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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128화 (128/373)

학사재생 128화

제 128화

“…….”

경호는 침묵했다.

“녀석들, 괴상한 오해를 한 것 같은데. 상관없지 뭐.”

“사, 상관없다고요?”

충격 받은 표정을 한 경호의 말에 황준우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당연하지. 애초부터 중요한 건 진실이니까.”

황준우는 대수롭지 않게 팔괘술법서를 품에 챙기며 방 바깥을 향해 나갔다.

“가자, 경호.”

무심한 건지, 대범한 건지.

이해 못 할 황준우의 뒷모습을 보던 경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때의 황준우는 몇 년 후, 본인이 경호와 같은 한숨을 내쉬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한동안 만금장에는 무엇보다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사건이 있었다.

소장주와 호위무사의 뜨거운 불장난!

물론 대외적이지는 못했다.

아무래도 함부로 말하기 힘든 만큼, 그저 시녀들 사이에서 근근이 떠도는 구설수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그조차도 시녀장(侍女將)이 직접 나서 엄중한 주의를 준 뒤에는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소문의 근원지였던 시녀는 언젠가 꼭 이 내용을 엮어 책을 집필하리라는 의욕을 불태웠다고 한다.

꽤나 먼 미래의 이야기였지만, 그런 시녀의 선택은 딱히 빗나가지만도 않아 음지(陰地)의 대부호(大富豪)가 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미래의 이야기.

황준우는 말했듯이 진실이 중요하다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다.

경호는 조금 당황했지만 소문이 잠잠해지며 그때의 상황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황서연은 서시에게 붙잡혀 숙녀 교육을 다시 시작했다. 그리 좋아하는 일은 아니었지만, 함께할 때면 서시가 자주 웃고는 하니 황서연도 마냥 거부하지만을 못했다. 황준우는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라도 하루에 한 번쯤 그런 두 사람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황서연과 같은 이유였다.

그렇게 보름 정도의 시간이 더 흘렀다.

일상을 보내며, 남는 시간 대다수를 술법에 매달리던 황준우의 손끝에 드디어 작은 결실이 나타났다.

“오, 이게 광구(光球)의 술(術)인가?”

새하얀 빛 가루를 주변으로 흩뿌리는 둥근 공은 정말로 작았다. 기껏해야 황준우의 검지 두께 수준? 사실상 집중해서 보지 않는다면 육안으로 확인하기조차 힘든 크기였지만 어쨌든 황준우의 입장에서는 첫 번째로 성공한 술법(術法)이었다.

“신기하네.”

그렇게 만든 빛의 공을 이리로, 저리로 움직이며 살피는 황준우였지만 안타깝게도 허락된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눈을 몇 번 깜빡일 사이, 밝은 빛을 내던 광구가 마치 바람을 맞은 촛불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벌써?”

아쉬움에 입맛을 다신 황준우가 하단전으로부터 내력을 뽑아 상단전으로 보냈다. 놀랍게도 그렇게 상단전에 도착한 기운의 형태가 변화했다. 분명 내공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지기에 더 가까운 성질(性質)을 가진 기운이 된 것이다.

술을 발동하기 위해 이어서 필요한 일은 기운의 성질에 명확한 성격(性格)을 부여하는 일이다. 이를 들자면 광구의 술 같은 경우는 ‘빛’이라는 성격을 가진다. 그를 위한 동작은 손끝에 내력을 실어 팔괘의 형태를 취하는 것이다.

이른바 조형(造形)의 과정이다.

빛 하면 이 시대 대다수의 사람들은 가장 먼저 태양을 떠올린다. 때문에 하늘에 가까운 건괘(乾卦)를 필요로 할 것 같지만 실제 빛은 팔괘 중 진괘(震卦)에 가까웠다.

진은 벼락, 뢰(雷)다.

황준우는 그러한 벼락의 힘을 빌려 만들어진 기운을 빛의 형태로 조형했다. 이것으로 술을 사용하기 위한 기초적인 준비는 끝났다.

“광구의 술.”

