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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126화 (126/373)

학사재생 126화

제 126화

‘멸망의 새 이야기는 빼놓기를 잘했네.’

황준우는 의도적으로 이번 제갈세가에서 듣게 된 가장 큰 이야기를 제외했다.

직접 겪지 못했지만, 듣는 것만으로도 신비로운 제갈세가에서 나온 놀라운 이야기. 그를 받아들이는 것만도 이토록 어렵다. 특히 오백 년 묵은 인면지주와의 싸움은 일반적인 사람의 기준에 있어 압권이다.

이로써 경정산 때와 다르게 비현실적인 혹은 초자연적인 존재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것만으로 일행들 대다수의 정신이 반쯤 나갔다.

한데 세상의 멸망이 예정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현실을 외면하거나, 아니면 완전히 포기해 버리거나. 세 사람을 너무 무시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쉽게 생각하고 편히 할 이야기도 아니다.

어느 쪽도 황준우가 원하는 경우는 아니었다.

“음…….”

가장 먼저 쓴 신음을 흘린 이는 홍산이었다.

충격도 가장 큰 듯,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눈빛이 크게 떨린다.

“그래서 내단은 제갈세가에 주고 온 겁니까?”

경호의 물음에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이며 품에 갈무리했던 팔괘술법서를 꺼내 들었다.

“대신 다른 선물을 받았으니까. 이 책.”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 책을 바라보는 경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평범한 책 아닌가요?”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긴 하지.”

제법 고서(古書) 느낌이 물씬 나는 재질과 분위기였지만 그 외에는 이렇다 할 특징이나 특별한 기운은 없었다.

“제가 먼저 봐도 될까요?”

경호가 물었다.

욕심보다는 혹여나 있을 사태를 걱정하는 것이다.

제갈세가는 듣기만 하여도 신비한 가문이었고, 황준우와 다르게 경호는 모든 경계를 지울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만약 책에 안 좋은 술수를 부려 놨을까 걱정하는 마음. 따지자면 황제가 먹을 음식에 먼저 입을 가져다 대는 내관(內官)이 되겠다는 뜻이다.

“그럴 필요는 없어. 사실 이미 첫 장 정도는 펼쳐 봤거든.”

“그냥 책이야. 보시다시피. 글이 잔뜩 써져 있는.”

황준우가 피식 웃고는 책장을 넓게 펼쳐 경호를 향해 보여 주었다.

이후 경호의 얼굴이 또 한 번 기묘하게 변했다.

“없는데요?”

“아무런 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백지 아닙니까?”

경호의 말에 화들짝 놀란 황준우가 재빨리 책을 돌려 제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다행히 여전히 검은 글씨가 빼곡히 차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소리야. 이렇게 잘 써져 있는데.”

황준우가 책을 상 위에 올려 놓고 모두가 볼 수 있게 양팔을 펼쳤다.

한데 반응이 이상하다.

세 사람 모두 오히려 황준우를 이상하게 바라본 것이었다.

“오빠, 진짜 아무 글씨도 없는데?”

“사실입니다.”

경호의 말이 옳다는 것을 황서연과 홍산이 확인 사살 시켜 준다.

“이거 그러면, 글도 내 눈에만 보이는 건가?”

황준우의 물음에 진중한 얼굴이 된 세 사람이 하나가 된 듯 동시에 고개를 주억였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 세 사람 눈에는 그냥…… 진짜 백지거든요.”

“거, 참. 신기한 일이 갈수록 늘어나네.”

“그러게 말입니다.”

황준우의 말마따나, 어느 순간부터 그들 주변에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가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단순히 우연이라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잦은 일이다.

“뭐, 어차피 세 사람에게 필요한 건 아니니까.”

“책 내용이 어떤 건데?”

“술법에 관한 이야기야.”

“술법?”

황준우의 대답에 양손을 모은 황서연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혹시 책 내용대로 하면 술법을 익힐 수 있는 거야?”

“아마 그럴 것 같은데.”

부담스러운 시선에 살짝 뒤로 물러난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인다.

