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157화
제 157화
역사적으로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남궁세가와의 거래를 이어 왔던 하오문의 입장에서는 뒷목이 잡힐 이야기였다. 정보라는 것이 때로는 황금보다도 귀하다는 사실을 천하에 내로라하는 군주들은 모두 알고 있다.
남기의 왕이라 불리는 남궁세가 역시 그 가치를 알기에 여태껏 조금 과한 값이라도 돈을 지불하고 하오문과의 거래를 이어 온 것이다.
한데 이제 와서 그 값이 과하다고?
천조회는 다를 줄 아는가?
하오문은 목소리를 높였지만 남궁세가는 코웃음을 치며 다르다고 말할 뿐이다. 값을 지불하는 당사자가 다르다는데, 판매자가 무어라 할 말이 있겠는가?
꼭지가 돌아갈 정도로 화가 난 하오문이었지만 남기 내에서 남궁세가와 전면으로 승부를 하는 미친 짓을 벌이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나기에는 자존심이 상한다.
하오문은 새로운 방법을 구상하며 일단 한 발 물러났다. 대신하여 시선을 돌린 곳은 남기 외의 영역이다. 그러다 천조회가 넓혀 놓은 발이 남기 외에도 꽤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각 지역의 이름난 상인들이 천조회를 지원하는 것이 컸다. 흑도 왈패들을 시켜 훼방을 놓으려 해도, 자산가들이 나서서 그들을 중재시키니 큰 효과가 없었다.
하오문은 마침내 깨달았다.
천조회는 아주 오랜 시간, 그리고 큰 자본을 들여 발호를 준비했다. 그를 통해 성대하게 시작한 잔치가 전부가 아니라는 바를 증명했다.
결국 하오문은 오래토록 자신들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일부를 빼앗겼다.
비웃음을 짓던 세인들은 천조회의 오만을 대범함이라고 바꾸어 부르기 시작했으며, 오랜 시간 군림하며 나태해진 하오문의 방만을 죄로 지목했다.
분노한 하오문주가 입을 놀리는 호사가들을 쫓아다니며 삿대질까지 하며 투닥일 무렵, 천조회로부터 뿌려진 한 장의 전문이 소문의 절정을 찍어 냈다.
긴말은 없었다.
등하불명(燈下不明).
천조회주.
천조회주라는 명칭이 떡하니 적힌 전문에는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전부였다.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게 무슨 일인고 보아하니, 명확하게 하오문을 향한 언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하오문과 같은 기반을 가지고 출범한 천조회는 그 등잔 밑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이들이었다.
또한 하오문은 그 어둠을 눈치채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한 것이다.
자그마치 천하제일을 다툰다는 정보단체가 영락없이 눈을 뜨고 코 베인 셈임을 시사하는 말이니 대대적인 도발이라 할 수 있을 터였다.
하오문은 또 한 번 뒤집혔다.
하오문주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뿌려진 전문을 모두 거두어들이라고 수하들에게 명했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첫 번째 싸움에서는 승패가 갈렸다.
하오문은 이를 갈며 다음 기회를 준비해야 되는 입장이었다.
그렇게 세상이 떠들썩하게 요란스러울 때, 또 하나의 엄청난 소식이 전해졌다.
귀주(貴州)의 열화궁이 남궁세가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너무나 뜬금없는 일이다.
또한 이유조차 명확하지 않았다.
공식적인 명분은 남궁세가가 열화궁의 소궁주(小宮主)를 상처 입혔다는 것이었다.
이 사태로 인해 소궁주는 중대한 내상을 입고 현재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채였다.
물론 남궁세가는 즉시 이를 부인했다.
굉장히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며 열화궁의 치졸함을 비웃었다. 차라리 정정당당히 속내를 보이라는 이야기도 함께 전해졌다.
열화궁은 그에 대해 더러운 위선자들이라는 답변과 함께 먼 귀주 땅에서부터 진군을 시작했다. 폭존 오태악을 비롯한 열화궁 최대의 무력단체라는 폭렬단이 함께였다.
남궁세가는 이를 갈며 어디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답장과 함께 전쟁의 준비에 나섰다.
억지나 다름없는 명분을 욕하며 정의회와 주변에 도움을 요청한 것도 잊지 않았다.
문제는 이때쯤, 내부에서 발생했다.