마지막으로 입을 열어 주문을 발하자 황준우의 손끝에 다시 한 번 광구가 맺혔다.

하나 이번에도 사라지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게 뭐야.”

황준우의 입에서 절로 투덜거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손끝에 빛의 공을 만들어 낸다니, 실로 놀랍고 신비한 일이지만 효율이 너무 밑바닥이다. 그도 그럴 게 황준우는 방금 전 고작 눈 몇 번 깜빡할 사이에 사라질 광구를 만들고자 반 갑자 이상의 내력을 소모했다.

자그마치 삼십 년치의 내력을 사용해 고작 그 크기의 광구를, 아주 짧은 시간 유지한 것이다.

조화의 경지를 훌쩍 뛰어넘은 황준우는 거의 사용과 즉시 그 내력을 충당할 수도 있다고는 하지만 솔직히 말이 되지 않을 정도의 비효율성이었다.

“술법은 무엇보다 등가교환의 법칙을 우선으로 한다더니, 완전 헛소리 아냐?”

팔괘술법서에 적혀 있던 이야기 중 하나를 떠올린 황준우가 투덜거리는 목소리를 흘렸다.

반 갑자나 되는 내력을 이용해서 짧은 시간의 광구를 만들 정도면 등가교환의 법칙이 너무 술법 편애적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 아닌가?

“아니야. 내가 아직 술법 경지가 낮아 전환 효율 같은 게 부족한 것일지도 몰라.”

하단전과 상단전의 융통이라는 말의 답은 며칠 지나지 않아 찾았다. 이후로는 팔괘에 대해 이해해야 했고, 그를 통해 조형을 하는 과정까지 도달하는 데 보름의 시간이 걸린 것이다.

따지자면 술법의 모든 길에 있어 입문 단계.

그러니까 효율 문제라 생각을 하는 것이 역시 옳았다.

“일단 상단전으로 전환된 내력 음…… 술력(術力)이라고 하던가? 이 기운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겠네.”

다른 술법을 익히는 것은 차후의 일.

황준우는 연무장에 주저앉아 몇 번이고 광구의 술을 펼치며 효율상의 문제점을 찾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정신을 집중했다.

하나 답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하단전에서 내력이 빠져나가 상단전에 도착하고 이후 조형의 과정을 거치는 데까지 물 흐르듯 이어진다. 전혀 막힘이 없으며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더욱 문제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효율적으로 불상사가 발생할 일이 있으면 이미 기운의 전환 과정에서 어딘가 막히는 부분이 있어야 되는 탓이다.

‘근데 너무 자연스러워.’

어째서일까?

황준우는 계속해서 생각을 집중했다.

하나 몇 날 며칠이 흐르고 보름이 더 지난 후에도 여전히 답은 나오지 않았다. 아주 조금, 미세할 만큼의 효율 상승이 있기는 했지만 정말로 미세할 정도라 황준우의 입장에서는 눈에 차지도 않을 수준이었다.

결국 황준우가 알아낸 것은 반복 수련을 통해 어쨌든 조금쯤이나마 효율이 상승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였다.

그런 과정이 거의 한 달째 반복되고 나니 황준우의 머릿속에 전혀 떠올리려 하지 않았던 하나의 가설이 번쩍였다.

“서, 설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적어도 여태까지의 황준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던 말.

하지만 이쯤 되면 인정해야 될지도 몰랐다.

“나…… 재능이 없는 건가?”

무언가 마음 한편이 허전해지는 기분을 느끼는 황준우였다.

그로부터 또 보름의 시간이 흐른 뒤, 황준우는 인정하기로 했다.

“난 아무래도 술법에 재능이 없는 것 같아.”

“도련님도 만능은 아니군요.”

황준우의 당당한 선언에 경호가 어딘지 모르게 즐거운 얼굴로 답했다. 이후 무언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데 그 말을 왜 굳이 제게 하시는 겁니까?”

“왠지 동지애(同志愛) 같은 걸 느끼는 사람에게라면 위로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황준우의 말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린 경호가 냉정히 말했다.

