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재생-123화 (123/373)

학사재생 123화

제 123화

“함정에 빠지지는 않네. 쓸데없는 질문은 아니야.”

스읍, 하아.

편죽을 깊게 빨고 내쉰 그녀가 재를 털고는 허공에 머물던 시선을 돌려 황준우를 직시했다.

“명력. 네가 알고 있는 대로 이름의 힘이지. 시공을 초월하고, 현실을 부정하여, 역사를 재현(再現)하는 논리로 이루어진 신비. 그게 바로 명력이야.”

“끝……?”

“명력에 대해 알려 달라며.”

“아니, 너무 허술하지 않아?”

“수많은 허(虛)에 실(實)이 숨어 있는 법.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답을 알려 줬다고 생각해.”

“성격 고약하네.”

“그런 소리 자주 들어.”

누구에게?

또다시 호기심이 일었지만 묻지 않았다.

정말 쓸데없는 질문이라 여긴 탓이었다.

‘어떻게 하지?’

근래 들어 가장 궁금해했던 명력.

거기에 대해서 질문을 하였는데 생각보다 얻은 정보가 적다. 다시 한 번 돌려 질문을 하면 달라질까? 의미가 없을 확률이 높다.

고민이 더욱 깊어졌다.

‘무공? 조율 이상의 경지로 나아가는 법?’

제갈량의 무공은 절정 이하다.

한데 조율 이상의 경지를 알까?

왠지 물으면 대답해 줄 것만 같다.

하나 안다고 하여도 그를 행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고민에 고민이 이어지고, 한 시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제법 긴 시간이었지만 제갈량은 이전과 달리 재촉하지 않았다.

느긋하게 편죽을 피우고, 백우선을 부치며 기다리고 기다렸다.

그 끝에 황준우의 입이 힘겹게 열렸다.

“세상에 무슨 변화가 생긴 거지?”

황준우는 본인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건넨 질문인지 몰랐다. 질문이 너무 두리뭉실하다. 아니, 애초에 그를 벗어나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일이다.

막말로 황준우에게 있어 세상일 따위, 그와 만금장을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아무렴 상관없는 측에 속했으니 말이다.

“예상외의 핵심이네.”

한데 제갈량이 놀란 반응을 보인다.

“감이 좋은 편 정도가 아니라 무서울 정도야. 두 번째 아니, 세 번째인가?”

황준우와 같이 직감이 좋은 인물이 셋이나 된다는 말인가?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그녀가 다시 자세를 똑바로 하였다.

“질문 자체는 조금 틀렸어. 변화가 아니라 예정된 미래가 찾아오고 있을 뿐이니까. 그래도 대답은 해 줄게.”

“예정된 미래?”

“가장 오래된 멸망의 새가 삼라만상(參羅萬像)의 경계를 넘어 진리(眞理)를 세우고자 날갯짓을 하니, 천문(天文)이 뒤틀리고 별빛의 흐름은 길을 잃어버리리라.”

제갈량의 말이 끝나고 또다시 짧은 침묵이 흘렀다.

“이번에도 그게 끝이겠지?”

제갈량은 대답 대신 눈웃음을 그리며 고개를 주억였다.

다행인 것은 이번 질문에 대한 답은 황준우가 전혀 알지 못하던 종류였다는 것이었다. 또한 제갈량의 그 음성에서 아주 무거운 무게감을 느꼈다.

“대체 태곳(太古)적 멸망의 새가 무슨 말이야?”

태고라는 단어와 멸망이라는 이름.

무엇 하나 가볍지가 않다.

그 말이 농담 따먹기가 아니란 직감이 더욱 두려웠다.

“질문의 횟수가 끝났어. 더 이상은 나도 대답해 주지 못해. 미안.”

의외로 제갈량은 진심 담긴 사과를 하고 있는 듯했다. 마치 말을 해 주고 싶어도 못 하는 것 같은 모습. 입술을 깨물고 손을 쥐락펴락하며 한참을 망설이는 황준우의 몸에서 기세가 피어오른다.

그녀를 속박하거나, 묶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당장에라도 찢고 헤쳐 버릴 기세.

하나 끝내 폭발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무력(無力)한 기분은 또 처음이네.”

힘을 사용한다 한들 무엇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탓이다.

“미안해.”

제갈량이 다시 한 번 사과를 건넸고, 황준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 그보다 태곳적 멸망의 새라는 녀석이 나타나면 그 이름값을 하는 건 분명하겠지? 명력을 생각하자면 말이야.”

제갈량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미소를 흘렸다.

“스승님이 앞으로 어떻게 살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라고 했는데, 예상외의 답을 찾아 버렸구먼. 그런 게 진짜 찾아올지도 모르면, 누군가는 막아야 하는 거잖아?”

황준우는 한숨을 쉬었다.

