도 하나쯤은 다들 갖추고 있었다. 걸린다면 역모에 해당하지만, 안 걸린다면 훌륭한 전술 무기가 될 수 있는 것이 지도다.
검과 피를 언제나 곁에 두고 살아가는 무림인의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위험부담을 감수하고라도 꼭 갖추고 싶은 물건 중 하나가 지도인 것이다.
물론 그만큼이나 크게 탐을 내는 물건 중에는 화약도 존재했다.
하나 화약은 황궁의 입장에서 지도보다 더 철저히 관리를 하는 품목이었다.
또한 크게 티가 나지 않는 지도와 다르게 화약은 사용하는 순간 천하에 알려진다.
아무리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의 성세가 하늘을 찌른다 하여도 화약만큼은 절대로 손을 뻗을 수 없는 금기인 이유였다.
“보름 전 의창(宜昌) 일대에서 모습을 보였던 열화궁의 무인들과 기마병들이 어젯밤 무한을 지나친 것으로 확인되었다.”
거대한 지도의 끝 부분, 무한이라 적힌 이름을 두드린 사마정이 고개를 들었다.
“지나치게 빠르군요.”
남궁호욱이 놀란 음성을 흘렸다.
단순히 움직이는 속도의 문제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애초부터 귀주에 영역을 두고 있는 열화궁의 등장이 너무 빨랐다는 뜻이다.
“아무래도 선전포고를 하기 전에 이미 움직이고 있었겠지요. 열화궁주 역시 제법 영악한 인물입니다.”
남궁호량이 검지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고개를 주억였다.
“무신께서 오시기 전에 회전(會戰)은 불가피하겠군요. 여기서 우리가 일부러 시간을 끄는 듯한 인상을 준다면 기껏 끌어올린 사기도 떨어질 테니까요.”
황준우를 위시한 만금장의 군세는 바로 어제 낮에 출발했다. 강소와 안휘간의 거리가 짧다지만 그보다 무한에서 안휘까지의 거리가 훨씬 더 가깝다.
거기다 열화궁의 군세는 기병을 위시하여 빠른 속도로 접근하고 있었다.
지금 이 상태로 움직였다가는 무조건 황준우가 도착하기 전에 부딪친다.
남궁호량의 눈은 빠르게 지도 위의 전장을 훑었다.
“그깟 사기가 문제요? 가문 식솔들에 쓸데없는 피를 흘리지 않는 것이 우선 아닌가?”
남궁호욱이 그런 남궁호량을 향해 혀를 찼다.
드디어 두 사람의 생각이 완전히 갈린 것이다.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권력 다툼을 연출하고 있는 두 사람은, 실제로도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사마정이 부추겼고 두 사람이 가진 욕심이 그렇게 만들었다.
“단순한 사기의 문제 정도가 아니오. 이는 남궁세가의 명예가 걸려 있소.”
남궁호량이 한심하다는 듯 남궁호욱을 향해 혀를 찬다.
“지금 그 말이 가문 식솔들의 목숨을 똥간의 파리같이 취급하겠다는 뜻이란 걸 모릅니까? 명예가 있기 전에 식솔들의 목숨이 있는 것입니다. 다소 무리가 있더라도 회전은 피하는 게 옳소외다.”
언뜻 들으면 남궁호욱의 말에 더 일리가 있는 듯했다. 보이지 않는 허상의 것보다 실리를 챙기자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이 어리석은 아우야! 어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단 말이냐. 네깟 놈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니 그 입을 썩 다물어라!”
“아우는 무슨! 언제 적 이야기를 하고 계시오!? 오히려 가주야말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 아닙니까!? 제 뜻대로 안 된다고 성부터 내고 있으면서 일가(一家)의 수장이라고 목에 핏대를 세운 모습하고는!”
“이놈이 정말!”
“뭐!? 어쩌자고!? 한번 해 보자는 말이오!?”
두 사람이 당장에라도 서로를 향해 검을 뽑을 듯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흘린다.
“참으로 무의미하군.”
한숨을 깊게 내쉰 사마정이 붉은 눈을 빛냈다.
“무신께서 지금 두 사람의 모습을 보았으면 무엇이라 하셨을지 참으로 궁금하군. 아마 둘 중 하나, 쓸모없는 쪽은 죽여 버리고 새로 뽑자고 하시지 않았겠나? 아, 아니지. 그냥 차라리 둘 다 죽여 버리자고 하셨을지도 모르겠군.”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이전과 같은 침묵 수준이 아니었다.
사마정이 화를 내며 기세를 흘리자 주변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은 것이다.
자연스럽게 서로를 향해 기세를 피어 올리던 두 사람이 다시금 눈치를 보며 시선을 흐트렸다.
“큼, 큼. 쥐의 왕이시여. 저는 단지 이 싸움에 세간의 시선에 몰린 것을 걱정했을 뿐입니다.”
“그놈의 세간의 시선…….”
짧게 읊조리던 남궁호욱은 사마정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고는 고개를 재빨리 숙였다.
“아시겠지만 이 싸움은 오랜 평화를 맞이하고 있던 중원에 있어 커다란 파문입니다. 어쩌면 시대의 변화를 알리는 신호가 되기도 하겠지요.”
“시대의 변화라…….”
남궁호량이 내뱉은 말을 다시 한 번 되새긴 사마정이 고개를 주억였다.
“그 중심에 열화궁과 우리 남궁세가가 섰습니다. 믿었던 정의회는 등을 돌렸지요. 그렇기 때문에 더 저는 결코 이 싸움에서 물러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설령 모두가 전장에서 죽더라도 나가서 싸워야 합니다.”
사마정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남궁호량을 바라보았다.
