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재생-120화 (120/373)

학사재생 120화

제 120화

약 반 시진을 넘게 산행을 오르는 동안에도 일행들은 아무런 이상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이제 산의 중턱쯤 왔나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근데 제갈세가가 어디 있다는 거야?”

황서연이 문득 질문을 던졌다.

“융중산에 있지.”

황준우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여기가 융중산이잖아?”

“그렇지?”

“제갈세가가 작나? 왜 와룡촌에서 한 번도 못 봤지?”

“그야 모르지. 본 사람이 없으니까.”

“이상하지 않아?”

융중산은 그렇게 크지 않다.

중원오악처럼 한눈에 담기 어려운 정도는 당연히 아니고, 봉우리 역시 그리 많지 않았다. 한데 이 개월에 가까운 시간 동안 와룡촌에 머물고 때로는 융중산을 오르기도 했던 황서연은 단 한 번도 제갈세가를 보지 못했다.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는 말이 옳았다. 당시에는 수련 겸 대충 훑어본 면이 많아 보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한데 지금은 황준우를 비롯하여 경호, 홍산, 본인까지 포함하여 네 사람이 작정하고 제갈세가를 찾고 있는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이상하지. 아주 많이.”

황준우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실 지금 황서연의 의문은 황준우 역시 떠올리고 있던 부분이었다.

“우리가 지금 반 시진쯤 걸었나?”

황준우의 시선을 따라 일행들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해를 향했다.

시간을 알아보기 가장 좋은 것은 해의 위치를 확인하는 일이었던 탓이다.

“그쯤 된 것 같습니다.”

“그동안 느리게 걷지도 않았고 말이지.”

무공을 익힌, 따지자면 고수에 속하는 네 사람이 제법 빠르게 걸어 반 시진가량 산을 올랐다. 한데 기분으로만 치자면 산의 중턱도 못 오른 기분이었다. 제갈세가의 흔적은 당연히 보이지 않았다.

“일단 더 올라가 보자고. 속도 높일게.”

황준우는 침착하게 생각했다.

신비가문 제갈세가.

애초에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약 반 시진 더 흐른 후.

일행들은 어느덧 융중산의 정상에 올라섰다.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정경 속에서 황준우가 일행들을 향해 물었다.

“제법 오래 걸린 느낌이지?”

“과하죠. 중간부터는 경공도 썼는데.”

경호가 답했다.

본디 경공술이란 무인들이 말의 빠른 발을 부러워하여 만든 잘 달리는 법이다. 실제로 경공술의 경지가 오른 인물들은 말과 같은 속도 또는 그보다 더 빠르게 달리기도 한다.

단언컨대, 이 자리에 있는 네 사람 중 말보다 느린 사람은 없었다.

한데도 한 시진이 월등히 넘게 지나서야 융중산의 정상에 올랐다. 아무리 좁은 길을 헤치고 왔다 하여도 결코 빠르다고 볼 수는 없었다.

황준우의 미간이 찌푸려지고, 일행들의 생각도 자연스럽게 깊어졌다.

“내려가 보자.”

일단 정상에 서서 바라보아도 제갈세가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때문에 황준우는 이전보다 더 속도를 높여 뛰어 내려가는 방식을 택했다.

한데 그 속도가 범상치 않아, 일행들이 따라올 수 있는 최대 속력에 가까웠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호흡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끼는 일행들과 함께 지면에 도착한 황준우의 미간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것 봐라. 또 한 시진 넘게 걸렸지?”

“올라갈 때랑 비슷했던 것 같아.”

황서연이 가슴 사이에 손을 올린 채 가쁜 숨을 몰아 내쉬며 고개를 주억였다.

“좋아, 조금 쉬고 이번엔 걸어 올라가 보자고. 되도록 이곳저곳 다 둘러보면서 말이야.”

“알겠습니다.”

본격적인 제갈세가 수색의 시작.

얼핏 듣기로는 황준우가 그리 말하고 있는 듯했다.

또 그로부터 한 시진하고도 반 시진이 더 흐른 뒤.

산의 정상에 흐른 황준우가 허탈한 웃음으로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뭐 주춧돌 흔적이라도 찾은 사람도 없지?”

“예. 그리고…… 이거…….”

