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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159화 (159/373)

학사재생 159화

제 159화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흥, 세간의 시선이 그렇다고 할 뿐. 그깟 남기의 도련님들 따위 무서워할 이유가 없지 않소?”

오태악은 자신만만했다.

남궁세가 측이 오랜 전통을 쌓은 중원의 강자(强者)라면 열화궁은 운남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오랑캐와 맞서 싸워 살아남은 독종(毒種)들이다.

“전쟁이란 단순한 숫자 놀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요. 몇 명이 모였고, 역사가 몇 백 년이 되었고…… 흥. 우습지.”

비록 전통과 역사가 모자랄지언정 그 짧은 시간은 열화궁에게 있어 투쟁의 시간이었다. 그들이 굳이 정과 사 어느 측에도 입장을 표명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일 년의 대다수를 중원 내로 눈을 돌릴 수 없을 만큼 바쁜 나날을 전쟁으로 보내기 때문이다.

‘열화궁의 무인들이 강하다고 해도 궁주의 자신감은 지나치군. 달리 믿고 있는 수가 또 있다는 말인가?’

진무영은 자신만만한 오태악을 바라보며 짙은 눈웃음을 그렸다.

“과연 폭존, 열화궁입니다. 믿음직하군요. 그래도 기왕이면 더 확실한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게 날 찾아온 본론이요?”

바쁘게 남기를 향해 나아가던 열화궁의 행차를 진무영이 갑작스럽게 막아선 후 대화를 요청했다.

애초부터 이번 일이 활협단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의아한 일은 아니었다.

하나 갑작스럽게 찾아올 이유 또한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작은 도움을 드리고자 하는 거지요.”

“필요 없소. 이미 필요한 도움은 다 받았으니 그걸로 충분하오.”

오태악은 고개를 내저었다.

진무영의 도움을 받는다면, 승기를 확실히 붙잡을 수 있을 터였다. 달리 말해 그만큼 진무영에게 빚을 지게 된다.

다급한 성격에 경쟁심이 강한 오태악이지만 그 역시 한 명의 궁주로서 갖춰야 할 정치 감각이란 것이 있었다.

좋다고 무조건 받아먹기만 했다가는 과식으로 체한다는 사실쯤은 잘 알고 있었다.

“부담 가지지 말고 마음 편히 받아 주세요. 이건 제가 빚을 갚는 입장이니까요. 애초에 남궁세가와 싸우게 된 계기 자체가 진시황의 무덤 탓 아닙니까? 궁주께서 얻으신 것은 없는데도 책임감을 앞세워 이리 나서 주신 것 자체가 제게는 빚입니다.”

실제로 진무영이 오태악을 채근하기도 전 열화궁은 행동에 나섰다.

한 번 내뱉은 말은 확실히 지키는 신념과, 급한 성정이 드러난 움직임이었다. 이는 진무영으로서는 썩 만족스러운 행동이었다.

“흠…….”

각진 턱을 부드럽게 쓰다듬은 오태악의 눈이 가늘어졌다.

생각해 보면 진무영의 말 또한 옳다. 이는 이 싸움을 열화궁 홀로 종식시킬 경우 활협단이라는 범 천하적인 단체에 큰 빚을 씌울 수 있다는 이득이 있다.

‘하지만 그 빚이 우리 열화궁 무인들의 목숨 값보다 값진가.’

팔짱을 낀 오태악은 길게 생각할 것 없이 내심 고개를 내저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줄 수 있겠소?”

오태악의 물음에 진무영의 눈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개인적으로 키우고 있던 병력이 따로 있습니다. 그중 일부를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개인적이라 함은 무당파와는 관련이 없단 말이오?”

진무영쯤 되는 인물이 개인적으로 육성하는 세력이 하나도 없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활협단이나, 천하에는 그리 표가 나지 않았지만 숨겨 둔 수쯤은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오태악이기에 놀라지는 않았다.

다만 확신은 필요했기에 되물었다.

진무영 개인이 아닌, 무당파가 일에 개입하게 된다면 많은 것이 복잡하게 변한다. 굳이 무당파의 무인이 속하는 경우는 오태악이 뜻하는 바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무당파의 무공.

모든 문제의 근원이 될 수도 있는 작은 실마리다.

“사문(師門)과는 일절의 관련도 없음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하였지요. 곧 도착하기로 하였으니 직접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곧 도착한다고?”