말을 하는 바가 조금 혼란을 가져올 수 있지만, 제법 흐름의 중심을 꿰뚫고 있다. 지금의 싸움이 현재가 아닌 미래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 남궁호욱이 아닌 그가 남궁세가의 가주가 됐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과연…… 그렇군.”
사마정이 남궁호량의 생각에 고개를 주억이며 동의했다.
동시에 남궁호욱의 얼굴에는 난감함이 어렸다.
“하지만 무신께서 싫어하시지 않을까요? 따지자면 남궁세가의 무인 역시 그분의 재산 아닙니까?”
이 상태로는 남궁호량과의 기세 싸움에서 밀리게 된다는 생각에 급하게 내뱉은 말이다.
자연스레 사마정의 입가로 조소가 스쳐 지나갔다.
“모순(矛盾)적이로군. 그토록 식솔들의 목숨을 아껴야 된다고 부르짖었으면서 이제 와서는 그들을 재산이라 부르는가?”
사마정의 말에 남궁호욱의 이마 위로 식은땀이 축축하게 배어 나왔다.
“아, 그것이 무신께서 생각하시기에는…….”
“건방진 놈!”
눈을 붉힌 사마정의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남궁호욱이 어깨를 움츠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네깟 놈이 무엇이기에 그분의 의중을 짐작하고 떠드는 것이냐!”
사마정이 짐승 같은 울음소리를 내며 살기를 피어 올렸다.
“한 번 더 그분의 의중을 마치 내 것인 양 떠든다면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내 직접 네 목숨을 거둘 게야. 알겠느냐?”
“아, 알겠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무신의 사자(使者)시여.”
남궁호욱이 새하얗게 뜬 안색으로 고개를 숙였다.
콧방귀를 뀐 사마정의 시선이 다시 남궁호량을 향했다.
“네 말대로 회전을 준비한다. 처음 말했듯, 우리는 싸워서 이길 방법을 강구해야 할 뿐이다.”
환해진 얼굴의 남궁호량이 고개를 주억이며 지도 앞에 섰다.
“적은 기병부대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전투를 펼칠 지역으로 평지를 선호하겠지요. 때문에 우리는 산 혹은 강을 무대로 싸워야 합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놈들은 강으로 오지 않을 것이다.”
“예. 그렇기 때문에 산입니다. 아까 전 알려 주신 방향대로라면 지금 적은 살짝 북진(北進)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 상태로 진행해 온다면…….”
남궁호량의 검지는 호북을 지나 안휘의 악사, 곽산, 육안을 지나 합비로까지 이어진다.
“최대한 단거리에서 정면으로 부딪치겠다는 모습을 보여 주겠지요.”
“하면 우리의 무대는 정해졌군.”
“예. 곽산현(?山縣)입니다.”
“호수를 끼고 있고 작은 산들이 많군.”
지도에 표시된 곽산현 인근에는 높은 산은 보이지 않았다. 작고 가파른 산의 집합이랄까. 확실히 평야보다는 유리한 지형이었지만 능숙한 기병들은 쉽사리 오르내릴 수도 있어 보였다. 무엇보다 삼천이 넘는 무인들이 진형을 펴기에도 너무 좁아 보였다.
“굳이 산 위에 전 병력을 배치할 필요도 없습니다. 산의 바로 아래편에 진영을 만들고 정상에는 정찰 겸 만약을 대비한 선발대 정도의 인원만을 남겨 두면 될 것 같습니다.”
“기병들이 빠르게 오르고 내릴 수도 있을 텐데?”
말의 발은 어지간한 무인보다 빠르다.
사마정의 염려에 남궁호량이 웃음을 보였다.
“기병들이 오르내릴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만, 우리는 그 편을 노려 보지요. 본진이 아닌, 적이 진군해 올 지역 측에도 병력을 숨겨 두는 겁니다. 그렇게 적의 방심을 유도해서 산을 오르게 한 후 뒤쪽에 배치해 두었던 매복 병력으로 급습하는 거지요.”
“앞에서 버티고 뒤편에서 포위하여 치는 방식인가.”
결국 포위된 적은 기병의 장점인 기동성을 살리지 못하고 전멸하게 된다.
나쁘지 않아 보였다.
“좋아. 우선 곽산으로 이동하자. 이후 어떻게 해서 병력을 숨길지 생각해 봐야겠군.”
사마정이 승인하고, 어깨에 힘이 들어간 남궁호량이 고개를 크게 주억였다.
“예. 그러면 빠르게 진군하겠습니다.”
그렇게 남궁세가 측의 작전이 결정되었다.
“남궁세가는 회전을 피하지 않을 것이다.”
오태악이 선언하듯 말했다.
“자존심과 기세의 문제지. 남궁세가라는 이름을 어깨에 진 이상 결코 피하지는 못한다.”
애초부터 피할 것이었다면 먼저 머리를 숙이고 들어왔을 터였다.
오태악의 말을 부정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싸우길 바라겠는가?”
노숙하기에 좋은 넓은 대지 위, 오태악은 펼쳐 놓은 지도를 바라본다. 남궁세가가 가진 것에 못지않은 상세 지도다. 바얀테무르가, 정확하게는 진무영이 그에게 건네준 선물이다.
“적에게는 솜씨 좋은 정보 집단이 협력하고 있다 들었습니다.”
바얀테무르가 입을 열었다.
“이미 초원 전사들에 대해 밝혀졌다고 봐도 무방하겠군.”
“이미 우리 움직임을 읽고 있다고 보는 측이 더 옳을 듯합니다. 오늘 낮에도 꼬리를 쫓던 추적자 둘을 보았습니다.”
“어떻게 했나?”
바얀테무르는 누런 이를 보이며 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죽였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더군요.”
취조 이후 죽였다.
정석이다.
“그렇군.”
오태악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이후 하후령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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