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150화
제 150화
기실 초절정, 그중에서도 최상위에 위치한 두 사람은 무림 전체를 따져서도 상위권에 속하는 실력이었다. 황준우에 의해 각자 일부 능력이 제한되었다 하여도 마찬가지였다.
하나 맞서야 할 상대도 만만치 않다.
‘아니, 오히려 더 강한 놈들이 많지.’
물론 아닌 경우도 있지만 앞으로의 일을 생각한다면 우내십존과 동급 혹은 그보다 조금 못한 정도의 적수를 계속해서 마주칠 확률이 높았다.
무림인의 순서를 줄로 세우고 이야기하는 호사가 중 한 명이 들었다면 제자리에서 펄쩍 뛰며 노호성을 토했을지도 모른다.
그 이름처럼 우내(宇內)에 존재하는 열 명의 존귀한 자들이 바로 우내십존이다. 한데 어찌 그와 같은 이들이 또 존재할 수 있냐는 생각이다. 황준우의 입장에서는 코웃음이 나올 일이었다.
‘애초부터 우내십존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보면 허명(虛名)에 불과하니까.’
물론 그들이 강호 천하를 떨게 할 만큼 대단한 고수라는 사실조차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나 우내십존이라는 말이 완벽히 진리는 아니었다.
큰 예로, 황준우가 현재까지 지켜본 우내십존 중 제일고수인 진무영도 그 안에 이름을 올리지 않는다. 천마 용중호 역시 젊은 시절 우내십존 중 하나였으나, 오히려 실력이 오른 중년 이후로는 빠져나갔다.
딱히 이름을 떨칠 만한 활약이 없는 탓이다.
이처럼 우내십존의 이름을 얻기 위해서는 무공 실력 외에도 명성(名聲)이란 것이 필요한데, 강호에는 그런 명성에 초연한 채, 혹은 어떠한 목적으로 이름을 알리지 않고 제 실력을 갈고닦는 은거고수(隱居高手)가 너무나 많았다.
이들 중 대다수는 전생 황준우가 겪었던 마지막 싸움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실력으로 일렬로 줄을 세운 일만의 무인도 어디까지나 명성을 얻은 자들에 한한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하나 더.
전생 칠야무신의 이름 역시 우내십존에 속하지 않았다.
처음 그의 이름이 빠진 이유는 그가 무인이 아닌 마왕(魔王)이라 불렸기 때문이었다. 신강 너머 십만대산에 자리 잡은 천마신교의 무리조차 뛰어넘는 압도적 악명이 그의 별호에 덧씌워진 덕이다.
그리고 더 세월이 흘렀을 때에는 그는 유일무신(唯一武神)으로 불렸다. 악명을 뛰어넘는 무명(武名)이 알려진 덕이다.
물론 지금의 무림에는 칠야무신 이후 무신의 이름을 얻은 이가 없다.
하지만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분명 존재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은 역시 진무영.
하지만 그는 유일무신의 이름을 원하지 않는다.
우내십존조차도 욕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는 진무영이 전면에 나서기보다 뒤에 숨어 지배하는 것을 즐기는 성향을 가진 탓이다.
‘그런 녀석이 진무영 하나뿐일까?’
일단 겉으로 보이는 바는 그렇다.
실제로 진무영과 같은 성정을 가진 무인은 흔치 않았다. 하나 만약의 경우마저 접어 둘 수는 없었다. 느낀 바 있듯, 현재 무림의 수준은 황준우가 칠야무신으로 활동했던 시절에 비해 월등히 상승했으니 말이다.
결국 이런 근거를 가지고 생각을 정리하면 앞으로 이런 상정치 못한 고수를 적으로 만날 확률은 높았다.
현재 정, 사, 마의 정상에 군림한 활협단과 맞서게 될 테니 말이다.
황준우는 일전에 한 번 떠올렸던 계획을 확실히 밀어붙이기로 결심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사마정, 천조회 진행 상황은 어떻지?”
“남기 내에서는 완벽히 안착했습니다. 덕분에 천하 전체까지는 아니라고 하여도, 오 할 이상까지의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을 정도의 역량은 갖추게 되었습니다.”
갑작스러운 황준우의 질문에 사마정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기대 이상이네.”
황준우는 솔직하게 감탄했다.
합비, 남궁세가라는 날개를 얻은 천조회는 그간 파죽지세라는 말이 아깝지 않게 성장한 것이다.
“그러면 한동안 너나 흑백쌍노가 없어도 알아서 할 만한 녀석들도 있겠지?”
당연한 일이다.
