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134화
제 134화
따지자면 자연지기는 자연지기인데, 불순물이 가득 껴 있는 오염물 느낌이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황준우를 제외하고는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그 기운을 보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는 사실이었다.
‘이 밤에도 저렇게까지 선명하게 보이는데 주변에서 말 하나 없다는 게 그 증거지.’
때로는 검은 아지랑이가 병사로 무장한 아마도, 금의위 무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몸에 파고들어 기운을 어지럽히기도 했는데 그 이후로 피곤한 안색을 한 것 외에는 별다른 반응도 없었다.
한데 어째서 저 진시황릉에서 저런 불쾌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단 말인가?
솔직히 아무리 황준우라 하여도 아버지 일만 아니었다면, 꺼림칙해서 들어가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무공의 고하(高下)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아무리 고수라 한들 진흙탕 혹은 똥물에 몸을 담그는 게 기분이 좋을 리는 없지 않은가?
그래도 들어가야 한다.
말했듯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석후가 관련된 일이었다.
“대체 어떤 놈들인지, 잡히면 진짜 각오해라.”
이를 아득 간 황준우의 신영이 금의위로 위장한 병사를 지나쳐 순식간에 막사 안으로 파고든다.
순간적으로 막사의 입구가 출렁였지만 이상하게 생각하는 금의위는 없었다.
모두가 제법 센 바람이 잠시 불었다고 느낀 정도였다.
막사 안에도 제법 많은, 오히려 바깥보다 더 고수에 속하는 금의위가 있었지만 유령신보를 극성으로 펼친 황준우를 찾지는 못했다.
‘입구가 훤히 보이네.’
나름대로 장(欌) 혹은 식탁 등을 통해 진짜 입구를 가려 놓았지만 검은 기운이 마치 거대한 촉수처럼 뻗어져 나오고 있는 입구를 못 찾으면 눈에 문제가 있는 거다.
황준우는 빠르게 움직여, 붉은 포대로 덮인 원형 식탁의 아래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잠가 놨네?’
지하로 향하는 문은 두터운 자물쇠로 잠긴 채였다.
당연한 일이다.
자그마치 진시황릉의 무덤이니 이 정도 철통보안도 안 해 놓았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황준우는 입맛을 쩝 다시며 손끝에 강기를 만들었다. 두텁기는 했지만, 일반 강철인 만큼 강기를 이용해 자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작은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끊어지고, 식탁 주변에 앉아 대화를 하는 것 같던 금의위 무인들 중 누군가가 반응을 했다.
“방금 뭐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나?”
“전 못 들었습니다.”
“입구를 열어 보아라.”
상관으로 짐작되는 이의 말에 금의위 무인들이 순식간에 황준우가 숨어 있던 원형식탁을 치워 버린다. 재빨리 물러서 기척을 지웠지만 자물쇠가 끊어진 모습마저 감출 시간은 없었다.
“……!!”
“침입자가 있다!”
채채챙-!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막사 내부의 금의위들 모두가 순식간에 검을 뽑아 든다.
눈을 굴리며 기파를 펼치는 모습이 아주 열심히였다.
조화경의 고수, 우내십존 정도의 수준이 와도 이 칼날 같은 경계를 뚫고 지하 진시황릉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무리다. 물론 황준우의 입장은 조금 달랐다.
‘이거 인면지주랑 싸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또 전력(全力)으로 움직여야겠네.’
자물쇠가 끊어지는 소리를 들을 정도의 예리한 금의위 고수를 잠시 바라본 황준우가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우내십존에서 말석은 할 만한 녀석이네. 아직 나이도 그렇게 안 많은 것 같은데 천재 소리 들었겠네.’
한데 아무리 얼굴을 보아도 모르겠다.
저 정도 고수쯤 되면 별호라도 있을 법한데 떠오르는 특징도 없었다.
황궁제일고수라 불리는 금의위 대영반, 풍제(風帝)는 결코 아니었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무명고수(無名高手)라는 뜻이다.
‘과연 황궁.’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숨기고 있는 게 더 많다.
“찾아라! 절대 내부로 들여보내선 안 된다!”
이제 불혹(不惑)을 넘었을 법한 중년 사내의 얼굴의 다급한 표정과 특징을 파악한 황준우는 그 틈새를 파고들어 자물쇠가 따인 문을 열었다.
