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125화
제 125화
“내가 술법을 필요로 하는 건 어떻게 알고?”
“도움이 될 거라고 말했잖아.”
제갈량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고, 황준우는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어쨌든 고마워. 이 책이 있으면 고민하던 부분이 조금 더 해결될 수는 있겠지.”
“별말씀을.”
“그럼 이제 난 가야 되겠네?”
“호호, 그러면 안 가고 평생 여기 있으려고? 제갈세가의 영역에 살기 위해서는 가솔이 되는 수밖에 없는데. 뭐, 나야 나쁘지 않다마는.”
호선을 그린 제갈량의 눈이 제법 요사스럽게 황준우를 훑었다.
“사양하겠어.”
재빨리 뒷걸음질 치며 그로부터 벗어난 황준우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쉽네. 강한 무인은 취향인데 말이지. 너무 단호해.”
“거기 계신 분만큼은 아닐 것 같은데. 무엇보다 애초에 진심도 없이 그러는 것 취향 아니라고.”
“진심 까짓 거, 살면서 만들면 되지.”
“그만, 그만. 여기 어떻게 나가는 거야?”
혀를 차는 것과 다르게 백우선을 저어 안개의 일부를 헤친 제갈량이 검지를 들어 올렸다.
“이 길로 쭉 나가면 곧장 바깥이야.”
“친절해서 좋네. 늘 그랬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러게. 내 짝이 된다면 그럴 수도 있을지 모르는데.”
미련을 못 버린다.
어째서인지 영문을 모른다고 생각한 황준우가 고개를 내젓고는 안개가 벌어진 틈새에 섰다.
“뭐, 인연이 되면 또 보자고.”
그 말로 끝.
미련 없이 안개 바깥으로 뛰어나가는 황준우의 뒷모습을 보던 제갈량이 혀로 입술을 핥았다.
“아쉬워, 진짜 아쉬워. 옆에 놓고 키워 볼 만한 재간인데.”
“그래서 파 일족의 술법서까지 주신 겁니까?”
그런 제갈량의 뒤, 입을 닫은 채 망설이고 있던 젊은 가솔이 다가와 묻는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한 듯했다.
“현이 너는 내 결정이 못마땅한가 보구나.”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가주님의 결정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다만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보물이 아닌지…….”
젊은 남성이 당황한 표정으로도 단호하게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파의 일족.
지금은 잊힌 이름이지만, 그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들의 술법서는 인과의 법칙에 따라 화(禍)로 돌아올 확률이 높을 정도의 큰 보물.
본인은 모르겠지만 기실, 황준우가 홀로 인면지주를 처단하고 내단까지 양보하지 않았다면 꺼내 놓을 수도 없었을 물건이었다. 상응하는 대가 없이 큰 보물을 가지면 분명한 역풍(逆風)을 맞게 될 테니 말이다.
“등가(等價)에 완전히 합일하지는 않아도, 인면지주의 내단을 공양해서 복을 사기로 약속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거야. 그래도 작은 화가 닥치는 일쯤은 피할 수 없겠지만, 그쯤이야 나를 단호하게 차 버린 교훈으로 치자고.”
여느 때와 다름없는 듯 말하는 그녀를 보며 제갈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닌 척해도 이는 제갈량의 이상할 정도의 집착.
오랜 시간 그녀의 곁을 지켜 오며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모습이다.
“혹시 그에게 희망을 가지시는 겁니까? 말도 안 됩니다. 가주께서 이미 백택(白澤)께 하셨던 이야기 아닙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쉿. 현.”
젊은 가솔, 제갈현의 격정적인 외침을 작은 목소리의 짧은 말과 입가에 가져다 댄 손가락 하나로 막은 제갈량이 어딘지 모르게 쓴웃음을 그렸다.
“알고 있어.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너도 그렇고, 나도 그래. 결국 살아 있는 생명이니까.”
약속된 시간에 다가올 멸망은 그 누구도 막지 못한다. 아무리 위대한 존재라고 한들 고작해야 시간을 미루는 것이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일. 때문에 절망적이다. 어둡다. 희망이라는 단어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이 하고 있는 일 역시 살아 있는 생명체로서 할 수 있는 작은 발악일 뿐.