남궁세가의 삼대 무력단체 중 하나인 무애단(無涯團)의 부단주가 자신이 소궁주를 상처 입혔노라고 대대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나는 얼마 전 가문의 명령으로 귀주로 향하였다가, 열화궁의 소궁주와 만났소. 그리고 우연히 만난 숲길에서 지위에 눈이 먼 소궁주의 방약무인(傍若無人)한 태도에 화를 참지 못하여 검을 뽑았고 큰 상처를 입혔소. 모른 척 넘어가려 했으나 나 때문에 가문이 피를 흘릴 상황에 처하니 마음이 너무 불편하오. 수많은 가솔들과, 가주님께 진심으로 온몸을 던져 사죄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바이오.”
합비 중앙에서 선언처럼 이어진 그 말을 마지막으로, 무애단의 부단주는 제 목숨을 스스로 끊었다.
남궁세가는 경악했다.
어찌 대처할 새도 없이 벌어지고, 끝나 버린 일이었다.
또한 얼마 전 무애단의 부단주가 귀주에 다녀온 바 역시 사실이었다.
유리하던 명분이 상대편으로 기울었다.
참전 의사를 보이며 눈치를 보던 정의회가 뒷짐을 졌다.
흔히 말하는 호인(好人)에 속하는 무인들 역시 남궁세가를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로써 열화궁의 분노와 행보는 지당한 것이 되어 버린 탓이다.
물론 정의회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두 세력 사이에 최대한 피를 흘리지 않게끔 중재를 할 책임이 있었다. 그것이 정의회라는 단체의 존속 이유였으니 말이다.
정의회에 파견 나간 남궁세가의 장로는 계속해서 도움을 요청했지만 현재 공석에 속하는 제갈세가를 제외한 나머지 삼대세가에서는 미적지근한 반응만을 보여 왔다.
세인들은 이 사태의 명분은 소궁주이나, 어쩌면 남궁세가에게 된통 당한 하오문의 복수일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또 누군가는 무애단의 부단주를 의심할 필요가 있겠냐며, 단순 명료하게 남궁세가가 잘못한 일이며 사과를 하면 끝날 일이라고 이야기했다.
다른 의견으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남궁세가의 입장에서는 억울하기도 한 상황이니, 굳이 자존심을 굽혀 가며 사과할 이유가 없다는 말까지도 나왔다.
최근 들어 움직임이 크지 않았지만, 그건 남궁세가가 약한 탓이 아니다.
누가 뭐라 하여도 남궁세가는 오대세가.
그중에서도 가장 비옥한 땅인 남기에 자리 잡은 왕이라 불리는 세력이다.
무애단의 부단주쯤 되는 인물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더 이상 물러날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화궁이 물러나지 않는다면 정, 사 어느 측에도 속하지 않은 중립을 대표하는 세력 중 하나인 열화궁과 정파의 거두인 남궁세가가 일대 회전(會戰)을 치룰 것이다.
그 틈새를 빌어 나온 조심스러운 의견으로는 이 싸움에서 잠자고 있던 검제가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소식도 있었다.
어찌 되었든 이러한 일련의 사태들은 칠야무신이 사라진 이후, 강호무림에 처음으로 던져진 거대한 파문이었다.
그리고 아직 그 파문은 끝나지 않은 채 점점 더 커져만 가는 중이었다.
갑작스러운 열화궁의 선전포고와 병력 이동에 남궁세가가 바빠졌다. 천조회의 발호가 안착되면 자연스럽게 본래 만금장으로 왔어야 할 사마정과 흑백쌍노도 합비를 떠나지 못하게 되었다.
오히려 이제는 황준우가 남궁세가를 향해야 될 입장이 되었다.
처음 이 소식을 사마정의 소식으로부터 전해 들었을 때에는 꽤나 불쾌한 감정을 느낀 황준우였지만 이어진 전왕과의 대화에서는 결국 박수를 치게 되었다.
“소장주님 아니, 주공. 이건 우리에게 있어 기회입니다.”
전왕은 휴가 복귀 이후 근무하고 있던 국자감에 사직서를 내기로 결심했다. 황준우의 진심을 받았으니 그를 따르겠다고 마음을 굳힌 것이다. 물론 그만큼 월봉은 두둑하게 챙겨 주기로 약속한 황준우였다. 자연스럽게 호칭도 무신, 소장주를 너머 주공으로 이어졌다.
“기회?”
잠시 의문을 표한 황준우의 눈이 곧 반짝였다.
“만금장과 남궁세가의 관계 개선에 대한 기회 말이지?”
정확한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느낌은 분명히 왔다.
“맞습니다. 얼마 전 우리가 나눴던 대화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전왕이 크게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였다.