“아무래도 잘못 찾아오신 것 같네요. 전 의도부터 불순한 도련님을 위로하고 싶지 않습니다.”

“큭, 냉정한 남자 같으니라고.”

콧방귀를 뀌는 경호 앞에 선 황준우가 등을 돌렸다.

“위로도 해 주지 않는 남자 따위 필요 없어.”

지금 황준우의 말은 분명 장난이다.

얼마 전 시녀 사건 이후로 괴로워하는 경호를 보며 즐기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

때문에 무언가 더 말을 하려던 경호는 어디선가 느껴지는 기묘한 시선에 재빨리 입을 닫고 눈을 돌렸다.

꽤나 먼 거리, 눈을 반짝이는 시녀 하나가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다. 경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재빨리 인사를 하고는 사라져 버렸지만 말이다.

“큼, 큼. 어쨌든 뭐 술법 정도 재능 없으셔도 상관없지 않으십니까?”

“아니야. 나한텐 지금 꽤나 중요하다고.”

술법은 무공의 다음 단계에 이르는 벽조차 찾지 못한 현재의 황준우에게 있어 하나의 지침서였다. 한데 성적이 이토록 지지부진해서야 의미가 없는 게 당연했다.

당연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초조함도 있었다.

‘멸망의 새라는 녀석이 언제 올지라도 알면 좋겠지만…….’

황준우는 그때를 모른다.

단지 언제고 멸망의 새가 온다는 사실만을 알 뿐.

그렇다 보니 느린 자신의 성과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황준우를 얄미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경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재능이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요. 그냥 포기 하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아닐지…….”

“포기?”

아무리 재능이 부족하다 여겨, 가슴이 답답하여도 황준우의 사전에 결단코 존재하지 않던 말이다. 물론 이 말을 들은 지금도 그 생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한편으로는 의욕에 더 불이 붙기도 했다.

“그럴 순 없어!”

여러모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노력한 탓이 크지만, 그래도 안 된다고 포기할 거면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두고 봐 경호, 내가 꼭 해낼 테니까.”

어째서인지 위로에 불타는 열의로 답한 황준우가 당당히 말하고는 다시 연무장으로 사라진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어딘지 힘이 없어 보이던 황준우의 몸에서 다시 생기가 넘치기 시작했다. 경호의 입장에서는 그것으로 충분한 일이었다.

또다시 보름, 여전히 황준우의 술법 수련은 지지부진했다. 문제를 알아야 해결을 할 텐데, 문제점을 찾지 못하니 당연한 일일 터였다.

하지만 이전처럼 답답해서 가슴을 두드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재능이 없다면 열 배의 노력으로 극복한다.’

경호와의 대화 이후, 스스로 다짐한 말이었다.

포기는 결코 생각할 수 없었다. 때문에 밤잠조차 줄여 가며 쉴 새 없이 술법을 펼쳤고, 보름이 지난 이 시점에 와서는 효율이 제법 눈에 띄게 좋아졌다. 반 갑자의 내력으로 아주 잠깐 유지할 수 있던 광구의 술이, 이제 같은 내력으로 긴 호흡을 몇 번이나 내쉴 정도로 길어졌다.

약 두 배 이상 지속 시간이 늘어난 셈이다. 크기도 제법 커져 이제는 손가락 두 개를 합친 것만 했다. 여러모로 분명한 발전을 이루고 있는 게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쯤 되어서 오히려 황준우의 고민은 다른 부분으로 이어졌다.

“아버지가 너무 늦는데?”

딱히 소식도 없이 벌써 두 달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황준우와 황서연의 복귀에 제법 안색이 좋아진 서시의 얼굴에 가끔씩 걱정이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황준우의 입장에서도 신경이 쓰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이때까지만 해도 크게 흔들리지는 않았다.

조금 늦다뿐이지 무사할 거라는 확신은 여전했다.

황준우만 하여도 여정에 나서면 몇 달씩 연락을 못 할 때가 많고 했으니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던 와중 황준우를 벌떡 일어나게 한 것은 사마정이 혈안서를 통해 전한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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