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127화
제 127화
황서연의 말마따나, 여선위의 표정은 대체적으로 천편일률적이었다. 굳어 있거나, 눈썹을 높이 세우거나. 때문에 잘 모르는 사람들은 여선위가 언제나 화를 내고 있다고 착각하기도 했다.
“아니야. 그렇게 보여도 대표두님도 굉장히 여린 분이란다.”
“그건 제 생각에도 아닐 것 같아요.”
두 사람의 대화를 즐겁게 지켜보던 황준우가 재빨리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표정을 벗어나서라도, 여선위는 그야말로 강철(强鐵)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사내였다.
아무리 거친 풍랑(風浪)이 불어도 눈썹 하나 꿈쩍하는 것이 전부일 남자.
그런 그가 마음이 여리다는 것은 분명 서시의 착각이었다.
“큰일이네. 우리 아이들이 다 대표두님을 오해하고 있으니.”
“오해가 아니라니까. 그나저나 엄마, 오늘 저녁밥은 뭐야?”
품에 안기며 볼을 비비적거리는 황서연의 애교에 한층 더 녹은 표정이 된 서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예쁜 딸은 뭐가 먹고 싶을까?”
“뭐든지 좋지. 솔직히 집밥이라서가 아니라, 장 숙수님 요리 솜씨는 최고야!”
“인정!”
이번에도 황준우가 말을 거들었다.
그 음성에 깔깔거리는 웃음을 토한 서시가 고개를 주억였다.
“호호, 그건 이 엄마도 인정할 수밖에 없겠구나.”
입가에는 계속해서 웃음이 번진다.
자식도 없고, 황석후가 사라진 칠 주야.
근심이 가득하던 그녀의 얼굴에 간만에 핀 웃음꽃에 시녀들의 얼굴에도 안도가 깃들었다. 서시가 기분이 좋지 않다고 하여 화를 내는 성격은 아니지만, 혹여나 그녀가 무슨 병에라도 걸릴까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탓이었다.
“그래도 우리 아들딸 있으니까 좋네. 마음이 너무 편해.”
“걱정 마. 한동안은 더 어디 나간다는 소리 안 할 테니까.”
“다도도 열심히 배우고?”
서시의 질문에 활짝 핀 미소를 지은 황서연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요리랑 꽃 장식, 그리고 직물 짜는 법도 이참에 배워 둬야지. 천방지축 우리 딸 시집보내기 전에 엄마가 해야 될 일이 많네.”
어째서 분명 화사한 태양을 떠올리게 하는 서시의 미소가 무섭게 느껴지는지는 모를 일이다.
“힘내, 내 동생.”
웃는 모습 그대로 황서연의 어깨에 손을 얹은 황준우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바쁘게 사라졌다는 황석후가 걱정이 된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한 믿음도 컸기에 황준우는 어렵지 않게 평범한 집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만금장의 음식은 천하제일! 내 방의 침대와 이불도 천하제일! 우하하.”
약간은 정신이 나간 듯 혼잣말을 떠들며 이불 속에 파묻힌 황준우의 얼굴에 행복이 가득 묻어났다. 아무리 대단한 경지를 이룩하고, 큰 목표를 삼았다 하여도 결국 황준우는 크게 바뀔 것이 없었다. 약관이라는 나이도 큰 문제가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어린 것은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어디서 듣기로 남자는 평생 애 아니면 개 둘 중 하나로 산다더라.
‘적어도 견(犬)보다는 애가 낫지.’
그러다 문득 황준우의 머릿속에 경호의 얼굴이 떠올랐다.
‘우리 경호는…….’
분명 개보다는 애가 낫다.
그리고 경호의 성격이 이상한 편도 아니었다.
조금 유약하게도 느껴지지만 일반적으로 따지자면 바보 같을 정도로 좋은 면도 많았다.
한데도 경호 하면 떠오르는 인상은 어째서인지 개였다.
그것도 제법 귀엽게 생긴 강아지 느낌이다.
“크흠…….”
경호가 알면 속상할 생각을 빨리 정리한 황준우가 자리에서 이불 사이로 몸을 더욱 파묻으며 뒹굴거렸다. 그러다 문득 몸을 벌떡 일으켜서는 책을 하나 가져와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잠이 오기에 침상 위에 누워 그대로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늦은 밤.
