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131화
제 131화
오태악의 시선이 아주 짧게 차무열을 스쳐 지나갔다.
네놈 따위에게는 지지 않겠다는 승부욕.
그를 콧방귀 뀌며 무시한 차무열이 시선을 피했다.
“다섯 명이 모두 채워졌군요.”
열화궁과 백수궁, 그리고 적룡수로채와 궁왕 오칠까지.
진무영을 비롯하여 약속되었던 다섯 사람이 모두 꽉 찼다.
아쉬움에 한숨을 토로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불만을 겉으로까지 표출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애초부터 칙령은 진무영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혼자서 모든 선택을 하지 않았다.
단 한 자리였지만 누구에게나 똑같이 기회를 준 것이다.
심지어 그 행동이 마지막 순번을 뽑는 일이었다는 의미도 컸다. 누구나 할 수 있었지만, 기회를 잡지 못한 것은 본인이다. 불평불만이 하나도 없을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사그라트린 상황인 셈이다.
‘정말 놀랍도록 뛰어나구나.’
이 자리에 모인 이들 대다수가 그런 진무영의 꾀를 알아보았다. 그럼에도 탓할 수 없는 입장이었고, 오히려 내심 감탄만을 삭였다.
애초부터 그런 재주가 진무영을 선장으로 추대하게끔 만들었다.
이제 와서 나오는 말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활협단 모임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제법 오랜 시간 모여 있었지만, 불만대로 그들을 의심할 수 있는 이들은 몇 없었다.
간단한 이유였다.
천하무림 전체가 활협단과 한통속과 다름이 없다.
아니, 애초에 활협단이 천하무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대였다. 아주 극소수, 그들과 연관이 없는 이들이 있기도 하지만 미미한 소수일 뿐. 누가 누구를 감시하고, 누가 누구를 알린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검제 그 노괴가 여기 와 있을 수도 있겠군.”
모두가 떠나고 넷만 남은 자리, 오칠이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검제의 욕심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아직은 아닐 겁니다. 남궁세가는 스스로의 욕심 탓에 보수적으로 남기 내에 스스로를 가뒀지요. 소식이 제법 늦을 겁니다.”
“그 말은 늦게라도 올 수는 있단 말 아니오?”
오태악이 콧김을 내뿜으며 물었다.
진무영은 말없이 고개를 주억인다.
동시에 오태악의 눈에서 빛이 쏟아져 나왔다.
“아주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겠군.”
오태악은 이번 진시황릉 진입에 합류하는 조건으로 남궁세가를 처단하는 임무를 맡았다. 만약 미리 검제라는 싹을 잘라 둔다면 얼마나 일이 간단해질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리 되면 좋겠지요.”
진무영도 눈을 빛내며 동의했다.
어찌 됐든 그의 입장에서도 현재 검제와 남궁세가가 눈에 밟히는 것은 사실이었던 탓이다.
“한데 그 문관 녀석의 말은 다 믿을 수 있소?”
차무열이 물었다.
“그래도 혼자 살아 돌아온 녀석 아니오?”
물론 차무열이 한 의심은 진무영도 했다.
그래서 직접 문관, 전왕을 만나 대화까지 나누어 봤다.
그 결과 진무영은 확신할 수 있었다.
“믿을 수 있습니다. 그는 간이 작고 담력이 약한 편입니다. 무인을 속이거나, 무슨 일을 저지를 정도가 되지 못하지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제주께서도 확인해 주신 부분이니 큰 의심을 하실 필요는 없을 겁니다.”
“음……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차무열이 고개를 주억였다.
“자자, 이럴 게 아니라 바로 출발합시다. 어차피 굳이 정해진 때가 있는 것도 아니에요.”
“바로?”
“그래도 되오?”
궁왕과 오태악이 동시에 물었고, 진무영은 고개를 가볍게 주억였다.
“본래 보물은 선점하는 사람이 임자 아닙니까. 지금 이러는 시간도 아깝습니다.”
진무영의 말이 맞다.
자연스레 그 뒤를 따르는 발걸음들도 촉박해졌다.
서안의 남문(南門).
최근 예민해진 분위기 탓에 더욱 경계가 삼엄해진 관병(官兵)들의 눈빛이 날카롭다. 지금 서안 내에 황궁의 직속 군인들과 황자, 황녀가 함께 있다는 사실도 그들의 어깨에 힘을 더 불어넣었다. 제멋대로 날뛰는 무림인들도 지금만큼은 관군들에게 한 수를 접어 주는 때인 것이다.