뛰어 올라온 것도 아니다.

경신술도 안 썼다.

느긋하게 추적까지 하며 움직였는데 빠르게 걷고, 경공까지 썼을 때와 비슷한 시간에 정상에 올랐다. 이 기묘한 현상에 대해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단서는 하나였다.

“말로만 듣던 진법(陣法)이란 거네.”

과연 제갈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다고는 하지만 하나의 산.

그런 융중산 전체에 거대한 진법을 펼쳐 가문을 감췄다.

“소문이 과장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어.”

“오빠는 이미 진법에 대해 알고 있던 거야?”

사실 황서연은 진법이라는 말을 잘 몰랐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진법을 곧 병법에서 말하는 병사들을 늘어놓는 진 정도로만 생각했다. 하나 분위기 그리고 현재 상황 모두를 따져 보면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소문은 들었지. 제갈세가가 융중산 전체에 진법을 펼치고 가문을 은폐했다. 하니 누구도 찾을 수가 없더라.”

“폐쇄적이라는 게 이런 뜻이었구나. 그럼 우리 어떻게 찾아?”

“말했잖아. 나도 달리 생각한 방법은 없다고.”

“도련님, 진짜 아무 준비도 없이 찾으시려 한 겁니까?”

“출발하기 전 대화 기억 안 나? 기대하지 말라고 했잖아.”

“말만 그렇지 작은 대책 하나쯤은 있으신 줄 알았습니다.”

“작은 대책쯤이야 있지.”

“오!?”

경호와 홍산, 황서연의 눈이 동시에 반짝 빛났다. 물 하나 없는 사막에 동떨어진 것 같은 그들의 심정에 작은 대책조차도 단비처럼 느껴진 탓이었다.

“바로, 속속들이 찾아보는 거야.”

“……어?”

“주공?”

세 사람의 말이 비슷하지만 다르게 엇갈렸다.

“뭐 어떻게. 이 중에 진법 알고 있는 사람 있어?”

세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도리도리 좌우로 내저어진다.

“나도 몰라.”

“…….”

“혹시 제갈세가랑 친한 사람은?”

이번에도 도리도리.

“나도 안 친해.”

당연한 이야기다.

“그러니까 속속들이, 벌레 새끼 한 마리도 놓치지 않고 찾는단 심정으로 융중산을 뒤지자고. 설마 눈이 여덟 개인데 흔적조차 찾지 못할까?”

“이미 지나갔던 수십 아니, 수백의 눈도 못 찾았는데요?”

“관심이 없었으니까.”

“관심 있는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어허, 말이 많다. 일단 찾아보잔 것 아니야. 어차피 남는 게 시간 아니야?”

어쩌다 보니 여정치고 제법 많은 시간을 소모했지만, 황준우 말마따나 당장으로서는 시간이 남았다.

어느덧 가을도 지나고 추운 겨울.

쌀쌀한 바람이 부는 융중산 정상에 선 황준우가 태연하게 말했다.

“보름 정도면 충분할 것 같으니까, 일단 해 보자고.”

황준우는 융중산 전체를 이 잡듯 뒤지는 데 보름이란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라 여겼다. 이는 일행들 중 제일 고수인 본인이 가장 바쁘게 움직인다는 기준하에서였다. 그리고 황준우는 정말 융중산을 무섭게 뛰어다녔다. 하나 융중산을 몇 번이나 오르고 내린 삼 주야가 지나도록 별 소득은 없었다. 황준우는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단순히 뛰면서 살펴보는 정도가 아니라, 조금 더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냥 뛰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바위와 돌을 마구잡이로 차서 방향을 바꾸고 나무를 부러트리기도 한다.

조금 공격적인 방식이었지만 학문을 익힐 당시 보았던 기문진법서의 논리대로라면 제갈세가 측에서 분명 반응이 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법이란 것은 시술자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분명 기물과 자연의 영향도 받는다고 했으니까. 이래서 배우는 게 중요해. 음음.’

대책 없이 시작해, 하다 보니 방법이 떠올랐다.

언제나 그렇듯 지식에 직감이 더해진 경우였고, 이 행패는 생각보다 빠른 결과를 불러왔다.

오 주야 차.

“오, 이 나무는 한 백 년쯤 우습게 묵은 것 같은데. 진짜 크잖아?”

