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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154화 (154/373)

학사재생 154화

제 154화

현재 명나라에는 천민 이하 계급, 노예라 불리는 이들이 몇 없었다.

그 몇 없는 이들도 실질적으로 중원인이 아닌 색목인 혹은 곤륜노가 전부였다.

결국 자신을 지켜 줄 최소한의 영역도 없는 이들이 노예라는 최하의 밑단 신분까지 떨어지는 것이다.

“자세한 사정은 나도 모르겠구나. 그래서 저 친구가 더 신녀님을 따르는 걸지도 모르지.”

“흐음…….”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를 들은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인다.

“어찌 됐든, 여기까지 힘겨운 걸음 하셨으니 식사라도 대접해 드려야지. 잘 먹고…… 돌아갑시다.”

황석후가 스스로 말하고도 우스운지 흐릿한 미소를 그렸고, 오자마자 돌아가야 되는 입장에 처한 경호와 홍산도 짧은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주억인다.

어쨌든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 말이다.

“자, 음식은 최고로 차려 주시오. 우리 만금장의 귀한 인재들이니 말이요.”

자리에서 일어난 황석후가 말했고, 주방에서 바깥을 살피고 있던 주방장이 활기찬 목소리로 말한다.

“장주님의 말씀대로 최고로 차려 드리겠습니다.”

“최고로 차리라고 하신다!”

뒤를 따라 주방 일을 돕는 숙수들이 목소리를 높인다.

조금 난감했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모두가 그 힘찬 분위기 속 미소를 짓는다.

짧았던 서안행.

하지만 남은 것은 적지 않았다.

말없이 상 위에 올려진 늠군의 관을 품에 넣은 황준우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많은 생각을 지우고 즐겁게 떠들기 시작했다.

황석후를 필두로 한 만금장 일행이 모두 집으로 돌아왔다.

오래토록 소식을 기다리던 서시가 누구보다 기뻐했다.

황석후 역시 오랜만에 본 부인을 품에 안고는 미소를 지었다.

황준우와 황서연 두 사람은 부모님의 반가운 재회를 방해할 생각이 없었기에 뒤로 빠져 주었다. 어지간히 금슬 좋은 사이니만큼, 하루 정도는 둘만의 시간으로 보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평화로운 일상이 찾아왔다.

경호와 홍산, 황서연은 여전히 무공 수련에 열중이었다.

얼마 전 무한까지 이어졌던 여정이 가장 큰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황준우 역시 이번 서안행에서 적지 않은 자극을 받은 만큼 더욱더 무공, 그리고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심도 깊은 고민을 시작했다.

우선은 역시 자취를 감춘 마술사와 명력에 대한 아니, 보패에 관련된 부분이었다.

‘마술사 측은 당장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어. 다시 녀석이 나타날 때까지 준비를 하는 게 중요하겠지.’

보패에 대한 대책 부분도 마찬가지였다.

정확하게 보패의 숫자와 종류를 알지는 못한다.

분명한 건 무엇 하나 못지않은 위력을 갖췄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서 가장 확실하게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은 역시 같은 보패를 갖추는 것이다.

자연스레 황준우의 미간이 저도 모르게 살짝 찌푸려졌다.

‘우선 난 싫어.’

도구에 대한 편견이 많이 사라졌다고는 해도, 온전히 끌려 다니는 것은 사양이다. 수왕검이 마음에 드는 이유 역시 온전히 그의 무공을 소화할 수 있는 몇 없는 무구인 탓이다. 늠군의 관을 통한 팔괘술의 수련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만약 언제까지고 늠군의 관에 기대서만 술법을 펼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차라리 거래를 하지 않았을 터였다.

결국 황준우가 추구하는 것은 본신의 무(武)다.

도구가 있다 하여도, 그를 본신으로 소화하는 가정이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는 그가 가진 본성 탓일 확률이 컸다.

‘역시 도구에 완전히 의존하는 건 아니지.’

하나 모든 사람에게 그를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장 목숨이 경각에 달릴 수 있는 상황에 구명을 할 수 있는 도구를 사용하지 못하게 할 이유가 없다. 주변 사람의 소중함을 안 지금의 입장에서야, 오히려 추천해 주고 싶은 일이었다.

설명이 제법 돌았지만 결국 황준우 역시 가능하면 몇 가지 보패를 소유하고 싶었다.

본인이 쓴다는 경우를 제외하면 욕심이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제는 단 하나다.

‘어떻게?’

보패에 대해 알기만 했지 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물건이 대부분이다. 지금까지 얻은 팔괘술법서와, 늠군의 관의 경우는 여러모로 운이 좋게 연이 닿았다.

