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149화
제 149화
1. 대적(大敵)
“만금장 소장주 황준우…….”
황준우가 한 말을, 똑같이 한 번 더 읊은 진무영의 얼굴 표정에 적지 않은 당황이 떠올랐다. 전혀 예상하지 않던 자리에서,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인물을 만났다.
“그래, 그게 나야.”
가볍게 수긍하며 앞으로 걸어 나오는 황준우를 보며 진무영의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졌다.
‘서왕과 만금장 소장주. 대체 무슨 관계지? 아니, 만금장주와 서왕인가?’
아니, 아니다.
진무영은 이어지는 생각에 떠오르는 소주대인의 이름을 지우고 황준우의 두 눈을 마주했다.
‘소장주와 서왕이 분명하다.’
가볍게 웃고 있는 듯한 황준우의 눈에는 분명 분노가 어려 있었다.
“난 말이야. 내 것을 건드리는 걸 아주 싫어해.”
“…….”
뚜벅, 뚜벅.
걸음을 끝까지 이어 진무영과 지근거리에 마주한 황준우가 수왕검을 겨눈다.
“아직 참고 있는 건, 그나마 너란 녀석에 대한 판단을 보류 중이어서야.”
진무영의 두 눈에 작은 분노가 떠올랐다.
‘오만하군.’
황준우는 마치 자신을 아래로 깔아보고 있는 듯하다.
공식적으로 천하에서 가장 강하다고 꼽히는 우내십존조차도 아래로 내려다보는 자신을, 오히려 밑으로 뭉개고 있는 것이다. 이를 오만 외의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한데 함부로 말이 나가지 않는다.
‘상대가 만금장 소장주여서?’
황준우가 만금장 소장주라면, 진무영은 현존하는 무당파 제일고수다. 이미 스승 검선조차 넘어선 무당파의 비밀병기. 또한 그가 이끄는 활협단은 사실상 천하전체라 보아도 무방하다. 만금장이 부담 가는 상대임은 분명하나 마음먹고 움직인다면 능히 압도할 수 있다.
결국 망설일 이유가 없다.
‘없는데…….’
살짝 뒷걸음질 치며 두어 걸음 물러난 진무영이 손을 들었다.
“아무래도 오해가 있는 것 같군요.”
“그랬으면 좋겠어. 쓸데없는 피를 보고 싶지는 않거든.”
황준우의 시선이 진무영의 건너편, 이제야 힘겹게 몸을 추스르고 있는 흑백쌍노를 향한다.
“둘은 괜찮아?”
“백아는 아프지만 괜찮습니다!”
“흑아도 괴롭지만 참을 만합니다.”
조금 거칠어졌지만 평소와 같은 두 사람의 목소리에 황준우의 입가로 작은 미소가 번졌다.
“다행이야. 괜찮지 않았으면 물불 안 가릴 뻔했거든.”
“……저는 무당파의 진무영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친구, 주연하 황녀와도 서로 이해하고 돕는 사이죠.”
“그걸 봤기 때문에 아직까지 참고 있는 거야. 아니었으면 이미 넌 죽었어.”
조금의 망설임, 그리고 거침이 없는 언사와 기세가 문득 진무영의 머릿속에 잠재되어 있는 인물을 떠올리게 만든다.
“칠야무신…….”
혼잣말을 읊조리고는 곧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고 보니 칠야무신의 본명이 비슷한가?’
이름보다는 별호로 불렸기에, 칠야무신의 본명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하나 분명 만금장 일가와 같은 황 씨라는 사실은 떠올랐다.
‘그럴 리가 없지.’
이상한 데에서 공통점을 찾아서 맞출 필요는 없다.
칠야무신은 더 이상 없다.
그 누구보다도 진무영 본인이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당신은 칠야무신을 떠올리게 하는군요.”
“칭찬인 것 같네.”
“…….”
황준우의 너스레에 진무영도 짧은 미소를 보였다.
“혹시 무림삼계명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현재 강호의 정상에 군림한 무림군주들 사이에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 지정된 칙령으로서, 어길 시 전 무림의 공적이 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금기들. 물론 황준우는 그에 대해 전혀 몰랐다.
“궁금하지도 않아.”
“알아 두셔서 나쁠 건 없을 텐데요. 무림 전체를 적으로 삼을 셈이 아니면요.”