“그래, 생명이니까 어쩔 수 없는 거야. 살아 있다면 그 누구도 자신의 허망한 끝을 원하지 않아. 어리석더라도, 때로는 빛을 바라보게 되지.”
그 말과 함께 제갈량이 등을 돌렸다.
벌써 반 시진에 가깝게 자리를 비웠다.
본래의 그녀에게는 허락되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긴 시간. 어서 돌아가서 본래의 업무를 시작하지 않는다면 막을 수 없는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이다.
“바쁘네. 힘을 내야겠어.”
목소리만큼이나 힘이 들어간, 또 쓸쓸해 보이는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제갈현의 눈빛에는 안타까움이 깃들었다.
안개를 가르고 다시 진법의 바깥으로 돌아온 황준우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거참, 신기하네. 정말 감쪽같잖아.”
고작 몇 걸음 옮겼을 뿐인데 안개 속에 감춰진 제갈세가가 완전히 사라졌다. 대신해서 보이는 풍경은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질릴 정도의 융중산 그 자체다.
“제갈세가…….”
세간에는 그저 오대세가 중 하나로만 밝혀져 있다.
무공은 그리 뛰어나지 않으나 전체적으로 지적 재능이 발달하였으며, 뛰어난 군략가와 진법사(陣法士)들이 모인 집단. 하지만 고작 그것뿐일까?
“그럴 리가 없지.”
황준우는 고개를 내저었다.
진법이라는 것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제갈세가에서 그가 보아 온 풍경들은 놀라울 정도였다. 고작이라는 단어 따위에 그칠 수 없는 신비하고도 환상적인 힘들. 만약 제갈세가가 천하를 좌지우지하고자 마음먹었다면 그 앞을 막을 수 있는 이들이 몇이나 될까? 잠시 고민하던 황준우는 고개를 내저었다.
“없겠지.”
아마 현재의 무인들 중 제일이라고 자신하는 황준우 본인도 제갈량의 끝을 모른다.
혹여나 나중에 그녀가 자신이 실제 공명 혹은 그의 환생이라 밝혀도 놀라지 않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잊자, 잊어.”
자신이 머물렀던 진법 내의 공간과, 인면지주의 시체가 있던 장소까지 한 바퀴 크게 돌아본 황준우는 일단 머릿속에서 제갈세가에 대한 고민을 지웠다.
어째서인지 지금의 제갈세가는 굳이 경계를 해야 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적(敵)과 아(我)를 제외하고라도 현재의 제갈세가는 분명 무슨 한계에 묶여 있다.
지금 황준우가 생각해야 될 일은 오히려 그런 제갈세가에서 얻은 단서, 바로 멸망의 새에 관한 것이었다.
‘멸망의 새라…….’
물론 이 역시 그렇다 할 실질적인 무언가는 없었다.
단지 그 이름처럼 무시무시한 일을 벌일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뿐. 그리고 누군가는 그러한 멸망의 새를 막아야만 한다.
“막지 않으면 멸망이라…….”
이 무슨 괴이하고 끔찍한 전제인가 싶지만 이름의 뜻을 생각하자면 마냥 부정할 수만도 없다.
‘할 수 있을까?’
황준우는 제갈량의 모든 것을 알 수 없었다.
다만 덤덤해 보이는 그녀가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하고 있으며, 절망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만은 잘 알았다. 그 끝을 모르는 제갈량조차도 그렇게 버티는 게 한계인 현실이다.
의문이 떠오르는 게 당연했다.
다행인 것은 그 뒤 의문은 곧바로 해소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어쩔 수 있나. 해야지.”
황준우의 입가로 웃음이 떠올랐다.
적의 실체조차 모르는 주제에 오만하다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는 분명 내뱉은 말대로 해내야만 했다. 막아야 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전생과 다르게 현생의 그는 어깨에 얹어진 무게에 짓눌리기에는 지킬 것이 너무나 많았다.
그 소중한 모든 것, 무엇 하나 잃고 싶지 않다.
마음을 어렵지 않게 가다듬은 황준우의 걸음이 곧장 와룡촌을 향했다.
