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156화
제 156화
황준우는 그런 전왕을 뿌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또 다른 고민 중 하나를 풀어 놓았다.
“혹시 말이야. 아주 사이가 나쁜, 음 아니다. 대놓고 말해서 남궁세가와 만금장의 관계를 개선시키려 한다면 어떤 방법이 가장 좋을까?”
“남궁세가와 만금장이요?”
생각이 필요한지, 전왕의 눈이 또르르 굴러갔다.
그는 관인들 중 몇 안 되는 무림정세에 밝은 인물이다.
때문에 남궁세가와 만금장, 정확하게는 남궁세가의 사정에 대해서도 꽤나 잘 알고 있었다. 본래는 견원지간(犬猿之間)인 두 세력의 관계 개선은 불가능하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아마 다른 사람이 질문했다면 전왕은 단정적으로 고개를 저었을 터였다.
하지만 질문의 상대가 황준우다. 전왕은 그가 암중(暗中) 남궁세가의 지배자임을 알고 있다.
또한 본질적으로 앞서, 황준우는 만금장의 소장주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 수 있는 최소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둘의 관계 개선이 쉽다는 말은 아니다.
결국 전왕은 고민 끝에 고개를 내저었다.
“……어렵습니다. 머리가 원한다고 해서 손발이 모두 따라 준다면 참 고맙겠지만, 모든 상황에서 그렇지는 않지요. 하물며 사람 마음이야 덜하겠습니까?”
그답지 않은 말이었지만 황준우는 고개를 주억였다.
충분히 이해를 할 수 있는 탓이었다.
“역시 전왕 너도 답이 없다는 말이구나.”
“아아, 아닙니다. 어렵다고 했지만 불가능은 아니에요.”
전왕은 황준우의 답이 없다는 부분을 부정했다.
“불리한 사정이 더 많지만, 우리에게 유리한 이점도 두 가지나 있으니까요. 이걸 잘 이용하면…….”
“두 가지? 첫째는 나도 알겠는데 하나가 더 있나?”
최악의 관계를 가진 둘 사이에서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이점은 황준우가 그 정점에 위치해 있다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전왕은 하나를 더 말했다.
“아, 네. 어쨌든 같은 남기 사람 아닙니까? 물론 그 탓에 둘 사이가 안 좋아진 것이겠지만…… 어찌 됐든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관계 개선에 있어 굉장히 유리한 조건입니다. 같은 지역의 사람이라는 것은 의외로 쉽게 군중심리를 만드니까요. 음…… 이를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통된 적이란 존재입니다.”
황준우는 말없이, 놀란 눈으로 전왕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단순히 눈치 좋고 영리하다고만 여겼다.
유능한 인재라고는 생각했다는 뜻이다.
한데 지금 보니 단순히 그 정도가 아니었다.
전왕의 작은 머릿속에는 생각보다 많은 지혜가 담겨 있는 듯했다.
‘약자의 방식 정도가 아니야. 전왕 이 녀석은…… 이런 방면에 있어 분명 천재다.’
전생의 삶, 황준우는 천하와 싸웠다. 그 덕분에 사상 최강, 최악의 무신이라는 이름까지 얻었지만 끝내 승리하지는 못했다.
결정적인 한 방은 원공이 보여 주었던 미증유의 힘이었지만 결국 그런 상황까지 몰린 것 자체가 문제였다.
말했다시피, 그와 원공은 굳이 적으로 만나지 않았을 수도 있는 운명이었으니 말이다.
어째서일까? 전생에는 황준우는 그저 억울하게 당했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전왕을 보고 있자니 다른 생각이 들었다. 천하와의 싸움은 전투가 아닌 전쟁이다. 그리고 전쟁이란 수많은 역사에서 말해 주듯 단순히 무공의 고하(高下)만으로 결정 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강한 자가 승리한다는 것이 오롯한 진리라면 먼 옛날 삼국시대를 통일했던 이는 조조가 아닌 여포였을 터였다.
여포와 황준우는 어떤 의미에 있어 상당히 많은 점이 닮아 있었다.
둘 모두 한 시대를 풍미하여 무신의 칭호를 받은 최강의 무인이었으나, 수많은 적에게 둘러싸인 채 죽었다. 전왕이 말한 하나의 공통된 적이라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당해 놓고도 몰랐어.’
황준우의 관점에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였다.
누구나 말할 수 있을 듯하지만, 그를 적절한 상황에 꺼내 드는 것은 또 쉽지 않다.
한데 전왕은 그를 어렵지 않게 해낸다.
같은 남기 사람이라는 공통점을 통한 군중심리의 이용.