진무영의 확신 어린 어조에 주억이던 오태악의 고개가 갑작스럽게 크게 돌아갔다.

굳이 집중을 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많은 기척이 다가오고 있었다. 언뜻 느껴지는 수가 일천쯤은 되는 것 같다.

놀란 오태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침 도착한 것 같군요. 직접 가서 보시죠.”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진무영이 대화를 나누던 막사의 장막을 거두며 바깥을 향한다.

뒤를 따라 나선 오태악을 향해 폭렬단 무인들이 고개를 숙인다.

“궁주, 선공(先攻)을 합니까?”

동시에 곁으로 다가온 폭렬단주(爆裂團主), 하후령이 굳은 표정으로 오태악을 향해 물어왔다. 검은 피부에 큰 키, 여성의 몸으로 천하에서 가장 거친 무력단체라는 폭렬단주의 자리에 오른 그녀의 얼굴에는 집념과 투기(鬪氣)가 가득 어려 있다. 오태악은 그런 그녀를 뿌듯한 시선으로 바라본 후, 고개를 내저었다.

“적습이 아니다.”

이어서 그의 시선이 진무영을 향했다.

“지원 오는 병력이 설마 기병(騎兵)이오? 말발굽 소리가 많이 들리는데…….”

인간의 발걸음 소리와, 말발굽 소리는 천양지차다.

바깥으로 나와 귀를 기울인 오태악이 눈을 뜨며 물은 순간이었다.

“왔습니다.”

폭렬단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공터 맞은편의 높은 언덕 위로 먼지구름을 흩날리며 전원 말을 탄 일대의 병력이 등장했다.

처음 그들을 본 순간 느껴진 감정은 단 하나였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폭렬단 전원에 비하여 다섯 배에 가까운 숫자니 당연한 감상일지도 몰랐다.

정신을 차리고 든 두 번째 감상은 얼굴이 제법 낯설다는 점이었다.

중원인으로 보기에는 제법 생김새가 투박하다.

인상 또한 훨씬 더 강렬한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선두에 서 말을 모는 이들의 움직임이 범상치 않았다.

오태악은 그들과 같은 이들을 실제로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나 이야기조차 들어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설마 저들은…….”

“예. 북방 초원의 전사들입니다.”

진무영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는 사이 가파른 언덕을 단숨에 내달려 코앞까지 다가온 기병들의 선두에 선 사내가 단숨에 말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 움직임이 어찌나 민첩한지 지켜보고 있는 폭렬단 사이로 짧은 신음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위대한 칸 게렐을 뵙습니다.”

“칸 게렐을 뵙습니다!”

유창한 중원어로 이루어진 선창에 따른 거대한 후창이 크게 터져 나왔다.

“칸 게렐?”

“저들이 저를 부르는 말입니다. 민망한 이야기지요.”

처음 듣는 명칭에 오태악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반갑소, 바얀테무르. 어찌, 중원 생활은 조금 적응되셨습니까?”

“우리 초원의 전사들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지치지 않습니다. 하물며 중원과 같은 비옥한 땅에서야 여유롭기 그지없을 뿐이지요.”

초원 전사의 한없이 높은 자긍심이 느껴지는 말을 내뱉은 사내, 바얀테무르가 고개를 숙였다.

‘선장, 대체 이 사내는…….’

오태악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진무영을 바라보았다.

언뜻 보아도 자긍심 높아 보이는 전사인 바얀테무르가 진무영을 향해서만큼은 극도의 예를 보이고 있다.

중원을 무시하는 것 같은 발언과는 완전히 상반된 태도다. 그가 북방 초원에도 적지 않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중원을 아우르는 것을 벗어나 세외까지 손을 내밀고 있는가. 무서운 사내여.’

오태악이 심각한 고민에 빠져드는 사이, 초원의 전사들 하나하나와 시선을 맞춘 진무영이 고개를 주억였다.

“좋습니다. 긴말은 필요 없겠지요. 이미 들으셨겠지만 여러분은 이제부터 이곳에 계신 열화궁의 궁주님 그리고 폭렬단과 함께 남궁세가와 전쟁을 치러 주셔야 합니다.”

“전쟁!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바라는 바입니다!”

바얀테무르가 번뜩거리는 눈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명확한 중원어였지만 그를 못 알아듣는 이들은 없어 보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적어도 ‘전쟁’이라는 단어 하나 만큼에는 확실히 반응하고 있는 듯했다.