객점 내에서 쉬고 있을 줄 알았던 세 사람은, 아직 입구에 서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다들 안 들어가고 뭐 해?”
“오빠!”
“어, 도련님. 금방 오셨네요?”
황준우가 말을 걸자 두 사람이 가장 먼저 음성으로 반긴다.
홍산은 고개를 숙여 묵묵히 자신을 알릴 뿐이다.
“금방?”
황준우는 경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꽤나 오래 걸리실 줄 알았는데 일 각 정도 계셨던 것 아닙니까?”
“일 각이라고? 고작 그것밖에 안 됐어?”
황준우의 눈이 다시 큼직해졌다.
제갈세가에 들어갈 당시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나와서도 해가 중천에 있기에 조금 의아하다고는 생각은 했었다.
시간을 알 수 없는 제갈세가의 영역이었지만 체감만으로도 반나절은 지난 느낌이었던 탓이다.
‘기분 탓이라고만 여겼는데…….’
황준우의 반응에 오히려 경호가 놀란 눈으로 황서연과 시선을 주고받는다.
“오빠 진짜 일 각 정도 있다가 왔는데?”
“음…….”
황준우는 짧은 신음을 흘렸다.
일반적으로 진법 내에 있어 시간 감각이 둔해졌다고 생각하는 게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답이었다.
하나 일반 사람도 아니고 조율의 경지에 오른 황준우의 감각이 그토록 빨리 둔해진다는 게 말이 되는가? 단순한 진법의 효과?
‘아니면 진짜로 시간상의 괴리가 있다든지?’
편의상 진법 속 제갈세가라고 말을 하였지만, 황준우는 그곳에 있는 동안 마치 다른 세상에 있는 기분을 느끼곤 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영문을 알 수 없는 대화도 어느 정도 답이 보였다.
“이게 말이 되나…….”
물론 이해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지만 말이다.
“뭔데,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야?”
황서연의 눈이 호기심에 반짝거린다.
그녀 역시 제갈세가 내에 들어가고 싶었는데 단 한 문제도 맞히지 못해 강제로 쫓겨난 처지였다. 안타까움은 황준우의 이야기로 풀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단 난 제갈세가에서 약 반나절가량 있었던 기분이거든.”
“반나절?”
“착각하신 것 아닙니까?”
“우와, 경호. 설마 나 무시하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
“나도 정확하게는 모르겠는데 짐작은 몇 개 가네. 아, 다들 밥은 먹었어?”
“너무 맥락 없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리고 밥이야 출발 전에 먹었지 않습니까.”
“아, 맞다. 고작 일각이 흘렀다고 했지.”
잠시 턱을 쓰다듬은 황준우가 객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 안에 들어가서 차나 한잔하면서 대화하자고. 제법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거든.”
황준우의 말에 비단 황서연뿐 아니라 경호와 홍산도 호기심에 눈을 빛냈다.
그렇게 네 사람이 객점에 들어섰고, 차를 시키고는 짧은 침묵이 흘렀다.
“일단 제갈세가에 대한 첫인상은, 뿌옇다고 해야겠네.”
“뿌옇다고?”
황서연이 의아한 듯 되물어 왔다.
“우리가 본 안개가 가득 껴 있어서 앞을 분간하기도 쉽지 않은 느낌이었거든.”
“아…….”
황준우는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 가며 최대한 상세하게 제갈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필요 없다고 볼 수도 있는 이야기였지만, 나름대로 황서연을 향한 배려였다. 다행히 경호와 홍산도 지루한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때때로 감탄 혹은 탄성을 흘리며 박수를 치기도 했다.
제갈량의 등장에서는 모두가 가장 먼저 공명을 떠올리며 되묻기도 했다. 물론 황준우도 정답을 알지 못하기에 확신은 하지 못했다.
이후 명력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인면지주와 싸운 사건, 그리고 내단을 처음 본 것과 보상을 받고 돌아오기까지를 천천히 풀어 놓은 황준우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체적으로 어딘지 눈이 반쯤 풀린 모습이었다.
믿기 힘든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풍경이라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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