보패는 되지 못했지만, 능력만으로는 부족함이 없는 청홍검도 마찬가지다.

앞으로도 이처럼 쉽게, 운명처럼 보패와 만날 수 있을까?

황준우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는 말 그대로 운이 좋았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직접 찾아 나서는 방법밖에 없다.

문제는 이미 작금의 무림은 보패에 대하여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황궁 측도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중원천하의 정점에 위치한 이들이 보패에 대한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가만히 있었을까? 그럴 리 없다. 분명 누구보다 눈을 붉히고 찾아 나섰을 게 분명하다.

아마 대외적으로 드러난 보패와 명력이 깃든 도구는 이미 제 주인을 찾아갔을 확률이 높았다.

아마 새로운 보패를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일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탐나는 보패 혹은 못지않은 보물이 가득 있을 장소를 단 한 곳, 황준우는 알고 있었다.

‘진시황릉.’

천마신교가 만들었던 가짜가 아닌 진짜 진시황릉!

황석후가 봉인하였다고 한 그 문 뒤에는 역사를 바꿀 만한 엄청난 보패가 가득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버지가 수명까지 깎아 가며 봉인한 문을 부수고 훔쳐 나오는 건 아니지.’

특히 진시황릉에 있는 보패들 중 몇몇은 주변 일대에 풍수지리에 큰 영향을 끼칠 정도라고 하니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 것이 옳았다.

다행인 점을 뽑자면 오는 길에 황석후에게 물어본 결과, 만금장에도 그런 보패가 몇 가지 있다고 하였다.

황준우는 자세한 종류는 묻지 않았다.

만약 필요한 물건이라 여겼다면 황석후가 알아서 내어 주었을 것이다.

몇 번이고 말했지만, 황준우는 되도록 만금장의 힘에 의존하고 싶지 않았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보패를 제치고 생각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었다.

“역시 돈인가.”

다행히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도 어느 정도 답이 나왔다.

그간 남궁세가가 벌어들이는 돈을 사용하며 비상할 준비를 하던 천조회가 정식적인 출범 준비를 마쳤다. 이제는 어지간한 외압에 무너지지 않을 만큼 탄탄한 구성을 갖춘 상태.

심지어 진무영에게 어느 정도 정체를 들키기까지 했다.

여러모로 보아도 천조회가 웅비(雄飛)할 때가 되었다.

합비에 복귀했을 사마정도 그 사실을 잘 알고,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있을 터였다. 때라는 것이 있으면 그를 따라야 하니, 만금장에 오는 것이 조금 늦는다고 타박할 필요도 없었다.

“몇 가지 문제는 있지만 성채를 올리기에 괜찮은 상황이야. 남궁세가에서 벌어들이는 돈이 다시 남기 시작하겠지. 거기다가 천조회의 수익까지 추가하면…….”

넉넉하지는 않아도 지금보다는 훨씬 더 나은 살림이 마련될 것이다.

이를 통해 새로이 추진해야 될 일은 역시 남기의 통합이다.

몇 번이고 생각했던 일이지만 이런 상황에서 언제까지고 남궁세가와 만금장을 갈라놓을 필요가 없다.

하나로 합쳐 서로의 합의점을 찾아 움직인다면 지금보다 훨씬 큰 효율과 능률을 만들 수 있을 것이야 뻔했다.

숨겨진 것이 더 많은 만금장은 아무렴 상관없던 일이지만 가진 게 남궁세가와 천조회밖에 없는 황준우의 입장에서는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뒤로 미루어 놓았던 만금장과 남궁세가의 합일에 대한 부분을 깊게 고민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싸우는 것이 아닌, 한편이 되는 일.

단순히 입장이 바뀌었을 뿐인데 평소에 그렇게 잘 돌아가던 황준우의 머리가 딱 굳어졌다.

“……어려운데.”

절로 앓는 소리가 나온다.

그렇게 고민에 빠져 있는 황준우의 앞으로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소장주.”

굳은 얼굴을 한 여선위가 한 손에 거대한 방천화극을 든 채 황준우를 내려다보고 있다.

깊은 생각 중이었던지라, 연무장에 기척이 들어오는 것을 느꼈음에도 개의치 않던 황준우였지만 말을 걸어오는 데까지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표두?”

“대련을 요청하겠소.”

가타부타 없는 짧은 말이다.

다행히 황준우는 그다지 말을 많이 나눠 본 사이는 아니지만, 여선위라는 무인을 제법 이해하고 있었다.

‘너무 전형적인 무인 성격이라서 말이지.’

강직하고, 올곧다.