황준우를 찾으러 왔었던 시녀 혹은 경호의 기척이 남아 있었지만 끝내 깨우지는 않은 것 같았다. 아마 꽤나 곤히 잠든 듯했다.
늘 경계를 하고 있는 바깥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
“흐아암-!”
늘어지는 하품과 함께 기지개를 켠 황준우가 방의 창문을 살짝 열었다. 한겨울의 쌀쌀한 공기가 제법 서늘하다. 덕분에 정신은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흠…… 자시(子時) 말쯤인가.”
사람이 많은 만금장에서도 대부분의 식솔이 잠이 들었을 시간.
황준우 역시 누군가를 굳이 깨울 생각은 들지 않았다.
곤히 자고 있는 사람을 억지로 일으키면 신경만 예민해질 뿐이다.
무엇보다 황준우는 혼자서도 제법 잘 놀았다.
낮 동안은 혼자서 책을 보고 침상 위에서 뒹굴거렸으니, 밤에는 새벽바람을 맞으며 몸을 움직여도 된다.
“아니지.”
기초 체력을 위해 몸을 움직이려고 마음먹었던 황준우의 시선이 뒤를 향했다.
책장에 꽂힌 무수히 많은 것들과 달리 홀로 책상 위에 떨어져 나와 있는 책이 하나 있었다.
팔괘술법서.
제갈량으로부터 건네받은 기이한 책의 첫 장을 펼친 황준우의 눈빛이 변했다.
“잠들기 전에는 굳이 피곤하고 싶지 않아 읽지 않았지만, 지금은 조금 노력해 볼까나.”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팔괘술법서는 황준우의 기준에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너무나 많았다.
그 대다수는 마치 도가(道家)에서나 말할 법한 이야기였다.
“근원에 태극(太極)이 있고, 이것이 양의(兩儀)를 낳고, 양의는 사상(四象)을 나누며 팔괘(八卦)로 이어진다라…….”
책의 첫 문구를 천천히 읊는 황준우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이게 뭔 말이야?”
물론 그 밑에는 제법 친절하게 태극과 양의, 그리고 사상과 팔괘에 대한 설명이 주석으로 달려 있었다. 지식은 충분히 받아들였다. 하나 그를 이해하는 것은 또 별개의 일이다.
“그러고 보니 선술에서도 양의(兩儀)를 근간에 두어야 한다고는 했지.”
황준우는 팔괘술법서에 집착하기보다는 그나마 스스로가 길을 창안한 천조칠무에 집중했다.
물론 그조차 쉽지는 않았다.
스스로 창안하였지만 그 끝을 모르는 무공.
애초에 천조칠무에서 답을 찾지 못해 제갈세가를 찾아갔던 길 아니었는가? 하지만 팔괘술법서의 기초를 본 탓인지 이전보다는 제법 많은 가능성이 열렸다.
‘선술 역시 근간은 양의에 둔다고 했지.’
양의란 곧 양(陽)과 음(陰).
곧 하늘과 땅이다.
이미 조율의 경지에 오른 황준우는 그것이 곧 상단전과 하단전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단전과 하단전의 기를 서로 융통하여 조화시키는 것이 기본적인 술의 개념인가?’
술은 내공이 아닌 다른 힘을 사용한다.
황준우는 막연히 그 근간이 중단전 혹은 상단전이 아닐까라고 생각했었다. 한데 팔괘술법서의 첫마디를 볼 때 아무래도 생각이 살짝 틀렸던 듯했다.
하단전과 상단전.
양측 모두의 힘이 필요하다.
‘동시에 기운을 이끌어 낸다?’
황준우는 계속해서 팔괘술법서의 다음 장을 읽어 나갔다. 돌아오는 여정 중에는 집중해서 읽을 시간도 없어 훑어보듯 지나갔던 내용들이 천천히 정리되기 시작했다. 상단전이 개방되고, 증가한 뇌력의 힘이 팔괘술법서의 지식을 물 먹은 솜처럼 빨아들이기 시작한 덕도 컸다.
“도련님! 아직 기침 안 하셨습니까?”
그런 황준우의 정신을 일깨운 것은 경호의 목소리였다.
어둡던 밤에 시작한 술법에 대한 공부가 해가 쨍쨍하게 뜬 아침까지 이어졌다.
심지어 황준우는 주변이 밝아지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경호가 온 것도 모르고…….’