이만큼이나 성장한 천조회쯤 되는 거대한 세력을 운용하는 데 있어 세 사람의 주축으로 굴러갈 리가 없지 않은가? 몇 없는 사마정의 인맥을 통한 이들에서부터, 흡수성장으로 얻은 사람들까지 지금의 천조회는 톱니바퀴 수백이 맞물린 거대한 연동체였다.
사마정과 흑백쌍노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마정이 하는 일은 그런 톱니바퀴에 이상이 생기지 않게 조율하는 일인데, 직속 수하 중 몇몇은 그 일을 잠시 동안 맡을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좋아, 그러면 돌아가서 대충 상황 정리하고 모두 만금장으로 와.”
흡족스러운 사마정의 대답에 고개를 주억인 황준우가 말했다.
“만금장으로 말입니까?”
사마정이 답지 않게 두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그래, 만금장으로. 검둥이, 흰둥이도 같이.”
“흑아도?”
“백아도 말입니까?”
“그래, 전부 다.”
사마정과 흑백쌍노, 세 사람의 시선이 서로를 오갔다.
그들은 따지자면 황준우의 그림자, 어둠이었다.
지금은 그의 밑에서 자숙하며 살고 있지만, 어디 가서 스스로를 밝히기 힘든 존재들. 특히 흑백쌍노는 한때 흑백쌍흉이라 불렸던 전적이 있을 정도로 악명이 자자한 인물들이다.
반면 만금장은 황준우에게 있어 양지(陽地)이며, 빛이다.
세 사람은 결단코 닿을 수 없는 영역.
황준우와 그의 주변을 둘러싼 이들에게나 어울리는 땅이라고 생각했다.
말은 안 했지만 그러한 일을 당연하다고 여겼던 세 사람이었기에, 이번만큼은 당황을 감출 수 없었다.
“어. 와서 죽을 만큼 수련 좀 하자. 이 상태로는 안 되겠어.”
“무신께서 아니, 소장주께서 직접 무공을 지도하실 생각이십니까?”
사마정의 질문에 황준우가 답답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답지 않게 왜 그래. 그러면 나 말고 누가 한다고.”
황준우가 확답했고, 동시에 흑백쌍노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며 소리를 질렀다.
“흑아, 흑아! 내가 무신한테 무공을 배우는 겁니까!?”
“흑아도 무신한테 무공 배운다! 더 강해진다!”
처음에는 놀랐지만, 그보다 더 큰 기쁨에 좋아하는 두 사람을 보는 황준우의 입가로는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느낌의 짙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더 강해질 거야. 고생한 만큼 말이지.”
그 말에 흑백쌍노는 더욱 기뻐했다. 오로지 사마정 혼자만이 감격 속에서도, 알 수 없는 불안함에 몸을 떨 뿐이었다.
황준우 일행에게서 빠른 속도로 멀어져, 인적이 없는 숲길에 들어설 때까지도 일그러진 진무영의 얼굴은 펴지지를 않았다.
“…….”
숲길 한편 조용한 적막 속.
말없이 검을 뽑아 든 진무영의 기운이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평소 잔잔하고 고요하던 모습과 다르게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쏘아진 기운은 순식간에 부풀어 올라 터져 나간다.
쾅-! 꽈드득-! 쿵!
엄청난 폭음과 함께 주변에 자리 잡은 십여 그루의 나무가 동시에 무너지며 쓰러진다. 나무에 혹은 수풀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던 작은 곤충과 새, 동물들이 진무영으로부터 미친 듯이 달아난다.
그 모습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던 진무영의 검이 휘둘러졌다.
퍼버벅-!
무언가가 터져 나가는 소리와 함께 하늘을 날던 새를 비롯한 동물, 곤충들의 몸이 터져 나가며 핏물이 사방으로 튀겼다.
후두둑-!
떨어지는 시체들 사이 고고히 선 진무영의 표정이 흔들린다. 하나 이전처럼 크게 일그러진 모습은 아니었다. 감정을 폭발시키듯 힘을 쓴 뒤에야 마음이 안정되기 시작한 것이다.
“후우…….”
다시 한 번 깊은 한숨이 쏟아지고, 망설이듯 몇 번의 달싹임만을 반복하던 진무영의 입술이 크게 떨어졌다.
“황준우.”
이름을 읊는 음성이 가늘게 떨린다.
하나 지나치게 감정이 동요하는 기색은 없었다.
“황준우, 황준우.”
몇 번이고 그 이름을 읊던 진무영이 고개를 들었다.