부러질지언정 결코 꺾이지는 않을 사내가 바로 여선위다.

황준우는 그런 여선위가 오래전부터 자신을 피해 다녔음을 잘 알고 있었다.

‘벌써 한 십 년 됐지?’

황준우가 열 살을 넘어섰던 시점부터, 여선위는 자신의 호승심을 억눌러야만 했다.

아마 처음에는 이해조차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주 작은 어린아이를 마주칠 때마다 마음 한편에 들끓는 괴상한 감정.

‘나라고 해도 이해 못 하지.’

물론 그만큼 여선위의 감각이 예리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때문에 황준우를 어려워했다.

올곧은 무인 성정인 그의 입장에서는 아직 약관도 되지 않은 어린아이, 그것도 소장주와 무를 맞대어 본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이제는 못 참겠나 보네. 하긴, 내 나이도 이미 약관이니 오래 참았지.”

황준우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공경, 존중을 바라지는 않겠소. 다만, 전력을 다해 싸워 주시오.”

여선위가 뒤로 몇 걸음 물러나며 방천화극을 겨눈다.

갑작스럽게 무거워진 분위기에 수련에 열중하던 경호와 홍산, 황서연의 시선이 두 사람을 향했다.

“흠…… 여기서 바로 하자고?”

황준우의 물음에 여선위는 묵묵히 고개를 주억일 뿐이다.

애초부터 말이 많지 않은 사내다.

“좋아. 그럼 한 번 해볼까.”

자리에서 일어난 황준우 역시 수왕검을 뽑아 든다.

예리한 검기가 당장에라도 여선위의 전신을 난자할 듯 날뛰기 시작한다.

황준우가 의도적으로 일으킨 심의(心意)다. 심상에 불과하지만, 어지간한 초절정의 무인이라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질지도 모를 정도의 강력한 힘이 깃들어 있다.

여선위쯤 되는 무인에게라면, 제대로 경각심을 심어줄 정도로 충분할 것이다.

혹시나 있을 어린 황준우에 대한 걱정이나 근심을 모두 덜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아직 굳어 있네.’

황준우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올곧은 무인은 곁에 두기에 누구보다 듬직하지만, 이런 데에 있어서는 확실히 답답한 면이 많다.

이제는 제대로 한 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왔음에도 여전히 어린 황준우, 소장주에 대한 걱정과 근심이라는 부담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담담한 듯 서 있는 몸의 근육 이곳저곳이 굳은 게 눈에 뻔히 보일 정도였다.

“이럴 땐 역시, 직접 겪어보는 게 더 좋겠지.”

그 말과 함께 황준우의 몸이 직선으로 길게 뻗어졌다.

놀란 여선위가 방천화극을 휘둘러 역공(力攻)으로 맞서려 했지만 이미 황준우의 검은 그의 턱 끝에 닿아 있었다.

“말 안 해도 알지?”

웃으며 묻는 황준우를 바라보는 여선위의 눈이 격하게 떨린다.

침을 어찌나 깊이 삼켰는지 목울대가 출렁이는 게 훤히 보일 정도였다.

그로부터 전해지는 감정이 또 황준우를 즐겁게 한다.

말하지 않고, 굳이 생각을 떠올리지 않아도 느껴졌다.

싸우고 싶다.

순수한 무의 격돌을 원한다.

오랜만이었다.

‘이 정도로 순수한 투기(鬪氣)를 느낀 게 언제였더라?’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의 먼 과거.

자연스럽게 황준우의 마음에도 싸우고 싶은 욕망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미안하오. 예의는 내가 없었구려. 이번에야말로 진심을 다하겠소.”

“꼭 그렇게 해.”

그 말로 대화는 끝이었다.

콰가각-!

대기를 짓뭉개는 듯한 소리와 함께 방천화극이 황준우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

거대한 무기가 움직인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쾌속!

수왕검이 그 공격을 막는다.

동시에 날카롭게 찔러나가며 역습을 가한다.

초 근접거리에서 중병기인 검은 장병기인 극에 비해 빠를 수밖에 없다.

심지어 황준우의 검은 지금 한 방향을 찔러 들어오는 것이 아니었다.

움직이는 몸과 검은 하나일진대, 실제 예기가 미치는 장소는 열 곳을 넘는다.

언뜻 비추는 환영과도 같은 검기가 모두 진짜라는 뜻이다.

두터운 창대를 이용해서 막기에도 그 수가 많고, 범위 또한 넓다. 미간을 찌푸린 여선위의 입에서 짧은 기합성이 터져 나왔다.

소리는 하나의 기파(氣波)였다.

날카로운 예기를 자랑하던 수왕검이 환영처럼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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