“흠…….”
한창 어깨와 눈에 힘이 들어간 관군, 일삼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눈앞의 두 남녀를 바라본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청년과 어린 소녀였다.
“헤헤…….”
등에는 잔뜩 짐을 짊어지고, 한 손으로는 소녀의 작은 손을 움켜쥔 청년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일삼을 향해 눈웃음을 짓는다.
“이름이…… 신일, 그리고 신아?”
신분증빙용 명패를 확인한 일삼의 눈이 청년 신일을 지나쳐, 아직 열 살도 되어 보이지 않는 소녀, 신아를 향했다.
“헤헷.”
신아 역시 신일과 비슷한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살짝 갸웃거린다. 그 모습이 투박한 인상의 신일과 다르게 제법 귀여워 굳어져 있던 일삼의 입가로 작은 미소가 어렸다.
“동생인가?”
“네? 네!”
일삼의 물음에 놀란 듯 되물었던 신일이 목소리를 크게 높였다. 덕분에 시선이 한 번 집중되었지만 단지 그뿐. 의외이지도 않을 정도로 관문에서는 긴장해서 저런 실수를 하는 이들이 제법 많았다.
“귀엽군. 부모님은?”
“아, 그게…….”
신일이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잠시 안타까운 표정을 지은 일삼이 이해한다는 듯 어깨를 두드렸다.
“고생을 많이 했겠구나. 들어가서 사고 치지 말고, 동생이랑 즐겁게 시간을 보내거라. 통과.”
“아! 가, 감사합니다!”
“고마워, 멋진 관군 아저씨!”
고개를 직각으로 숙인 신일이 힘차게 외치자 신아가 뒷말을 덧붙인다.
그 별것 아닌 말에 어깨에 힘을 잔뜩 집어넣은 일삼이 시선조차 돌리지 않은 채 바깥을 향해 외쳤다.
“다음!”
제법 멋있었다.
속으로 본인을 그렇게 평하며 입가로 웃음을 짓던 일삼의 고개가 문득 갸웃거렸다.
‘근데 어린 소녀치고는 너무 조숙한 것 아닌가?’
예의가 없다기보다는 기이한 일.
하나 곧 일삼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었으니, 그럴 수도 있지. 딱한 것.’
혀를 차는 일삼의 시선은 곧 생각을 거두고 눈앞에 보이는 상인 일행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걱정 가득한 그들을 향해 일삼은 본인이 가장 멋있다고 생각하는 중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짐을 풀어라.”
신일과 신아, 두 어린 남매는 남쪽 성문을 넘어서 잠시 걸어 나간 이후 똑 닮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후 신아의 날카로운 시선이 신일을 향했다.
“이 멍청이!”
이어서는 고사리 같은 작은 발이 신일의 정강이를 걷어차 버린다. 겉으로만 보아서는 귀엽기만 하고 딱히 위협적일 것 같은 느낌은 없다.
하나 흘러나온 소리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오히려 놀랍도록 날카로웠다.
“악-! 아프지 않습니까!”
눈물을 찔끔 머금은 신일이 제자리에서 펄쩍 뛰며 목소리를 높였다.
“시끄러워, 이 멍청한 제자 놈아. 혹시 누가 알아보기라도 하면 어쩔 셈이야!?”
“크으, 그러면 때리지를 마시든가요.”
“흥흥. 네가 똑 부러지게 연기했으면 긴장할 일도 없었을 것 아니야.”
“애초에 신분 패를 놓고 와서 가짜 명패를 술법으로 빚게 하신 분이 누구신데요.”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랬나!”
짧게 투덜거린 신일의 말에 팔짱을 낀 신아가 고개를 훽 돌리며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다.
“귀, 귀여워……!”
그렇게 말하며 저도 모르게 신아를 품에 안은 신일이 행복한 웃음을 흘렸다.
“헤, 헤헤. 귀엽습니다, 스승님. 너무 귀여워요.”
“이게 진짜 어디까지 기어오르려고.”
더욱 불쾌한 얼굴을 한 신아의 주먹이 신일의 머리통을 내리찍었다.