겁이 많은 새가슴이 전왕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있을 뿐, 마음먹고 움직이기 시작하면 천하의 판도가 바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계속 이야기해 봐.”
말 없는 무거운 시선에, 괜한 긴장을 하며 눈치를 보던 전왕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계속하겠습니다. 아…… 어디까지 했더라.”
한 번 긴장한 전왕의 뇌가 굳는 듯하다.
누군가 신은 공평하다 했던가?
황준우는 무공에 있어서만큼은 굉장한 천재이지만, 거대한 가문의 자본을 능동적으로 운용할 수 있을 만한 재주는 없다. 전왕과 같이 큰 그림에서의 상황을 깔끔하고 간단하게 정리하는 능력도 부족하다.
반면 전왕은 위와 같은 데에 있어 천재라고 부족함이 없는 재능을 갖췄지만, 담이 작다.
황준우는 자신이 그를 메워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책망하지 않아. 화를 낼 이유도 없어. 전왕, 난 지금 진심으로 네 재능이 놀랍다고 감탄하고 있어. 가능만 하다면 얼마의 돈이 들어도 좋으니 너를 당장 황궁에서 빼내어 내 옆에 붙여 놓고 싶은 심정이야.”
황준우의 발언에,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전왕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헤, 헤헤. 저, 저 따위가 뭐 그렇게까지 대단할 게 있겠습니까. 그, 그냥 눈칫밥을 먹고 사는 게 일상인지라…….”
“아니야, 전왕. 엄연히 말해서 넌 천재야. 스스로의 가치를 얕보지 마.”
“…….”
말 없는 전왕의 눈에 수많은 감정이 차오른다.
혼란, 걱정, 그를 넘어서는 감격까지.
황준우는 그런 전왕의 감정을 달래기 위해 여태껏처럼 내력을 운용하지 않았다.
지켜보고 싶었다.
전왕이라는 숨겨진 천재가 이런 때에 어떤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
“저, 저는…….”
여전히 긴장했는지 말의 시작이 반복된다.
“감사합니다.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태, 태어나서 이렇게 기쁜 적은 처음입니다. 누군가에게 이만큼이나 가치를 인정받은 적은 단연코…… 처음이라고요. 처음.”
무언가를 결심했는지 전왕의 두 눈에 빛이 반짝였다.
어느덧 말에는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보잘것없는 몸이지만 이 전왕이 힘이 될 수 있다면 그리해 보겠습니다. 보시는 것이 곧 제가 봐야 될 목표이며, 향하시는 곳을 제 길이라 여기며 따르겠습니다. 일평생을, 이 한 목숨이 다할 때까지 그저 따르겠나이다.”
전왕이 내뱉은 말은 하나의 맹세이자 서약이었다.
혼란을 뛰어넘은 스스로가 찾은 하나의 가치.
겁 많은 성정이 약점이라 하였던가? 물론 사실이다. 하나 마냥 휘둘리는 것만도 아니다. 하고자 하면 해낼 수 있다.
황준우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진심으로 나를 믿고 따르기로 해줘서 고마워. 실망시키지 않을게.”
내심 자신의 아쉬운 말재주가 안타까운 황준우였지만, 전왕에게는 그것만으로 충분한 듯했다.
감격을 가득 채운 전왕의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그러면, 다음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공통된 적으로 가장 좋은 예시는 최근에 있어 소장주님 본인이시겠지요. 하지만 그 전까지는 대체적으로 천마신교가 그 역할을 맡아 왔습니다.”
기나긴 강호 역사에 있어 중원에 자리 잡고 언제나 서로의 영역을 다투던 세력은 정파와 사파가 대표적이다. 서로를 향해 망설임 없이 검을 뻗는 그들이 하나가 되었을 때는 바로 마의 종주 천마신교가 발호했을 때였다.
“하지만 지금의 천마신교는 안 돼. 내가 얼마 전 천마를 죽였거든.”
“그렇습니까?”
전왕은 잠시 당황하였지만 곧 기색을 지우고는 고개를 주억였다.
“그리고 다른 세력으로 혼란을 만들기도 쉽지 않을 거야. 활협단이라고 알아?”
“활협단이요?”
전왕은 무림 정황에 대해 제법 밝은 듯하지만, 깊은 속내까지는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재능의 문제가 아니다.
그만큼이나 그에게 주어진 정보가 적은 것뿐이다.
다행히 황준우는 전왕을 위한 정보를 제법 잘 전달할 수 있었다.
그에게는 뛰어난 정보 집단인 천조회와 모든 쥐들의 왕인 사마정이 있으니 말이다.
“보이지 않게 무림을 지배하고 있는 정, 사, 마의 연합체야. 단주는 무당파의 진무영. 제법 음흉한 편이지.”