집이라고 해서 경계심이 풀렸다고는 해도 놀라울 정도의 집중력이 발휘된 것이다. 물론 그만큼 얻은 것도 많았다. 기본적으로 술법의 발동 원리라는 것에 대해 제법 이해하게 된 것이었다.
“일단 나가 볼까.”
총기가 반짝이는 눈빛으로 쳐다보던 팔괘술법서를 황준우가 덮는 순간이었다.
갑작스럽게 팔괘술법서로부터 연기가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불꽃이 일었다.
“……?”
잠시,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해 멍하니 있던 황준우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부, 불!?”
“불이라고요!?”
어째서? 갑자기 왜?
당황한 황준우의 외침에 놀란 경호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이어서 불타는 팔괘술법서와 그를 내력을 두른 양손으로 막고 있는 황준우를 확인한 경호가 뒤를 향해 외쳤다.
“게 아무도 없느냐! 가서 어서 물을……!”
“아니, 아니. 잠깐! 된 것 같아!”
경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불타던 팔괘술법서를 들어 올린 황준우가 조금 초췌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괜찮으십니까, 도련님?”
경호가 재빨리 곁으로 붙어 황준우의 양손을 확인한다.
당연하지만 엄청난 내력으로 감싸고 있던 탓에 화상 하나 입지 않은 말끔한 모습이었다.
“별일 아니야. 왜 갑자기 책에 불이 붙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놀란 황준우가 팔괘술법서를 다시 한 번 펼쳤다. 급하게 끄기는 했지만 어쨌든 불이 붙었던지라 일부 내용이 손실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팔괘술법서의 전반부 내용이 검은 가루가 되어 황준우의 발밑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이게 뭐야?”
종이가 불에 타서 검은 가루가 되었다.
한데 겉표지는 멀쩡하다.
심지어 타들어 간 부분을 확인해 보니 황준우가 밤새도록 익히고 외운 부분이었다. 술법에 대한 입문을 알려 주는 부분으로써, 몇 번이고 읽어 이미 머리에 각인된 내용이다.
“분명 책이 완전히 불탔었는데 말이죠.”
황준우와 경호의 시선이 자연스레 책이 올려져 있던 책상을 향했다.
약간 그을린 흔적이 있지만 그뿐, 목조임에도 불구하고 불에 덴 자국은 남지 않았다.
또다시 벌어진 신비한 일.
“그래도 외운 부분만 타 버려서 다행이다.”
아니, 어쩌면 외웠기에 탔을지도 모른다.
놀란 마음을 정리하고 숨을 가다듬은 황준우가 방 안에 아무렇게나 놓아 두려던 팔괘술법서를 품에 넣었다.
“가지고 다니시려고요?”
경호가 경계의 눈초리를 보이며 말했다.
“그럼. 혹시 또 언제 불탈지 모르는데, 집을 태울 수는 없잖아?”
“도련님은…….”
“난 불에 안타는 몸이야.”
물론 진짜로 그럴 리는 없었다.
화기(火氣)에 제법 내성(耐性)이 있으니 어지간한 불 정도야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영문을 알 수 없는 신비의 불이 아니던가?
“차라리 제가 몸에…….”
충직한 얼굴을 한 경호의 말에 황준우가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됐어, 됐어. 애초에 내 몸에 문제가 생길 정도면 경호 넌 더 위험하다고.”
“하지만 도련님 몸에 상처나 흉이 생기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나도 우리 경호 몸이 기왕이면 깨끗하고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였으면 좋겠어. 다치는 걸 원하지 않아.”
“그거야 저도 동감…….”
격한 표정으로 외치던 경호의 시선이 문득 뒤를 향했다. 경호의 외침을 듣고 다급하게 물 양동이를 들고 뛰어온 시녀 둘이 어딘지 모르게 달뜬 표정과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다.
“죄, 죄송합니다. 무, 물을 가져오라시기에!”
경호의 시선에 화들짝 놀란 왼쪽 시녀가 다급히 외친다.
“두 분! 죄송합니다! 불이 그 불인 줄은 몰랐어요! 아무쪼록 즐거운 시간 되세요!”
이어서 어째서인지, 오른쪽 시녀가 왼쪽 시녀의 입을 막고는 빠르게 뒷걸음질 치기 시작한다. 눈빛에는 어지간한 무림 고수를 압도하는 열기가 가득 차 있는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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