“전쟁! 전쟁!”

누군가가 목소리를 높이자, 후창이 뒤따른다.

“전쟁이다! 전쟁! 피와, 시체! 우리는 승리한다!”

마음속에 담고 있던 화산을 폭발시키는 듯한 그 목소리에 거칠기로 이름 높은 폭렬단마저 조금은 질린 표정이 되었다.

그를 지켜보고 있던 바얀테무르가 누런 이를 드러내 보이며 손을 번쩍 들었다.

동시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목소리가 단숨에 사그라진다.

일천에 가까운 병력을 손동작만으로 가볍게 제어한 그는 진무영을 향해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하면 우리는 칸을 따르는 겁니까?”

“아닙니다. 저는 이번 일에는 전면에 나설 수 없는 입장이니까요.”

“그러면 저들이 우리를 따르는 것이로군요.”

바얀테무르의 검지는 정확히 오태악을 향했다.

참지 못하겠다는 듯 앞으로 나선 하후령이 불같은 목소리를 뿜었다.

“이 건방진 오랑캐 놈이! 감히 누구를 보고 삿대질을 하는 게냐!”

“약한 여자는 물러서라. 초원의 전사는 약자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는다.”

“우라질 놈!”

하후령의 몸에서 열화기공(熱火氣功)이 폭발하듯 치솟았다.

대지로부터 폭발하는 듯한 굉음이 울리고 양손에 화염을 휘감은 하후령의 검고 우악스러운 손이 바얀테무르의 목을 휘어잡으려는 순간이었다.

기다렸다는 듯 웃음을 보인 바얀테무르가 뒷걸음질 치며 뽑아 든 대도(大刀)를 크게 휘둘렀다.

거칠게 일어난 화염과 강기를 두른 대도가 부딪치며 사방으로 불꽃이 튀겼다.

두 사람의 표정에 동시에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다. 서로의 실력이 만만치 않음을 느낀 것이다.

“네놈의 목을 물어뜯어 주마!”

마치 야수가 된 듯 네 발로 땅을 디딘 하후령이 무섭게 달려 나가 양손을 교차로 휘두른다. 대도를 넓게 휘둘러 또 한 번 그 공격을 막아선 바얀테무르의 입가에 걸친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하하! 나약한 여자치고는 제법이구나!”

살결이 달구어지는 것 같은 뜨거운 감각이 그의 가슴에 불을 지핀다.

자연스레 두 사람의 싸움이 한층 더 격려해지려는 순간이었다.

“킁, 그만.”

내뻗어지는 대도와 몰아치는 열양기(熱陽氣) 사이, 거친 콧김을 뿜은 오태악이 끼어들어 양손을 내뻗었다.

타오르는 화염과 대도, 양측을 어렵지 않게 각자 한 손에 쥔 오태악의 거친 시선이 바얀테무르를 향했다.

“나는 너보다 강자(强者)다.”

“…….”

짧은 말이었고, 단순한 행동이었다.

하나 바얀테무르와 그를 지켜보고 있던 초원 전사들에게는 경악을 안겨 주기에 충분한 모습이었다. 이름 높은 전사인 바얀테무르의 대도를 한 손으로 잡아챌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는 드넓은 초원에서도 손가락에 뽑았다.

무엇보다 오태악의 시선.

바얀테무르를 지나쳐,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서 있는 초원의 전사들에게로 향한 그 눈빛에는 위엄이 있었다.

수많은 무인들 중 정상에 군림한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무림군주의 위엄!

그 시선을 직시한 바얀테무르가 다시 한 번 큰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렇군요. 그대는 초원의 전사들을 이끌 자격을 가진 강자요.”

미련 없이 대도를 허리춤에 집어넣은 바얀테무르가 고개를 숙였다.

그를 지켜보고 있던 일단의 병력 역시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어설픈 중원어가 대다수인 말이었지만, 오태악에게 있어 흡족한 몇 가지 목소리는 분명히 전달되었다.

“진정한 강자!”

“우리는 강자를 따른다!”

그 우렁찬 목소리와 함성 속, 다시 한 번 바얀테무르를 바라본 오태악이 말했다.

“똑똑한 전사로군.”

“바얀테무르는 유능한 전사입니다. 제가 초원에서 만난 인재 중 제일이라고 할 수 있죠.”

대답을 한 것은 바얀테무르의 옆에 선 진무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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