어째서인지 그동안 뛰어다니며 보지 못했던 거대한 나무 한 그루를 확인한 황준우의 얼굴에 고민이 어렸다.

“이거 그냥 부스거나 꺾기는 아까운데 어떻게 할까.”

한데 보이지 않던 것이 나타난 걸 보니, 한 번 꺾어 주면 제갈세가 측에서도 반응이 확실히 올 것 같은 기분이다.

고민은 길게 이어질 필요가 없었다.

스스슥-!

마치 유령처럼 기척도 없는 짙은 운무(雲霧)가 나무와 황준우의 주변을 갑작스럽게 감싸 오기 시작한다.

‘이건?’

주변에 있던 자연지기의 변화를 느낀 황준우는 깜짝 놀랐다.

‘조율?’

자연의 기가 누군가의 의지에 따라 조정되어 변화하고 있다.

조화를 넘어선 조율.

황준우가 이른 무(武)의 극의가 자연스럽게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아냐, 이건 조율이 아니야.’

화등잔만 해진 눈으로 한참 동안 운무의 변화를 바라보던 황준우의 놀란 심정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언뜻 보기에는 자연지기가 이동하는 것이 조율의 경지를 떠올리게 하지만, 깊게 파고들면 다르다.

본래의 조율이란 주변의 자연지기를 사용하여 원하는 가공(加工)을 이루어 내는 경지다. 바로 아래인 조화는 그러한 자연지기가 가진 있는 그대로의 힘을 부리는 것.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굳이 따지자면 ‘유혹(誘惑)’이라 할 수 있을 터였다.

“자연지기를 이끄는 무언가를 통해 흐름을 강제로 변환시킨 건가.”

혼잣말을 읊조리고 보니 문득 진법이라는 것의 원리가 더욱 이해가 되는 느낌이었다. 본래는 있을 수 없는 자연현상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 초인이라는 조화경의 고수들조차 불가능한 일을 해내는 진법사(陣法士)라는 이들은 자연지기를 유혹할 수단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물건 아니면 어떠한 방식 또는 언어.

황준우는 흥미 가득한 시선으로 운무의 진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마 뒤, 그런 운무의 사이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그대는 북룡(北龍)의 은거지에 들 자격이 없다.]

[물러가라.]

성별도 분간이 불가능한 울리는 목소리가 운무 전체를 일렁거리며 울려 퍼진다.

‘위치를 숨기려는 건가?’

실제로 한 번 모습을 드러냈던 운무 속 그림자 역시 빠르게 이동하며 계속해서 위치를 바꾼다. 뻔히 속셈이 보이는 수인 것이다.

“방법이 거칠었던 건 미안한데, 이야기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물러가라.]

[우리는 그대와 나눌 말이 없다.]

융중산을 돌아다니며 제법 거친 행동을 한 것을 인정한 황준우가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다를 바 없었다.

“와, 진짜 단칼이네. 우리 경호가 이런 느낌일까. 조금 미안해지는데.”

[물러가라.]

[가지 않겠다면 강제로라도 내쫓겠다.]

이제는 순 협박이 시작된다.

황준우는 가볍게 혀를 차며 손을 들어 올렸다.

“알았어, 알았다고. 일단 갈 텐데 이야기 한 마디 정도는 할 수 있는 기회를 줘.”

더 이상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황준우의 돌아간다는 말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로 보였다.

“끙, 오늘 안 되면 내일 다시 올게.”

스스로의 죄도 있는 만큼 가볍게 순응한 황준우가 뒷걸음질 치자 그의 주변을 감싸던 운무가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스스슥-!

곧이어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평범한 융중산의 모습이었다. 황준우를 놀라게 했던 거대한 나무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신기하네, 진법.”

눈앞에 보이는 세상 풍경이 두 번이나 오락가락 뒤바뀌었다. 만약 진법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면 귀신의 장난 혹은 신선의 재림이라고 여길지도 모를 수준이었다.

“화 좀 풀고 있어. 이야기를 들어주면 나도 나름의 성의는 보일 테니까.”

마지막으로, 본래 거대한 나무가 서 있던 자리에 서 한 마디를 남긴 황준우가 등을 돌렸다.

여전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