“……!!”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지하로 향하는 문이 잠시 움직이는 모습은 보였다. 동시에 중년 사내의 검이 눈 한 번 깜짝이기 전까지 황준우가 서 있던 자리를 깊게 찔렀다.
허공을 찔렀지만 예리한 솜씨.
지하로 내려와 문을 닫는 순간, 어둠 속에서 잠시 눈을 마주한 중년 사내가 이를 악무는 표정이 보였다.
“제기랄!”
욕지기를 내뱉는 표정이 결코 좋지 않다.
그럼에도 문을 열고 쫓아오지는 못한다.
황준우는 중년 사내에게 진시황릉의 내부로 들어올 수 있는 권한이 없음을 알았다.
“제법 집착이 심해 보이는 녀석이었는데 다행이네.”
바깥에서 소란과 함께 욕설 섞인 음성이 들려왔지만 이미 황준우로서는 상관없는 일.
오히려 그보다 신경 쓰이는 일은 훨씬 더 많았다.
“이거, 바깥은 양반이었네?”
지하로 회전하며 뻗어진 계단을 바라보는 황준우의 눈이 크게 찌푸려졌다. 지하의 제일 밑바닥, 거대한 형태의 검은 뱀이 붉고 요사스러운 눈을 빛내며 몸을 말고 있다. 놀라운 점은 뱀에게 명확한 형체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순수한 탁기의 덩어리?’
막사 바깥까지 뿜어져 나오던 기운의 근원을 찾은 황준우가 계단을 무시하고 지하로 뛰어내려 붉은 눈을 이곳저곳에 빛내는 뱀의 앞에 섰다.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불쾌하지만 위협적인 느낌은 없다. 딱히 황준우를 공격하고자 하는 의도도 보이지 않았다.
손을 뻗어 검은 뱀을 훑어보았지만 만져지거나 느껴지지도 않았다.
“요괴는 아닌가?”
이런 자리에 제갈량이 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라고 생각하며 입술을 핥은 황준우는 수왕검을 뽑아 들었다.
“원한은 없지만, 너무 불쾌해서 말이야.”
황준우가 느끼는 자연지기 전체가, 뱀의 존재에 의하여 점점 더 오염되는 기분. 기운을 사용하면 저런 기운을 다시 받아들여야 된다는 것 자체도 문제다.
“잘 가라.”
황준우는 냉정하게 말하며 수왕검을 수직으로 길게 그어 내렸다.
찌이익-!
대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기운만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검은 뱀의 몸이 반으로 갈라진다. 흔들림 없는 붉은 눈은 자신의 죽음조차 모르는 듯 무심하다.
스르륵-!
검은 기운이 마치 재 가루처럼 사방으로 흩어지며 붉은 눈의 일부에마저 균열이 생긴 순간.
[……!!]
뒤늦게 무언가를 깨달은 듯 붉은 눈이 크게 요동쳤다.
하나 그뿐.
이미 몸의 형체를 모두 잃은 검은 뱀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도 없었다.
“깔끔하네.”
검은 뱀이 완전히 사라지고, 조금은 상쾌해진 기분이 된 황준우가 부드럽게 웃으며 벽을 매만졌다.
“이거 억지로 퇴화(退化)시킨 건데……?”
제법 오래된 느낌이 물씬 나는 벽의 질감을 쓰다듬는 황준우의 눈이 차가운 빛을 흘렸다.
기본적으로는 황준우가 자연지기의 기운을 오래토록 불려 만든 무공서를 고서(古書)처럼 보이게 한 것과 비슷한 원리로 만들어진 벽.
다만 더 과격하고, 거친 수단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쯤 되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누가 인조적으로 함정을 만든 게 확실하네.”
진짜 진시황릉이 아니다.
완벽해 보이는 가짜.
때문에 세상은 이를 진짜라 믿고 있었다.
“심지어 뱀은 한 마리가 끝이 아닌 것 같지?”
황준우의 눈이 아직 어두운 기운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어두운 통로를 향했다.
바깥에서 보았던 검은 촉수와 같은 기운이 넘실거리며 빈 공간을 차지하기 위해 달려든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진짜 걱정되는데…….”