무림 전체가 적이 된다.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 어떠한 말보다 무시무시한 협박일 것이다.
아무리 독존하고자 하는 무인이라 한들, 홀로 천하와 싸울 엄두를 낼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 진무영의 눈앞에 있는 상대는 황준우였다.
“해 봐. 자신 있으면. 단, 모든 것을 잃을 각오로 와야 될 거야.”
황준우의 목소리가 조금 더 차가워졌다.
그는 더 이상 진무영과 쓸데없는 잡담을 나누고 싶지도 않았다.
“결정해. 검을 뽑을래, 아니면 꼬리를 말고 도망갈래?”
진무영은 말없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의 생에 있어 이만한 치욕을 당한 적이 언제였던가?
평생에 없었다.
눈에 뜨이지는 않아도, 결단코 누군가의 밑에 깔린 적은 없었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늘 정점에 서 있던 몸이다.
‘불쾌하군.’
평소였다면, 이쯤에서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았을 터였다. 만금장 소장주, 우습지는 않은 위치지만 진무영은 그조차도 묻어 버릴 수 있는 힘과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한데 또 웃고 만다.
마음 한편에 느껴지는 꺼림칙함이 계속해서 그를 붙잡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이만하죠.”
결국 진무영은 항복 선언을 했다.
가볍게 두 손을 들어 올리고는 뒤로 몇 걸음이나 더 물러난 그를 황준우는 더 이상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
지나칠 정도의 자만.
그리고 평생 처음 느끼는 치욕.
마지막으로 황준우의 뒷모습을 한 번 더 눈에 담은 후, 등을 돌린 진무영의 얼굴이 흉신악살(凶神惡煞)처럼 일그러졌다.
“그가 갔습니다.”
“알아.”
진무영이 물러나기로 한 순간, 그에게서 등을 돌려 사마정에게로 다가간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이후 옅은 한숨을 내쉬고는 사마정의 어깨에 올려 기운을 주입해 회복을 가속화시킨다.
순간적으로 내력이 폭발하며 생겨났던 자잘한 내상마저 말끔히 회복되는 것을 느낀 사마정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감격이 떠올랐다.
“무신이시여…….”
“전부터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그 말 좀, 낯부끄러우니까 그냥 소장주라고해.”
“…….”
“명령이야.”
“알겠습니다. 무신 아니, 소장주님.”
고개를 주억이는 사마정의 내상을 모두 다듬은 황준우가 다시 등을 돌려 흑백쌍노에게로 다가갔다.
양손에 한 명씩 어깨를 붙잡고, 마찬가지로 내상을 보듬어 준 뒤에야 황준우의 얼굴에 훨씬 더 나아졌다. 딱히 표정을 찌푸린 것은 아니지만 어딘지 모르게 딱딱하게 굳어 있던 인상에 옅게나마 부드러운 미소가 걸린 것이다.
하지만 그도 잠시, 다시 얼굴을 굳힌 황준우의 양 눈썹이 높게 솟았다.
“돌아다니던 중이라 우연하게 발견해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너희들 다 죽었어. 알아?”
“…….”
사마정이 입을 닫고는 고개를 숙였다.
흑백쌍노 역시 할 말이 없는지 시선을 돌린다.
“대체 어떻게 이렇게 된 건지 설명 좀 해 봐.”
황준우의 시선이 사마정을 향했다.
“제 실수입니다.”
“그렇겠지. 너 말고 여기 사고 칠 사람 안 보인다.”
흑백쌍노는 언뜻 제멋대로인 듯하지만, 막상 속을 보면 의외로 제어하기가 쉬웠다. 어린아이와 같은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지만 시킨 일 외에는 크게 벗어나지 않는달까? 어린 마음과 다르게 오랜 세월 세상을 살아오며 느낀 수많은 것들이 두 사람을 그리 만들었을 터다.
그리고 따지자면, 기실 사마정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사마정은 제 목숨이 아까운 줄을 안다.
그래서 무리한 도박이나 행위를 굉장히 싫어하는 편이었다.
한데 과거부터 지켜본 결과 아주 가끔, 한 발자국씩 더 나갈 때가 있다. 욕심인지 자신감인지는 모를 일이다. 사마정 본인도 모르게 무언가에 홀린 듯 실수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후회하지.’
황준우를 향한 배신처럼 말이다.
“욕심을 부렸습니다.”
