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138화
제 138화
“뭣 하고 있는 게냐?”
“가, 가면 죽는다면서요? 그냥 돌아가는 게 어떨까요?”
떨리는 목소리의 신일이 신아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애초부터 겁이 많은 성격이니 당연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제자를 책망하는 눈으로 바라본 신아가 혀를 찼다.
“에잉, 죽을 확률이 높다고 했지 누가 무조건 죽는다고 했느냐. 적이 우군을 만들었다면 우리도 누군가와 손을 잡아야지. 마침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괴물이 하나 더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상대가 협조를 해 주지 않는다면 곤란하다.
하지만 지금은 물불을 가릴 때가 아닌 상태.
“그, 그렇겠죠?”
“어허, 네 어찌 그리 겁이 많아서 큰일을 할 수 있겠느냐? 어서 따라오거라!”
겁을 집어먹어 몸을 움츠린 와중에도, 스승의 엄포에 뒤를 따르기 시작한 신일이 두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고 눈을 부릅뜬다.
제 나름대로 공포를 몰아내기 위한 노력일 것이다.
‘저 어린놈을 언제 다 키울꼬.’
내심 혀를 차면서도 걸음을 계속해서 옮겨 가던 신아의 두 눈이 갑작스럽게 뒤를 쏘아보았다.
“가, 가고 있습니다.”
신일이 나름대로 힘찬 목소리를 흘린다.
“아니, 네가 문제가 아니라…….”
예민해진 그녀의 감각에 기묘한 느낌이 이어졌다.
“웬 꼬맹이?”
놀란 그녀의 눈앞에 신형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황준우다.
그런 그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은 신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네놈은 대체 뭐냐?”
“…….”
황준우는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하여 눈을 가늘게 뜨고 신아를 내려보다가, 곧 신일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무슨 목적인지는 모르겠지만 돌아가. 여긴 애기들 있을 곳이 아니다.”
이후 순식간에 떠나려는 순간이었다.
“만금장주와는 무슨 관계지?”
신아의 낮은 목소리가 황준우의 발목을 붙잡았다.
“아버지를 알아?”
“아버지?”
신아의 표정도 오묘하게 변했다.
잠시 두 사람의 시선이 다시 허공에서 맞물렸다.
‘괴상한 녀석이네.’
황준우가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봐도 겉모습은 평범한 소녀다. 내력이 눈에 뜨이는 것도 아니고, 딱히 무언가 특별한 기운도 보이지 않는다. 한데 또 자세히 보니 투명한 자연지기의 막이 그녀를 보호하듯 감싸고 있다.
등 뒤의 청년, 신일도 비슷한 느낌이기는 했지만 그 힘이 너무 미약해서 솔직히 신경도 쓰이지 않을 정도였다. 심지어 이 어린 소녀는 황석후를 입에 담기까지 했다.
“너 대체 뭐야?”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정말 네가 만금장주의 자식인 게냐?”
황준우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다.
“꼬맹이가 건방지네. 너 우리 아버지 연세는 제대로 알고 하는 말이야?”
신아가 콧방귀를 뀌었다.
“알다마다. 고것이 요만할 때부터 봤는데 모를 것 같으냐.”
작은 소녀, 신아가 손을 높게 들어 자신의 머리보다 살짝 위에 손을 가져다 대고는 묘하게 인상을 찌푸린다.
“생각해 보니 어릴 때부터 신체 발달이 훌륭했던지고…….”
“아무리 봐도 이상하네. 너 대체 몇 살이야?”
황준우는 처음 신아를 분명 소녀로 인식했다.
기껏해야 열 살 내외.
한데 대화를 나눌수록 기묘한 이질감이 점점 커지고 있다. 정신에 이상이 생겼다고 보기에는 신아의 주변을 맴도는 자연지기가 너무 맑다. 저런 기운의 보호를 받고 있는 상태로는 건강이 나빠질래야 나빠질 수가 없고, 정신이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가 없다.
“흥, 숙녀의 나이를 묻다니. 실례다!”
“미치겠군.”
황준우는 잠시 고민했다.
황석후의 이야기를 들어 잠시 걸음을 멈추었지만 무덤 내 이곳저곳에서 느껴지는 기운들이 범상치 않았다. 그중 둘 정도는 황준우의 흥미를 끌고 있었다.
‘아버지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여기 계시지 않는 것 같고…….’