말과 달리, 인조적인 가짜 진시황릉에 입장한 순간부터 이상할 정도로 직감이 나쁘지 않았다. 비록 몸에 느껴지는 기분은 불쾌하지만, 적어도 황석후에게 큰일은 없을 것 같은 묘한 기분. 물론 언제나 그렇듯 직감을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다.
“빠르게 가 보자고.”
수왕검을 전면에 세운 황준우의 걸음이 앞을 향해 나아갔다.
5. 암중쟁투(暗中爭鬪)
한 손에는 거대한 목조 지팡이를, 또 다른 한 손에는 기하학적인 육망성의 문양이 그려진 고서를 들고 있던 사내가 감은 눈을 부릅뜨며 신음을 흘렸다.
“무슨 일이지, 대술사(大術士)?”
그의 바로 옆, 날카로운 눈매에 차가운 인상, 허리까지 내려오는 거친 장발을 한 사내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입구에 있던 흑영사(黑影蛇)가 소멸했소.”
“흑영사가?”
놀란 사내의 물음에 대술사라 불린 이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흘러 내렸던 검은 두건을 깊게 눌러쓰며 고개를 주억였다.
“아무래도 도술을 조금쯤 익힌 무인 놈이 명력이 깃든 무기를 사용한 것 같소.”
“도술을 조금 익힌 무인?”
사내의 물음에 대술사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주억였다.
“알고 계시겠지만 흑영사는 천안(天眼)이 열리지 않는 한 보지 못하오. 그럼에도 상대는 확실하게 흑영사를 인지했고, 검으로 베어서 소멸시켰소.”
“최소 조화경의 고수란 말인가?”
대술사의 말에 사내의 검은 눈이 묘한 빛으로 번들거렸다.
대술사가 말하는 천안(天眼)이란 상단전에 위치한 제삼안(第三眼)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는 조화경의 고수들조차 이를 인지하지 못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상단전이 열려 있기에, 그저 감각만으로도 불안하다거나 불쾌한 기분을 느낄 수는 있다. 하나 천안을 확실히 인지하고 사용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조건이 필요하다.
대술사의 말대로 도술 혹은 선술 또는 주술이나 마술이라 불리는 술의 경계에 입문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무인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힘든 일이다.
특히 무의 갈래로 경지를 높인 이들에게 있어서는 새로운 형태로 기운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사내만 하여도 눈앞, 대술사의 도움이 없었다면 평생을 술의 경계를 열지 못했을 것이다.
천안을 얻는 일 또한 없었을 터고 말이다.
“조화경 이상의 고수에, 천안을 가졌고, 명력의 무기라…….”
생각보다 대어다.
이쯤 되는 인물이 천하에 몇이나 있던가?
“내가 알기론 천하에 있어 활협단주와 천마, 그대밖에 없던 존재요.”
“진무영…….”
사내, 십만대산의 종주(宗主)이자 모든 마도의 정점인 천마 용중호가 이를 갈았다.
“그 빌어먹을 개자식 같은 녀석이 하나 더 있었다는 건가?”
이십여 년 전.
칠야의 난 당시 용중호는 너무 젊었다.
천마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껍데기에 불과할 뿐.
실제 그의 실력이 그 명성에 한참 못 미친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따지자면 이미 당시의 천마신교는 칠야무신에 의해 풍비박산 난 상태였다.
때문에 무시당했고, 짓밟혔으며, 쫓겨나기까지 했다.
그 중심에 있던 인물이 바로 진무영의 스승 검선(劍仙)이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치를 떠는 용중호였다.
‘상대의 나이가 젊어 보인다는 것까지 알면 더 큰일 나겠군.’
대술사는 내심 고개를 저으며 말을 아꼈다.
천마, 용중호는 천재다.
아마도 천하 전체를 따지다 못해 백 년 이내의 과거까지 뽑는다 한들 다섯 손가락 안에 뽑힐 수 있을 인물일 것이다.
그를 증명하듯 지금의 용중호는 가히 무림 정상의 무력을 갖춘 무인이었다. 천마라는 이름에 아깝지 않은 무위를 이룩한 것이다.
아마 죽은 칠야무신이 살아 돌아온다 한들 지금의 용중호를 우습게 여기지는 못할 터였다. 아주 먼 과거, 칠야무신의 싸움을 지켜보며 몇 번이나 감탄했던 대술사였기에 장담할 수 있었다.
그때를 생각하니 저절로 혀 차는 소리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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