“어떤 욕심?”
“활협단…….”
“활협단이 왜?”
황준우는 진무영의 활협단을 알고 있었다.
이미 주연하를 만날 때 소개를 통해 들었으니 말이다.
“그 활협단이…… 제가 일전에 말씀드렸던 바로 정, 사, 마 연합체 기반을 한, 현 중원무림의 암중지배세력이었습니다.”
“그래?”
놀라운 소식이지만, 황준우는 이상할 정도로 태연했다.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던 진무영에 대한 괴리감이 그런 것이라면 오히려 쉽게 납득이 될 정도였다.
“음흉한 녀석이네.”
황준우의 입가로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전생에 보았을 때에도 모두에게 묻혀 있는 듯, 은근히 중심에 서 있는 분위기를 풍기던 녀석이었다.
속이 깊고, 음흉한 성격.
‘나랑은 잘 안 맞아.’
직감상 이번에 살려 두면, 언젠가는 아마 적으로 만나게 될 터였다.
그렇다고 해서 걱정은 없었다.
단순히 무공의 문제가 아니었다.
실질적으로 황준우가 느낀 진무영의 무공은 용중호에 비하여 적어도 한 수, 많게는 두 수 이상 앞선 수준이었다. 아마 절치부심 노력한다면 조율의 경지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진무영이 황준우와 동격의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같은 경지의 무인이라 하여 패배하였거나, 밀렸다면 혹은 고작 동수 정도를 이루었어도 황준우는 결코 무신이라 불리지 못했을 터였다.
그릇의 크기가 다르다.
황준우는 그를 머리로 생각하지 못하여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오히려 한편으로는 기대도 하고 있었다.
‘저 녀석이 조율의 경지에 올라서 도전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황준우는 천하에 있어 유일하게 조율경에 속한 무인이었다. 누군가와 자신의 성취를 비교할 수도, 빗대 볼 수도 없다. 같은 경지라 한들 익힌 무공에 따라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다른데, 그를 지켜보는 것이 큰 공부가 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새로운 조율경의 고수가 등장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오히려 황준우에게 기꺼운 일이었다.
보고 배울 것이 더 늘어난다는 말은 곧 더 빨리 강해질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쉽지는 않을 터였다.
황준우 역시 우연치 않은 기연으로 벽을 허물은 만큼, 진무영에게도 그에 합당한 깨달음이 찾아와야 할 테니 말이다.
“어쨌든 결국 그 암중 세력을 쫓다 보니 활협단에 닿았고,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하필 곧장 머리에 도착해서 이렇게 됐다는 거네.”
“진무영이 활협단의 머리입니까?”
“어. 놈이 단주 아, 본인 말로는 선장이라고 하더군.”
“납득이 갑니다. 보이는 것보다 숨긴 게 더 많은 사람입니다.”
“원래 이 강호무림에서는 감추는 게 많은 놈이 더 무서운 법이지. 근데…… 그렇다고 해도 말이지, 사마정.”
“다시 묻는데. 누가 멋대로 죽으라고 했나?”
“…….”
“너 나한테 빚 많지 않아?”
“죄송……합니다.”
“네 목숨은 내 것이다. 죽는 것도 내가 결정해. 이해해?”
“두 사람도 마찬가지야.”
황준우의 시선이 이번에는 흑백쌍노를 향했다.
흉흉한 말투나 분위기에 비해 괴상할 정도로 무섭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던 두 사람이 재빨리 뻣뻣하게 몸을 굳혔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덜 혼나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든 탓이다.
“너희들도, 비록 얼떨결에 이렇게 됐지만 이제야 좀 사람답게 살고 있는데 기왕이면 오래 사는 게 좋지 않냐?”
“맞습니다. 예전에 백아는 오래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
흑아가 백아를 검지로 가리키며 말한다.
“흑아는 벽에 똥칠해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백아의 말에 흑아의 인상이 확 찌푸려졌다.
“칠해 보고 싶다고는 안 했습니다!”
“흑아가 칠하면 나보고 치우라고 했지 않습니까!”
“시끄러! 뭐 잘한 게 있다고 싸움질이야.”
소란스러워지려던 두 사람이 순식간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고개를 푹 떨어트렸다.
“싸움질도 못하는 것들이.”
황준우의 냉정한 현실 평가에 고개는 더더욱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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