이번에도 두개골이 박살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소리가 흘러나왔지만 신일은 비명을 흘리지 않았다. 물러서지도 않았다. 두 눈에 눈물을 찔끔 매단 채로도 연신 신아의 볼에 제 볼을 비빌 뿐이었다.
“으흐, 귀여운 것은 스승님이 아마 천하제일일 거예요!”
“이게 진짜 미쳤나. 너 가끔 내 나이를 망각하는 것 같더라?”
신아는 일단 겉으로만 보면 열 살도 되지 않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었다. 하나 그 속은 노파라고 하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오랜 연륜이 쌓여 있다.
이는 그녀가 익힌 특이한 술법 탓인데, 신일 역시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한데도 불구하고 가끔 이렇게 무언가에 홀린 듯 미친 듯 달려들며 귀여워를 연발한다. 뭔가에 꽂히면 앞뒤 돌아보지 않고 달려드는 신일의 성격을 잘 아는 신아의 입장에서도 어이가 없고, 황당한 일이었다.
“곤륜(崑崙)에 계신 문주(門主)께서 이 꼴을 보면 얼마나 깊은 한숨을 쉬실꼬.”
하극상도 이런 하극상이 따로 없다.
한참이나 연배가 어린 제자가 스승을 향해 귀엽다고 달려드는 꼴이라니, 답답한 일이지만 또 어쩌겠는가?
“이 역시 내 인복이거늘.”
인연의 실이 맺어 준 그녀의 제자는 정해진 운명의 짝이었다.
그러니 싫어도 이해하고 받아 줄 수밖에.
약 일 각가량.
뭔가에 홀린 듯 미친 듯이 부비부비를 시전한 신일이 번쩍 눈을 뜨며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스승님! 부, 불민한 제자가 감히 웃어른을 못 알아 뵙고…….”
“제발 닥쳐. 이런 데서 이상한 시선 끌지 말자.”
목소리를 높이는 제자의 입을 한 손으로 틀어막은 신아가 눈을 부릅뜬다.
“읍, 읍.”
“이해했으면 고개만 끄덕여.”
“…….”
끄덕끄덕.
막고 있던 입을 연 신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 말이야. 지금 우리가 왜 여기까지 온 줄은 기억하고 있는 거지?”
“물론입니다. 아주 나쁜 악당 놈들을 때려잡기 위해서 아닙니까.”
“그래. 잘 알고 있네. 그 외의 부가 임무는?”
“정체를 들키지 않는 것?”
“사고 치지 않는 것.”
“그리고?”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슥삭 다녀올 것.”
“그중 우리가 지금 몇 개나 어겼을 것 같아?”
“어…….”
신일의 얼굴이 다시 사색이 되었다.
생각해 보니 어긴 것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죄, 죄송!”
“그만!”
머리를 숙이는 제자의 입을 빠르게 다물게 한 신아가 고개를 내저었다.
“어찌 말년에 이런 멍청한 놈을 제자로 받아 고생만 하게 되는 건지 어휴…….”
“죄, 죄송합니다. 스승님. 헤헤.”
“되었다, 되었어. 어서 빨리 방이나 알아보도록 하자꾸나.”
“어? 곧바로 진시황릉으로 가시지 않고요?”
두 사람은 이번 임무를 위해 아주 먼 곤륜산(崑崙山)에서부터 다급하게 서안까지 왔다. 그런 만큼 시간이 촉박할 줄로만 알았는데 신아가 방을 찾으라고 한 것이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하였다. 어리석은 제자야.”
“아…… 스승님의 뜻이 참으로 깊으십니다!”
“그래, 그래. 그러니 어서 방을, 따뜻한 목욕물이 가능한 곳으로 알아보도록 하여라.”
“알겠습니다, 스승님!”
신아의 말에 목소리를 또 한 번 높인 신일이 신나게 앞으로 뛰어나간다.
그 뒷모습을 뒷짐 진 자세로 바라보던 신아가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쯧쯧, 저렇게 눈에 띄게 다니는 꼴을 보니 평생 산문 밖으로 혼자는 못 보낼 상이로다. 에휴. 쯧쯧쯧.”
열 살도 되지 않아 보이는 어린 소녀가 혀를 차고, 뒷짐을 지고는 인생 고뇌가 가득한 한숨을 내뱉는다.
누구보다도 의심스러운 행색을 하고 있는 그녀가 할 말은 결코 아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