그렇다면 황석후는 어디로 갔을까?
직감 속, 불안감은 가셨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그리고 자칫해서 이 사건에 황석후가 휘말리는 것도 원치 않았다.
‘이미 주연하는 얽힌 것 같고…….’
그래서 되도록 빨리 무덤을 정리하고, 대체 어떤 놈들이 이런 장난질을 쳤는지 확인하고 빠져나가려던 와중에 신아와 신일을 보았다. 신기한 마음에 잠시 말을 걸었는데 이상하게 발목이 잡혀 있는 것이다.
‘신경을 끄자.’
그편이 나을 듯하다.
결심한 황준우가 다시 걸음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자, 잠깐!”
기색을 느낀 신아가 또 한 번 소리쳤다.
“왜? 나 지금 바빠.”
무시하려 했는데, 저도 모르게 또 한 번 발목이 잡힌 황준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나를 좀 도와다오!”
“내가 왜?”
황준우의 대답은 냉정했다.
어린 소녀가 간곡히 부탁하는 모습을 보니 양심이 찔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그 속내는 어린아이가 아니란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 당연히 괜한 걱정이나 심력 소모를 하는 것이 싫었다.
신아는 그런 황준우를 보며 머뭇거렸다.
도력을 이용한 언령으로 반 강제적으로 움직임을 멈추어 놓았지만 제한할 수는 없다.
겉으로 보기에는 약관 정도밖에 안 된 청년이 이럴 수가 있나 싶지만, 또 한편에서는 이쯤 되니 그 만금장주가 그리도 자랑을 늘어놓았나 싶었다.
“귀찮네. 뭔가 괴상한 술수를 부리고 있는 것 같은데 또 잡지 마.”
“……마, 만금장주를 찾고 있는 것 아닌 게냐!?”
“그래서?”
“나를 도와주면 만금장주를 찾아 주겠다.”
“흠…….”
황준우가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눈앞의 어린 소녀와 황석후가 어떤 관계가 있다는 사실은 척 봐도 알 수 있었다. 만약 신아가 그를 빌미로 부탁을 해 왔더라면 냉정하게 거절하고는 등을 돌렸을 것이다. 황준우 본인과는 관계가 없으면서 그런 식으로 인질을 잡듯 대화를 나누려 했다는 사실 자체가 불쾌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신아는 빌미를 통한 요구가 아닌 거래에 가까운 제안을 해 왔다.
‘나쁘지 않은데?’
일단 이 안에 없다고 확신했지만 황준우에게 있어 황석후를 찾는 것이 이번 서안행(行)의 제일목표임은 사실이다. 때문에 이 내부를 정리하고 나서는 또다시 어떻게 찾아야 되나 고민 중이었는데, 아무래도 신아에게는 달리 방법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곤륜의 도사다. 만금장과 우리 곤륜은 오랜 지기(知己) 사이로서 함께해 왔지. 도와만 준다면, 꼭 만금장주를 찾아 주마.”
황준우의 머릿속에 불빛이 번쩍였다.
‘곤륜의 도사?’
곤륜파(崑崙派).
구파일방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변방 일대에서 명성이 높은 도가(道家) 문파의 이름이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제갈세가만큼이나 신비에 둘러싸여 있는 그들은 산문 바깥을 벗어나는 일도 잘 없다고 한다.
그런 곤륜과 만금장 사이가 가깝다는 사실은 황준우 역시 오늘 처음 알았다.
생각 외의 정보를 건진 것은 분명한 수확이었다.
“혹시 이미 알고 있는데 장난치려는 건 아니지?”
“아니다! 서안에 들기 전에 마지막 연락을 취하기는 했지만 그 이후로는 나도 만금장주가 어디 갔는지를 모른다. 하지만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신아는 제법 절박한 듯 보였다.
그리고 기실, 이미 위치를 알고 장난을 치는 중이라도 황준우의 입장에서는 크게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아버지를 확실히 찾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방금 전 대화를 통해 하나 더 알 수 있게 된 사실이 있었다.
“서안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됐지?”
“이제 약 보름쯤. 이 기분 나쁜 무덤에 숨어 들어온 건 삼 주야 전쯤이다.”
그러니까 보름 전까지만 해도 황석후는 무사했다.
‘다행이다.’
직감상 안전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걱정이 있었는데 조금쯤은 더 마음이 놓였다.
“좋아. 내 이름은 황준우. 그쪽은?”
