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152화
제 152화
“그 가치도 모르고 함부로 받았다니……. 그만한 대가를 치르지 못했다면 만금장의 가세가 흔들렸을지도 모를 보물을, 쯧쯧.”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어. 너도 오늘 아버지 이야기 들었잖아?”
만금장은 천하제일.
말 그대로 천하제일의 상가다.
그 정도로 많은 돈을 가진 상가가 휘청이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물론 가능할 수는 있다. 앞으로 황준우의 뒤로 한 오대 정도 망나니만 태어나 돈을 흥청망청 쓰며 가문을 망가트린다면 말이다.
“흔들린다고 표현한 것도 그 이야기를 들어서야. 고작 사본이라고 해도 팔괘술법서는…… 그런 가치가 있는 보물이니까.”
아닌 게 아니라, 신아의 눈에도 제법 탐욕이 엇비쳤다.
물론 지상의 신선이라는 명칭을 가진 이답게 그 감정은 빠르게 사라졌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이게 대체 뭐길래.”
“말했잖아. 파의 일족의 술법서라고.”
황준우의 얼굴에 작은 짜증이 어렸다.
“난 그 파의 일족을 모른다고.”
“흐흥…… 아직 공부가 모자란지고.”
“그만 약 올리고 빨리 말해.”
쉬운 상대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강적일지도 모르겠다.
“파의 일족이란, 간단하게 설명하면…… 태호(太?)의 후손이다.”
“태호? 삼황의?”
오늘만 벌써 몇 번째 듣는지 모를 존재들의 이름을 되물은 황준우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도가(道家) 혹은 신화에 대해 열성적으로 공부한 적은 없다. 하지만 신선 위의, 그보다 더 위대한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이 바로 삼황오제.
개중 태호라고 한다면 단 한 명뿐이 없다.
“그래, 천황(天皇) 복희씨(伏羲氏)다.”
신아의 눈이 다시 한 번 진지해졌다.
흔히들 말하는 도가의 신선이란 대다수 도를 닦은 인간, 혹은 무언가가 우화등선하여 탄생한 존재다.
불가(佛家)에 보살 역시 이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었다.
공통적으로 인간이 도를 닦아 이를 수 있는 존재를 지칭하기도 한다.
부처 여래(如來), 신선 중 최고봉이라는 옥황상제, 서왕모를 비롯한 삼황오제는 이들과는 또 다른 규격의 존재였다.
아주 오랜 과거, 태초의 생명이 움직이던 시기에 활동하였던 고대의 신.
이를 달리 일컬을 수 있는 단어는 어디에도 없다.
그들이야말로 달리 지칭할 단어가 따로 없는 신(神)이기 때문이다.
신선 또는 보살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등의 존재.
그중에서도 천황 복희는 제일신(第一神)으로 자주 지칭되는 존재였다.
“너는 팔괘가 어디에서 나왔다고 생각하고 있느냐? 세상이 본래 존재할 때부터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고 믿는 건 아니겠지?”
팔괘, 그러니까 하늘, 땅, 물, 불, 산, 우레, 바람, 늪은 태고의 세상이 창조될 때부터 존재했다는 것이 옳다. 하지만 그를 하나의 원리로 정립한 것은 복희의 팔괘다.
“복희씨가 팔괘를 만들었기에 자연이 정립될 수 있었고, 모든 술법의 근간이 되었다. 여기까지 들으면 대충 이해가 되지 않느냐?”
신아의 물음에 경악한 감정을 추스른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니까 이 팔괘술이란, 모든 술법의 근원이란 거지?”
“역시 머리는 나쁘지 않구나. 결국 팔괘술이란 가장 최초의 술(術)이자, 근원이다. 네가 받은 사본 같은 것이 아닌, 진본을 통해 익힌다면 땅을 뒤집고 하늘을 무너트릴 수 있는 위력을 발휘할 수도 있는 거지. 진짜 팔괘술을 끝까지 익히면 언령조차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
신아가 살짝 웃었다.
“짐작은 하고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본이 우스운 것은 아니다. 애초부터 진짜 팔괘술법서는 천상의 것. 결국 네가 익히고 있는 팔괘술은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술법의 정점에 위치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
“허…….”
신아의 설명이 이어지며 황준우의 긴 탄식이 흘러나왔다.
“제갈량은 대체 내게 무슨 생각으로 이걸 준 거지?”