“그렇지. 공통된 적이 필요하다고 했었어.”
“네. 그래서 저는 그런 공통된 적을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을까에 대해 깊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활협단을 흔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몇 가지 방법도 준비해 보긴 했습니다만, 이 순간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었습니다. 열화궁이 알아서 우리를 돕기 시작한 것 아닙니까?”
황준우는 전왕이 먼저 생각했다던 몇 가지 방법도 궁금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지금 당장 열화궁이 우리를 돕는다는 말에 더 관심이 갔다.
“보자. 그러니까 열화궁을 우리의 공통된 적으로 삼자 이거지? 열화궁의 목표는 남궁세가이지만, 어차피 나는 내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나서야 되는 입장이니까 손해랄 것도 없겠네.”
“예. 그 움직임이 남궁세가의 입장에서는 도움으로 보이게 됩니다. 어찌 되었든 하나의 적과 맞서 싸운 전우애가 생기는 셈이지요.”
잠시 침을 삼킨 전왕은 목을 가다듬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니까, 급하게 움직이실 필요 없습니다.”
“뭐? 하지만 이미 열화궁은 움직였잖아. 바로 가야지 준비할 시간이 있지.”
황준우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예예. 우리도 가야지요. 빨리 가는 게 좋죠. 당연한 말입니다. 다만 이름을 업어야 합니다. 그리고 치장을 해야지요. 기왕이면 화려하고, 성대할수록 좋습니다.”
“이름을?”
“예. 소장주님 혼자 가시는 게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해서는 만금장의 이름으로 출병하시는 것이지요.”
황준우는 머리가 나쁜 편이 아니다.
비록 전왕처럼 이런 모략이나, 전략적인 방면에 천재적이지는 못하지만 단서를 던져 주면 생각하고 이해를 할 수는 있었다.
“그렇구나. 만금장과 남궁세가라는 이름 사이에 오래토록 엉켜 있던 원한을 덮기 위해서란 거지.”
원한을 털어 낼 수는 없다.
이미 오래토록 묵은 때는 벗기려 해도 쉽게 밀려나지 않는 법이다.
하나 그 겉을 새롭고 깨끗한 색으로 덮을 수는 있다.
이번 열화궁과의 전투는 그를 위한 첫 번째 걸음이 된다. 그런 만큼 대대적이고 화려해야 한다. 여유롭게 움직이라는 말은 느림보가 되어 달라는 뜻이 아니다.
두 집단 사이에 오래토록 묵으며 썩은 내까지 가득 머금은 이름을 화려하게 덮을 수 있는 준비를 하라는 뜻이다.
언제나처럼 최소한의 인원으로 다급히 움직이려는 황준우의 생각을 읽었다고 볼 수 있는 말이었다.
“아버지와 이야기를 해 봐야겠네.”
어차피 싸우는 것은 황준우 본인의 몫이다.
황석후도 이제 자식의 소유가 된 남궁세가와의 관계 개선에 대해 염두를 두고 있을 테니 큰 부담 없이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다.
“아, 그런데 말이야. 무조건 남궁세가가 좋아하리라는 법이 있나? 아무래도 말이지. 무인이라는 놈들 대다수가 자존심이 보통이 아니거든.”
들떴던 황준우의 눈이 가볍게 가라앉았다.
전왕의 말은 일리가 깊다.
실제로 만금장의 힘이 큰 도움이 되어 남궁세가가 위기를 헤쳐 나가게 된다면 케케묵은 원한을 감싸 안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애초부터 열화궁과의 전쟁이 남궁세가에 있어 큰 위기가 아니라면?
남궁세가는 사이가 안 좋은 만금장에게 쓸데없는 빚을 만드느니 원군을 거절할 게 뻔했다.
혼자서 헤쳐 나갈 수 있는 일에 나섰다가는, 우리를 무시한다며 더욱 화를 낼 여지도 생기는 것이다.
물론 같이 해낸다면 더 쉽기는 하겠지만, 이성적으로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우둔한 무인의 자존심이란 그런 것이었다.
오대세가쯤 되는 남궁세가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때문에 황준우는 걱정이 생겼다.
“그거야 위쪽에서 이해하기 나름 아니겠습니까? 저 같은 아랫것들은 대다수 분위기라는 것에 더 동요하는 법이거든요.”
이번만큼은 황준우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마 그로서는 평생을 모를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약자의 방식을 배우고자 했지만, 언제라도 황준우가 약자였던 적은 없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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