자세히는 모른다.

만약 제갈세가가 보여 준 신비한 힘과, 제갈량에게서 느껴지는 현기(玄機)가 아니었다면 코웃음 쳤을지도 모른다.

솔직히 실감도 나지 않았다.

전생에 천하공적(天下公敵)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지금 그가 하려는 일이 어울리지 않다는 것도 분명했다. 그래도 해야만 한다. 대단한 영웅심이나, 무슨 큰 포부가 있는 탓은 아니었다.

“가만히 놔두면, 우리 경호도, 홍산도, 연하도, 그리고 만금장…… 내 가족들이 위험해지는 거니까.”

문득 자신의 재생이 바로 이를 위함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원공 영감 설마…….’

우연한 부활이라 여겼지만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면 어떨까? 말도 안 되는 일인 것 같지만 또 가능성을 접어 둘 수가 없다. 불성이라 불리며 부처님과도 통하였다는 원공이다. 그런 그라면, 어쩌면 태고, 멸망의 새에 대해 알고 있지 않았을까?

“젠장, 원공 영감에 대해서 물어볼걸.”

떠올리고 나니 드는 생각이지만 이미 제갈량의 입은 닫혔다.

황준우는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그럼 난 이만 가야겠네. 질문도 더 하지 못하고, 의미도 없으니까.”

물론 궁금하고, 답답한 것은 너무나 많았다.

하나 어쩌겠는가? 방법이 없는 것을.

“잠시.”

그런 황준우의 발을 제갈량이 붙잡는다.

혹시 하는 기대를 담아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내저을 뿐이다.

“질문은 이제 끝. 다만, 부탁이 하나 있어.”

“부탁?”

“네가 진법을 헤쳐서 안 그래도 힘든 일이 생겼다고 했지?”

“왠지 안 들어주면 안 된다는 것 같은 반 협박 느낌인데.”

“그런 건 아니야. 진법에 대한 대가는 이미 치렀으니까. 오히려 부탁인 만큼 네가 들어준다면 보답을 하겠지.”

“보답?”

“지금 네게 필요할 수 있는 보답.”

황준우의 눈이 반짝였다.

지금의 그에게 필요한 것은 참으로 많다.

그중 한 가지라도 메울 수 있다면 이번 융중산행은 반 이상 성공한 것.

아쉬운 마음이 많았는데 기회가 생겼다.

“뭔데?”

“진법의 일부가 무너지면서, 봉인해 두었던 인면지주(人面蜘蛛)가 풀려났어.”

“인면지주? 사람 얼굴을 한 거미 말이지?”

인면지주 역시 산해경에 나오는 요괴 중 하나였다.

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영소도 보았고, 명력에 대해서도 알았다.

그리고 태곳적 멸망의 새도 나타난다고 하는데 인면지주쯤이야, 코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맞아. 녀석은 제법 강력한 요괴고, 보다시피 나를 비롯해서 우리 제갈세가에는 제대로 된 무인이 없거든.”

“그렇구먼. 잠깐, 근데 인면지주 같은 게 왜 융중산에 봉인되어 있던 거야?”

제갈량은 대답 대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것 역시 질문에 속한단 말이지.”

황준우는 아쉬움에 혀를 차면서도 내심 미안한 마음이 더욱 커졌다.

과정상 황준우의 행동으로 인해 제갈세가의 진법 속에 갇혀 있던 요괴인 인면지주가 풀려났다. 아마 제갈량을 비롯한 제갈세가의 그런 인면지주를 바깥 세상에 나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꽤나 갖은 고생을 했을, 혹은 하고 있을 터였다.

“가능할까?”

“섭섭한 말씀 하시네.”

비록 혼자만이 높은 줄 알았던 세상 속에서라고는 하지만, 전생의 천하제일인이었던 몸이다.

“애초에 내 탓이라고도 하니까. 말만 해, 내가 잡아 주지.”

황준우가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자신 있게 말했다.

“좋아. 그럼 안내할 사람이 필요하겠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난 제갈량이 사뿐히 걸어 가주전의 문을 열었다.

운무가 가득한 제갈세가의 신비한 풍경.

“멀지는 않아. 따라와 봐.”

그 속으로 맨발로 한 걸음 내딛은 제갈량이 갑작스럽게 휙 하니 멀어져 작은 점이 되어 버린다.

‘경공도 아닌데?’

이 역시 무슨 진법의 일환일까?

황준우는 생각을 잇는 대신 유령신보를 극성으로 펼쳤다. 계속 두고만 보았다가는 제갈량을 놓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덕분에 순식간에 멀어지는 제갈량을 빠르게 쫓을 수 있었다.

“굉장하네. 축지(縮地)를 쫓아오다니.”

“이것도 진법이야?”

“질문에 대답은 못 해 준다니까.”

“정말 야박하구먼.”