“정, 사, 마의 연합체…….”
전왕의 눈이 살짝 흐릿하게 몽롱해졌다.
손은 바쁘게 자신의 짧은 턱수염을 쓰다듬는다.
‘깊은 생각에 빠질 때의 습관인가?’
황준우는 이번에도 말없이 전왕을 기다려 주었다.
약 반 시진.
짧지 않은 침묵이 이어진 뒤 닫혀 있던 전왕의 입이 열렸다.
“아마 소장주님 때문에 생겨난 단체일 겁니다. 언제든 강호 전체를 압도하는 공통된 적이 생길 수 있다는 긴장감이 만든 일시적인 효과에 기댄 허술한 단체인데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는 건 머리가 유능하다고 봐야겠지요. 그 진무영이라는 사내, 한 번 본 적이 있습니다.”
“진무영을 봤다고?”
“예. 제가 남궁세가에서 돌아간 이후 직접 저를 찾아왔었습니다. 누군지는 몰랐는데, 이제 알 것 같네요. 우리 제주께서도 그 활협단이라는 곳에 속해 있고…… 그렇다면 단순한 무림 연합체라고 보기도 힘들 것 같습니다. 황궁의 관리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니…… 쉽지는 않군요.”
황준우가 몰랐던 사실마저 정리한 전왕이 고개를 주억였다.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물론이지.”
남궁세가와 만금장의 규합에서부터 시작한 생각이, 활협단까지 이어졌다.
전왕의 머릿속에는 지금 막 큰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제한된 정보 탓에 한정되었던 생각의 폭이 순식간에 넓어지고 있겠지.
아무리 천재라고 하여도 그를 정리하는 데까지는 시간이 필요한 게 당연했다.
“감사합니다.”
무공 수련을 위해 만금장을 찾아온 전왕은 예상외의 임무를 맡게 되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아 보였다.
표정에는 어딘지 모르게 즐거운 기색이 가득해 보일 정도다.
황준우 역시 전왕을 지켜보며 기대와 즐거움을 동시에 품었다.
남기를 기반으로 쉽게 넘볼 수 없는 성채를 쌓아 올린다. 막연하게 떠올려야만 했던 계획이 전왕과의 대화를 통해 한 발 앞으로 다가온 느낌이었다.
천조회가 남기를 기반으로 정식으로 발호했다.
그리고 강호 전체가 술렁였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새로운 정보단체.
강호에는 비일비재한 사건 중 하나다.
문제는 천조회가 자신들의 정보력이 개방 그리고 하오문에 못지않으며, 남기 내에서라면 오히려 그보다 더 뛰어나다고 선언했다는 사실이었다.
코웃음 칠 일이다. 개방이 어떤 곳인가? 하오문은 또 어떻고? 긴 강호의 역사 내에서 강호의 정보 단체로서 정점에 군림해 있던 집단들이다.
각자만의 영역도 확실했다.
거지와 흑도의 수많은 삼류잡배들.
정보를 접하기에 가장 좋은 위치에 속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바로 개방과 하오문인 것이다.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은 천조회가 시작만 화려할 뿐 얼마 지나지 않아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질 것이라 믿었다.
개방과 함께 천하의 정보단체를 양분한다는 하오문과 천조회의 일전이 있기 전까지만 하여도 그 생각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개방이 아닌 하오문과 천조회가 부딪치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대부분의 새로이 생겨나는 정보단체가 그랬듯 천조회 역시, 흑도의 삼류잡배들과 손을 잡은 것이다.
하오문의 입장에서는 불쾌할 일이나 그 수준이 우습기에 무시하던 일이다. 아무리 그네들이 발악해 봐야 하오문이 가진 천하 전체의 영향력에는 미칠 수가 없던 탓이다.
한데 이번 천조회의 발호는 달랐다.
남기 내에 하오문과 협조하고 있던 흑도 방파와 기루, 도박장 등이 짜고 치듯 동시에 등을 돌렸다. 처음부터 예정되었다는 듯, 그 수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천조회의 품으로 들어가 둥지를 틀어 버린 것이다.
하오문은 당황했다. 또한 분노했다. 당장 남기 내에 사용할 수 있는 영향력을 모두 풀어 배신의 대가를 응징하려 했다.
그때 남궁세가가 나섰다.
남기의 왕.
하오문은 정의회와 자신들 사이의 관계를 빌미로 천조회와의 사건에서 손을 떼기를 바랐다.
하지만 남궁세가는 물러나지 않았다.
그간 하오문이 남궁세가에게 정보에 대한 과한 요금을 징수했다는 것이 빌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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