인면지주의 처리와 내단, 그를 통해 얻은 보상이다.
물론 적지 않은 값어치를 지닌 일을 해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신아의 이야기를 듣자면 팔괘술법서라는 엄청난 보물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 영악한 것 생각을 내가 어찌 알겠느냐.”
콧방귀를 뀐 신아의 눈빛과 분위기가 평소와 같이 돌아왔다.
삼황오제, 혹은 신선들을 이야기할 때에 느껴지던 무게와 공경과는 순식간에 동떨어진 것이다.
“다만…… 악의는 없었을 거야. 그 녀석도 나름의 노력을 하고 있는 거니까.”
“제법 잘 알고 있나 보네?”
황준우의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던 신아가 고개를 주억였다.
“몇 번 봤던 사이다. 그나저나, 나름대로 대가는 잘 치렀나 보구나. 그냥 받아 왔다면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을 맞아 죽었을 수도 있는데…… 뭐, 제갈량이 그 정도도 생각 못 하지는 않겠지. 쓸데없는 걱정이로구나.”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에 맞아 죽을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헛웃음을 지으려던 황준우의 머릿속에 문득, 얼마 전 있었던 끔찍한 사건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설마…… 그때 그…….’
근래 들어 있었던 기억에 남는 최악의 사건. 전왕과의 만남을 떠올린 황준우의 안색이 절로 굳어졌다.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조율경의 고수인 그가 그런 어이없는 상황을 겪을 경우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을 맞아 죽을 확률과 비슷하다고 보인 탓이었다.
“무언가 있긴 있었나 보네.”
신아가 눈을 반짝이며 묻는다.
“별로 이야기 아니, 생각하고 싶지 않아.”
황준우는 고개를 저었다.
“흐흥…… 뭐, 그 정도야.”
평소와 닮은, 하지만 조금 더 의문이 느껴지는 콧소리를 흘린 신아가 눈을 반짝이며 황준우를 바라본다.
“어찌 됐든 안 그래도 입신의 경지에 오른 네가 팔괘술 마저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잠시 말을 끊고, 뜸을 들이는 신아를 향해 황준우가 물었다.
“바라는 게 있는 거지?”
“하나도 없다고는 못 하겠네.”
“번거로운 건 좋아하지 않아. 아버지처럼 무언가를 위해 헌신하는 성격도 아니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소중한 주변을 위한 헌신은 준비되어 있다. 하지만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세상의 평화를 찾아 나설 정도의 대협(大俠)은 아니다. 황준우는 자기 자신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나도 네 성격이 석후와는 다르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 거래를 하자.”
“상인의 자식이지 않느냐. 설마 거래란 말이 어려운 게야?”
“그럴 리가.”
저 조그만 어린아이 입에서 거래란 말이 나오니 조금 괴상한 기분이 들었을 뿐이다.
황준우는 속내를 숨기고는 고개를 주억였다.
“일단 이야기해 봐.”
“팔괘술, 어디까지 익혔느냐?”
“이 정도?”
신아의 거래라는 것을 대충 눈치 챈 황준우가 검지 끝에 광구의 술을 만들었다.
여전히 미약하고 보잘것없는 정도다.
몇 번의 호흡이 지나갈 정도의 짧은 침묵이 흐르고, 바람이 불었다.
그 순간 광구의 술은 마치 촛불처럼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역시 힘드네.”
황준우의 입가로 조금 민망한 웃음이 흐른다.
“흐흥…… 이것 참. 묘하게 즐겁구나.”
“뭐가?”
“예상은 했다만, 너 술법에 재능이 없구나.”
“알고 있어.”
정확하게 말하자면 짐작은 했다.
괴상할 정도의 느린 성취와, 비효율적인 능력.
누가 보아도 재능이 없을 때의 상황이다.
“그런 와중에 상승 술법인 팔괘술을 익히니 더 효율이 안 나올 수밖에 없지. 흐흥.”
“어쨌든 네가 익히면 많이 다르단 거지?”
“익힐 수 있다면 그렇겠다만……. 그 사본은 애초에 네 눈으로 밖에 볼 수 없지 않느냐? 욕심을 낸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보물도 아닌지고.”
“아…….”
황준우는 짧은 감탄을 터트리며 고개를 주억였다.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물은 것인데 예상대로의 답이 돌아왔다.
경호와 홍산, 황서연 등과 마찬가지로 지선인 신아라고 해도 팔괘술법서의 백지밖에 보지 못하는 것이다.