“나도 알려 주면 안 돼?”

예상했던 질문이다.

“안 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해진 답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어째서?”

“너 너무 자신만만한 것 아니야? 무공과 술법 양측을 동시에 익혀서 대성할 수 있다고 생각해?”

“어…….”

황준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 동생이 아니라도 재능이 훌륭하다는 건 인정해.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나누어도 된다는 뜻은 또 아니야. 아직 갈 길이 한참은 남았잖아?”

황준우의 말에 잠시 욕심을 부렸던 황서연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그러게.”

재능 덕에 빠른 속도로 성장하여 벌써 절정의 무인이 되었지만 드넓은 천하의 기준에서 따지면 고작이라고 볼 수 있는 수준이다.

“아직 강호에는 우리 연이보다 강하고 무서운 사람들이 엄청 많단다.”

또는 그녀보다 약해도 얼마든지 위협을 줄 수 있는 존재들도 많다.

황준우의 진지한 충고에 황서연이 고개를 주억였다.

“알겠어, 오빠. 더 열심히 무공 익힐게.”

“좋은 생각이야.”

제법 말을 잘 알아듣는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황준우의 입가로 미소가 떠오를 때였다.

“한데 도련님은 그 술법서를 어디다 쓰시려는 겁니까?”

“응? 당연히 익혀 보려고.”

그 말에 경호와 황서연의 눈이 동시에 가늘어졌다.

분명 어딘가 말의 앞뒤가 맞지 않다.

황준우가 황서연에게 한 조언은 분명 재능을 낭비하지 말고 무공에 모두 쏟으라는 것 아니었던가? 한데 본인은 다른 길을 가겠다고 한다.

“아, 난 그래도 돼. 왜냐면 난…….”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자신감 넘치는 시선을 한 황준우의 입이 가볍게 벌어졌다.

“그냥 천재가 아니라 초 천재거든.”

아주 대범한 잘난 체가 시작되었다.

“솔직히 내 입으로 말하기는 뭐하지만 말이지. 천하강호에 있어 나보다 강한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아니, 있기나 할까? 그러니까 조금쯤은 한눈을 팔아도 된다는 거지.”

“재수 없어.”

황서연의 솔직한 음성에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괜찮아. 사실이니까.”

“정말 밉습니다.”

“음, 천재는 모두의 시기와 질투를 받는 법이지.”

“주공…….”

홍산마저도 눈을 감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기가 죽을 황준우는 절대 아니었지만 말이다.

황준우는 모두의 시기와 질투를 한 몸에 받으면서도 웃었고,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솔직히 다른 방법도 없었고 그가 상식을 벗어난 수준의 천재란 것도 일단은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황준우가 조금 더 친절하게 조화의 경지를 넘어 조율의 경지, 그리고 그 망망대해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면 굳이 그런 힐난 어린 시선을 받지 않아도 됐을 확률이 높다.

문제는 그렇게 하면 앞으로 조화의 경지까지 성장해야 할 세 사람이 너무 한정적인 답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었다.

황준우가 무공의 경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일부만 하고는 자주 뒤로 미루거나 하는 이유도 바로 이 탓이었다.

초절정의 경지 때에도 그랬지만 틀에 정해져 있는 한정적인 답을 가지게 되는 것은 무인에게 있어서 오히려 독이다.

몸을 사용한다고 하지만 무공 역시 하나의 공부(工夫). 단순히 강제로 주입하듯 외우기만 하여서는 결코 벽을 무너트릴 수 없다. 상황에 따라, 그리고 여건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지는 것이 바로 무공이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소주우(小宇宙)라고도 불리는 본인의 육신에 관한 부분이었다.

똑같은 초절정의 고수라고 하여도 펼칠 수 있는 강기의 특징이 다르듯, 조화의 경지는 더 그 변화의 폭이 무수하다. 그 차이를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고 남이 정해 주는 답에 얽매여 고심한다면 조화의 벽을 마주 본 채로 일생을 끝내야 할지도 모른다.