눈빛에 묘하게 열이 오른 것 같은 느낌이다.
“화가 나, 너무 화가 나는군. 어째서지?”
읊는 말과 다르게 얼굴에는 어느덧 평소와 같은 평온이 어렸다.
진무영의 얼굴이 다시 한 번 징그럽게 일그러지려는 찰나였다.
“후우……!”
또 한 번, 깊은 숨을 내쉰 진무영이 눈을 감았다.
“인정하자. 인정하면 간단한 일이다.”
혼자만의 대화.
무의미할 수도 있지만, 지금의 진무영에게는 이처럼 효과적인 일도 몇 없었다.
스스로도 믿을 수 없는 괴상한 마음이 그의 가슴 한편에 뜨겁게 타오른다.
생에 처음 겪는 치욕.
활화산이 터지는 듯한 뜨거운 분노.
그 격한 감정의 고동 속에서 그의 마음을 가장 크게 흔든 것은 단 한 가지 사실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그를 원하고 있구나. 황준우.”
어려운 마음을 납득하듯 입 바깥으로 내뱉은 진무영의 얼굴이 평온해졌다.
치욕스러운 상황에서까지 그를 원한다는 사실이, 스스로가 너무 싫어 터졌던 분노는 빠르게 가라앉는다.
처음에는 뛰어난 재능이라고만 생각했다.
이제는 아니다.
착각했다. 황준우는 이미 재능을 벗어난 무언가의 완성형이다. 그래서 더욱 탐이 났다. 진무영의 곁에는 언제나 사람이 많았다. 좋은 사람, 싫은 사람. 호(好)와 불호(不好)의 경계도 존재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정말 단 한 명도 그와 동급 혹은 우위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심지어 스승인 검선조차도 그의 아래라고 생각했다.
모순적인 사실을 뽑자면, 곁에 닿고 싶은 사람은 있었다는 것이다.
‘칠야무신…… 그를 닮았기 때문이겠지.’
당시의 그는 너무나 강하고, 아름다웠다.
그래서 배척당했다.
한 마리의 도도한 야수는 초식동물 따위와는 어울리지 못하는 법이다.
만약 당시 진무영에게 지금과 같은 힘이 있었다면 결코 그렇게 되도록 방치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옆에 서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친우가 되고자 했을 터였다.
때문에 불성의 기적(奇蹟)에 의해 그가 봉인되던 날 밤, 진무영은 남 몰래 홀로 술병을 비웠었다.
다가가지 못한 친우를 위한 술이었다.
그리고 오늘, 황준우를 통해 그 다가설 수 없던 도도한 야수의 위상을 또 한 번 보았다.
저도 모르게 칠야무신을 닮았다고 말하였다.
그 누구에게도 해 주지 않았던 말이다.
진무영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칠야무신은, 그야말로 이 시대의 유일한 ‘무신’이었으니 말이다.
“흐흥…….”
인정을 하는 것만으로 그의 가슴을 뜨거운 분노로 달구던 진실이, 즐거운 콧노래로 변하여 흘러나온다.
“황준우, 황준우.”
또 한 번 이름을 읊는 목소리에는 달뜬 열기마저 차오른다.
“꼭 곁에 두어야겠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적으로 둘 생각은 없다.
너무나 가지고 싶고, 탐나는 남자와 굳이 적이 되어야 할 이유가 있는가?
가질 수 없다면 죽여야 된다는 개념은 진무영으로서는 조금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든 가져야겠어요.’
진무영은 혀로 건조한 입술을 핥았다.
굳어졌던 머리에 윤활유가 발라진 듯 수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물론 쉽지는 않은 일이다.
황준우를 곁에 두기 위해서는, 우선 그 야수와 가까워져야 할 테니 말이다.
누군가와 가까워질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상대를 아는 것이다.
이미 진무영의 머릿속에서는 황준우가 무림삼계명 중 하나인 ‘그 누구도 서왕의 주인이 될 수 없다’를 어겼다는 사실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까짓 무림삼계명, 원한다면 바꾸면 될 일이다.
“알기 위해서는, 역시 자극을 해 보는 게 제일 좋겠지요.”
이후 그는 주변의 살풍경 사이를 느긋이 걸으며 몇 가지 이름을 더 읊었다.
“황준우, 만금장, 서왕, 남궁세가, 남기.”
마지막 말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 진무영의 입이 다시 한 번 벌어졌다.
“남기, 그래 남기…….”
황준우를 쫓아 나가는 이름 사이를 파고드는 의문.
단순한 우연일까?
만금장과 남궁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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