“신아라고 부르면 된다.”
“시, 신일입니다.”
황준우가 자기소개를 하자 신아와 신일이 번갈아 자신을 소개했다.
“남매?”
이름이 비슷해서 질문했지만 척 봐도 그런 사이는 아니었다.
“제자 녀석이다. 이름이 비슷한 건 그저 우연의 일치일 뿐이지.”
신아가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다시금 황준우를 바라보았다.
의문이 가득 넘치는 시선.
묻고 싶은 게 많은 듯했다.
사실 아직 황준우도 그녀와 곤륜, 그리고 만금장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았다.
하지만 그보다 신아의 마음이 더 급한 듯했다.
“시간이 없다. 어서 움직이자꾸나.”
신아의 총총걸음이 빠른 속도로 어딘가를 향했다.
‘저쪽은…….’
황준우 역시 그 뒤를 쫓으며 그녀의 목적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 불쾌한 기운의 근원(根源)인가?’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좋지 않은 종류인 것은 알겠다.
도사의 입장에서 저런 힘을 꺼려하는 것 역시도 납득이 되는 바.
재미있는 것은 그런 힘의 근원 주변을 감싸고 있는 또 다른 기운들이다.
‘마기, 아니지…… 조금 다른가.’
마인들의 마기와 닮았지만 기묘하게 다른 기운.
처음에는 전혀 영문을 몰랐지만 신아가 내력을 사용하지 않고 빠르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어느 정도 짐작은 가질 수 있었다.
그를 확신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 보면 될 일이었다.
동창 이십사수를 비롯한 무수히 많은 황궁고수가 이각도 되지 않아 전멸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두 눈으로 목격했지만 주고치에게는 놀랄 여력도 없었다.
“쿠엑, 쿠에엑-!”
계속 헛기침을 하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부터 허연 차액을 뚝뚝 떨어트리기 시작한 주고치의 눈은 반쯤 뒤집혀 있었다.
“왔구려.”
“진무영은?”
그런 그를 아무렇게나 버려두듯 대술사의 앞으로 주고치를 내팽개친 용중호의 시선이 문득 등 뒤를 향했다.
엄청난 기의 파동과 함께 무덤 전체가 흔들렸었다.
용중호 본인이 그만한 힘을 사용한 적 없으니, 상대는 진무영일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이제 막 이관(二關)을 통과했소이다.”
말을 하는 대술사의 손이 당장에라도 피를 쏟으며 죽을 것 같은 주고치의 몸을 훑는다. 이내 그의 눈이 번쩍이는 빛을 토했다.
“순수한 혈통(血統)…….”
“죽여서는 안 된다.”
용중호가 차갑게 말했다.
대술사를 비롯한 밀교의 마술사들에게 있어 피의 가치는 높다. 그중에서도 처녀, 총각 등 순수한 피는 더욱 좋았다. 하나 그 모든 피를 다 합친다 한들 오래토록 적통으로 이어져 온 왕족 혹은 황족에는 미치지 못한다. 대술사가 주고치를 탐내는 것도 당연했지만, 아직은 안 되었다.
“물론이오. 우리에게는 피만큼 돈도 귀하지요.”
입맛을 다신 대술사가 고개를 주억였다.
“참, 곤륜의 도사 녀석들을 찾았소.”
“버틸 수 있겠나?”
용중호의 시선이 어둠을 넘어 먼 곳을 바라본다.
진무영을 찾아 뛰어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고작 둘뿐이더구려. 심지어 그중 하나는 아직 인선(人仙)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애송이에 불과하오.”
“괜한 걱정을 한 셈이었군.”
“그러게 말이오.”
차가운 음색과 다르게 분위기는 나쁘지 않다.
용중호는 입가로 미소를 그렸다.
아무리 도술사가 마술사의 천적이라지만 고작 둘뿐이다. 심지어 대술사는 그런 마술사들 중에서도 정점에 선 존재. 게다가 장소도 좋았다. 이 무덤 내부는 밀교의 술법사들이 만든 함정 그 자체이니, 상대 도술사가 설령 지선(地仙)급이라 한들 대술사를 이기지는 못할 터였다.
“내 도움이 없어도 충분하겠지?”
“물론.”
대술사가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좋다. 만약 힘들다면 버티고만 있도록.”
그 말과 함께 용중호의 몸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진무영이 도착하기 이전에 미리 삼관(三關)으로 향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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