만류귀종(萬流歸宗).

반대로 말하자면 도착하는 목적지는 같지만, 그를 향하는 방법은 만 가지나 된다는 뜻이다. 무공의 벽이 그러했다. 일행들에게 황준우가 가진 답과 길만을 알려 주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황준우는 다소 농담 섞인 잘난 체로 이야기를 마무리 지은 것이었다.

나름대로 마지막 말미도 남겨 두었다.

세 사람 중 한 명이라도 언젠가 황준우에게 도전해 오십 초 이상을 겨루게 되면 술법도 전수해 주겠다. 그 말에 누구보다 의욕을 불태운 것은 황서연이었다. 백 초도 아니고 그 절반인 오십 초라면 어떻게든 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듯했다.

경호와 홍산은 가능할까라는 의문을 가진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아는 황준우의 기준으로 따지자면, 초절정에 오른 지금도 오십 초는커녕 십 초나 버티면 다행이었다. 당연히 도전자는 당장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일행들을 달랜 황준우는 다시 무한으로 향했다.

갑작스러운 여정에 제대로 무한을 둘러보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무한에서의 보름이 더 흐른 뒤, 황서연이 미련이 없다고 선언한 이후로는 드디어 만금장으로의 복귀를 결정했다.

애당초 황서연의 첫 여행 목적치고는 생각보다 길어진 여정이다.

추운 겨울이 시작되고도 시간이 더 흘러, 열아홉이었던 황준우의 나이가 어느덧 약관에 이른 시기였다.

2. 사라진 아버지

일행들이 모두 무사히 만금장으로 돌아왔다.

근 반년 만, 나이를 한 살씩 더 먹은 자식들과의 만남에 서시의 얼굴에 누구보다 웃음꽃이 피었다. 두 자식을 품에 안은 그녀는 행복한 얼굴로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황준우와 황서연은 확연히 집에 돌아왔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따뜻함 그 이상의 무언가, 포근함을 넘어서는 행복이 가득 깃든 어머니의 품이란 그런 것이었다.

이후 황준우는 언제나처럼 황석후를 만나려 했다.

하나 아쉽게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버지가 서안에 가셨다고요?”

“그래, 무슨 일인지 칠 주야 전쯤에 급하게 떠나셨단다.”

거대한 상단의 상주이지만 황석후가 직접 움직이는 일은 드물다. 너무나 거대한 만금장의 주인이라는 입장에 선 황석후가 할 일은 언제나 한 걸음 뒤에 서, 시기와 능력에 맞춰 인재를 부리는 일이다.

또한 흔들릴 수 있는 중심을 굳건히 지켜야 한다.

어지간하면 한 무리의 수장이란 존재가 본가(本家) 혹은 본단(本團)을 잘 떠나지 않는 이유다.

한데 황석후가 직접 움직였다.

그건 그만큼이나 큰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무슨 일인 줄 혹시 알고 계세요?”

“글쎄……, 자세한 이야기를 할 새도 없이 바쁘게 가셨단다. 대표두님께서 함께 가셨으니 탈이야 있겠냐마는…….”

서시의 얼굴에 짧은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다.

부부 금슬이 아직까지도 철석같은 두 사람이니 칠 주야라는 시간도 결코 짧게 느껴지지만은 않을 터였다. 심지어 아직 돌아올 예정조차 모른다고 하니 더 갑갑할 테고 말이다.

“괜찮을 거예요. 아버지께서 아무 대책 없이 쉽게 움직이실 분도 아니니까요.”

“맞아. 거기다가 그 무서운 아저씨도 같이 갔다며?”

황준우의 말을 황서연이 받았다.

어린 시절 우연히 마주쳤던 여선위의 인상이 워낙 흉악하여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그녀의 말에, 서시의 입가로 웃음이 떠올랐다.

“호호, 그런 말 하면 못써. 대표두께서 들으신다면 얼마나 상처 받겠니.”

“말도 안 돼. 난 그 아저씨가 상처 받는다는 것 자체가 상상이 안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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