“미리 말해 둔다만, 사본을 기준으로 잡아도 그 술법서의 가치는 상급 보패를 상회한다. 하니 아무리 볼 수 없다 하여도 쉽게 여길 생각은 말아야 될 게다.”
“그만, 그만. 알겠어. 말 안 해도 어차피 소중히 하고 있었다. 조심하는 것 같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완전히 할머니 말투가 다 되었네.”
“그, 그런 적 없다! 흥!”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내저은 신아는 주제를 돌리기 위해서인지 재빨리 품에서 물건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게 뭐야?”
몰라서 묻는 건 아니다. 신아가 꺼내 든 것은 제법 투박하게 만들어진 석관(石冠)이다. 신비한 것은 화려한 장식 하나 없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위엄이 느껴진다는 사실이었다.
못해도 일국의 왕 혹은 그에 버금가는 존재가 썼던 물건임에 분명했다.
“파의 일족의 첫 지배자였던, 늠군(凜君)의 관이다.”
“보패란 거네?”
황준우의 물음에 신아가 고개를 가볍게 주억였다.
“너희 부자처럼 돌려 말하는 건 성정에 맞지 않다. 직설적으로 말해 주마. 이건 보패지만, 네가 여타 알고 있는 것들과는 종류가 다르다.”
“술법에 도움이 되는 물건이다?”
“……어찌 알았느냐?”
몸을 살짝 떨며 놀란 눈을 한 신아의 물음에 황준우가 작은 미소를 보였다.
“굳이 질문을 안 받아도 분위기로 알 수 있는 거지. 심지어 팔괘술과 가까운 파 일족의 첫 왕의 관이라면, 현재 나한테 가장 필요한 물건일 확률이 높고.”
“끙…….”
묘하게 안타깝게 느껴지는 앓는 소리를 낸 신아가 고개를 주억이며 말을 이었다.
“옳다. 내가 이미 언질을 준 바 있지만, 진본 팔괘술의 궁극에 이르면 언령을 부릴 수 있다고 했었지. 하면 팔괘술의 근원은 또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말, 언어로군.”
신아가 빙긋 웃었다.
“이런 재미로 질문을 주고받는 것이로구나. 우둔한 제자 놈과 함께할 때는 몰랐던 일인지고.”
“그렇지.”
“늠군의 관은 네 모자란 재능을 더하고, 말의 힘 또한 북돋아 줄 것이다. 대단한 물건이지만, 사실상 팔괘술을 익힌 사람 외에는 큰 의미가 없는 물건이다. 반대로 말해서 너 같은 경우라면 아주 큰 도움이 되겠지.”
“어, 잠깐. 그러면 그 의미 없는 물건을 넌 왜 가지고 다닌 건데?”
“말했지 않느냐. 팔괘술을 익히지 않은 사람에게 의미가 없다고.”
“너 설마……?”
신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팔괘술을 익힌 것이다.
“깊게는 아니다. 겉핥기 식의 얕은 수준이지. 네 녀석처럼 사본이라고 해도 한 권을 통째로 얻었다면 달랐을지 모르지만 그에 상응할 만한 제물이나 대가를 구하기란 쉽지가 않단다. 설령 있다고 해도 물건을 찾는 것도 쉽지 않고…… 한데 제갈량 고 앙큼한 년이 숨겨 뒀을 줄이야.”
“좋아. 이해했어. 그러니까 넌 그 늠군의 관을 나에게 줄 테니 곤란할 때 곤륜의 일을 도와달란 거네.”
“많이도 아니다. 네가 관의 가치에 합당한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면 당장 그만두어도 좋을 정도의 수준이면 충분하다.”
“흠…….”
황준우는 짧은 신음을 흘렸다.
생각해 보면 나쁘지 않은 거래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좋은 거래였다.
‘물건의 가치를 내 스스로 매겨서 도움을 주면 된다…….’
오히려 그래서 더 불안했다.
늠군의 관이 어떤 보물인지 아직까지는 자세히 모른다.
다만 듣는 것만으로도 팔괘술법서에 못지않은, 어쩌면 더한 보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런 늠군의 관에 합당하는 일을 해내야지만 거래가 종료된다. 언뜻 보면 좋아 보이지만, 불확실한 거래다.
황준우의 표정이 굳는 것을 눈치 챈 신아가 재빨리 손을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