“후후.”

무공 외의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은 확실히 밝혀졌다.

절정지경으로서는 보일 수 없는 속도로 이동하는 그녀의 옆에 선 황준우의 눈이 자연지기를 읽기 시작했다. 경공술이 아니라면 역시 답은 그를 통해 찾을 수밖에 없다 생각한 탓이다. 그를 통해 원리를 어느 정도 이해한 황준우가 어이없는 음성 흘렸다.

“땅의 기운을 접었다 폈다? 이거 뭐야, 이래서 축지라고 한 건가?”

따라 하려고 해도 어떻게 해야 될지 감이 잡히지 않을 정도다.

제갈량은 그런 황준우를 오히려 놀란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그런 두 사람의 귓가로 갑작스러운 괴성이 울려 퍼졌다.

[키에엑-!]

인면지주다.

운무 속, 마치 거대한 언덕을 떠올리게 하는 거미의 형태를 보며 황준우가 혀를 찼다.

“지독한 울음소리인데? 절정 이하의 무인은 울음소리만 들어도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지겠어.”

“부담이야?”

“설마. 내가 바로 전대 아니, 아마 지금도 천하제일인일걸?”

이전에는 고금제일이라고도 했는데, 솔직히 이제 와서는 그렇게 떠들 자신 감은 없었다.

어쨌든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잘난 체를 한 황준우의 시선이 운무 너머, 인면지주의 모습을 직시한다.

일단 얼핏 보인 그림자만큼이나 크다.

다리는 여덟이며 본래 거미의 눈이 있어야 할 위치에는 사람의 머리가 둥실둥실 떠 있다.

[키에엑-!]

듣기조차 괴로운 신음을 내지르는 입은 그 아래 끔찍하게 벌어진 괴물의 주둥이다. 무시무시한 인면지주가 마구잡이로 날뛰고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원형으로 펼쳐진 진법 바깥으로는 나가지 못하는 듯했다. 또한 봉인의 여파인지 몸의 이곳저곳에 적지 않은 상처가 보였다.

주변에서는 문사복을 입은 제갈세가의 문인들이 양손에 모으고 부적을 든 채 무언가를 읊조리고 있었는데, 솔직히 그렇게 믿음직한 풍경은 아니었다.

“어떻게든 붙잡아 두고는 있다만 지쳐 쓰러질 쯤에는 우리도 꽤나 힘이 빠지겠지. 어쩌면 우리가 먼저 쓰러질 수도 있고. 고된 상황이야.”

제갈량과 함께 인면지주의 인근에 도착한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이거, 가까이서 보니까 더 호감형이 아니네.”

“요괴에 호감형을 따지다니. 취향 참 이상하네.”

“잘됐지. 호감형이면 죽이기 미안하잖아.”

봉인을 펼치고 있는 문사들 앞에 선 황준우와 제갈량이 가벼운 농담을 나누었다.

[키에엑-!]

인면지주는 황준우와 제갈량을 발견하고는 괴성을 더욱 높이며 눈 대신 자리 잡은 사람의 얼굴을 크게 일그러트렸다. 그렇다고 해도 진법에 갇힌 상황에서 놈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미친 듯 발광을 떠는 일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진짜 괜찮겠어? 놈은 일반적인 인면지주와는 달라. 봉인 속에 갇혀서 거의 오백 년을 넘게 살아온 녀석이거든.”

확실히, 산해경에서 보았던 인면지주에 비해 많이 크고 흉악하다. 그렇다고 해도 못 잡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 외의 존재, 그것도 거대한 요괴와 싸운다는 사실이 황준우의 호승심을 자극했다.

“걱정 말고 다들 물러나.”

“질 것 같으면 같이 가둬 버릴 거야.”

“그러든지.”

제갈량의 냉정한 말에도 대수롭지 않게 답한 황준우가 수왕검을 뽑아 든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제갈량이 백우선을 흔들자 봉인진을 구성하던 문사들도 빠르게 뒷걸음질 쳤다.

캬악-! 쿵!

펼쳐졌던 봉인진의 힘이 약해지자 단숨에 그를 찢고 바깥으로 나오게 된 인면지주가 거대한 기지개를 편다. 직후 인면의 붉은 눈이 번들거리며 먹잇감을 찾기 시작했다.

그 정면, 높이 뛰어오른 황준우의 검이 얼굴 하나를 통째로 찢어 버렸다.

[키에에엑-!]

비명이 높이 울려 퍼졌고, 분노한 인면지주의 굵은 다리와 강기를 두른 황준우의 수왕검이 부딪치며 불꽃을 튀겼다.

“크으, 짜릿하구먼.”

손끝에 느껴지는 무거운 감각에 미소를 지은 황준우의 눈이 빛난다.

“한번 해 보자고, 요괴.”

요괴와 인간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