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118화
제 118화
전생의 황준우였다면 거부감을 가졌을 술에도 눈을 돌릴 수 있는 데에는 이런 백교의 조언이 큰 역할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그런 첫 번째 이유.
무공을 배우고 익히기 위해 봉을 들었다.
두 번째는 바로 추궁과혈.
본래 추궁과혈이란 시전자의 손끝에 내력을 실어 펼치는 것이 기본이다. 사람의 몸을 두들겨야 하는 탓이다. 한데 황준우가 생각해 보니 굳이 두들기는 데 손을 쓸 필요만은 없다 여겨졌다. 어차피 두드려야 되고, 봉을 수련해야만 한다. 연관 관계가 이렇게 확실한데 굳이 둘로 나누어 복잡하게 수련을 따로 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일반적으로 봉을 통한 추궁과혈은 말이 안 된다 생각할 수 있지만, 황준우에게 있어서는 조금 힘든 일일 뿐 충분히 가능했다.
“두 사람 다 준비는 됐지?”
늦은 밤, 긴장한 얼굴의 경호와 홍산 앞에 봉을 들고 선 황준우가 웃으며 물었다.
“준비됐습니다.”
“시작하셔도 좋습니다.”
긴장한 표정의 두 사람이 고개를 주억였다.
“좋아. 둘 다 그대로 서 있어.”
이후 황준우가 들고 있던 봉으로 경호를 겨눈다.
“……도련님?”
“보통 추궁과혈은 운기조식을 취하는 자세로 시작하지 않습니까?”
“아, 그런 것 필요 없어. 솔직히 쓸데없는 겉멋 잡기거든. 서 있기가 힘들면 편하게 누워 있어도 돼.”
실제로 황준우는 편히 잠들어 있는 황서연에게 추궁과혈을 시도한 전적이 있었다.
경호와 홍산은 그런 사실을 몰랐다.
하지만 황준우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이쯤은 납득할 수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의문이 여전히 존재하기는 했다.
“혹시, 아주 설마 했는데 그 봉으로 하시려는 겁니까?”
“여전히 대답이 단칼에 나오십니다.”
“시끄러워. 진짜 시작할 테니까 입 다물어. 입 열면 더 아프다.”
“아니, 잠시만요. 어떻게 봉으로…… 악!”
황준우는 길게 설명하는 대신 봉을 휘둘러 경호의 머리를 먼저 두들겼다.
당연하지만 더럽게 아팠다.
나이 이립을 한참 넘은 초절정 경지의 고수 경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한데 더 이상 무언가를 따질 수도 없다.
“입 열면 더 아프다고 경고했다.”
마치 폭풍 같은 기세를 피어 올리기 시작한 황준우의 봉이 경호의 온몸을 두들기기 시작한다.
따다닥, 따다닥, 따다다다닷, 딱!
마치 무슨 음정 박자라도 가진 것처럼 끊기기도 하고, 이어지기도 하는 매질에 경호의 정신이 점점 혼미해졌다.
‘아파…….’
아픈데 입 열면 더 아프다고 한다.
“끄으읍.”
그래서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참는 중이었다.
“잘 버티고 있어, 우리 경호. 힘내!”
때리는 황준우가 상쾌해 보이는 땀방울을 흘리며 외친다. 솔직히 곁에서 다른 누가 봤다면 욕을 했을지도 모를 풍경이다.
따다다닥!
그렇게 한참을 두들겨 맞다 보니 결국 경호의 입이 벌어졌다.
도저히 못 참겠어서 내지른 비명.
그게 시작이었다.
“입 열면 더 아프다니까!”
“끄아악-!”
“조용히 해, 경호!”
“아, 아파요. 도련님 거긴, 거긴 안 됩…… 깍!”
“거참!”
비명을 내지르고 바닥을 구르는 경호를 향한 황준우의 타박과 매질은 그 뒤로도 반 각가량 이어졌다.
짧지만 결코 짧지 않았던 시간.
“휴우…… 이건 진짜 힘들긴 하네.”
이마 위로 흠뻑 젖은 땀을 훔친 황준우의 시선이 묵묵히 굳어 버린 홍산에게로 향했다. 그 어떤 상황이 와도 땀 한 방울 흘리는 걸 본 적이 없는 황준우의 변모만 보아도 그가 이번 추궁과혈에 얼마나 온 힘을 다하고 있는 지 알 수 있었다.
때문에 홍산은 두려웠다.
“조금 쉬었다 할까?”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바로 해도 된다는 뜻이지.”
“어…….”
입이 무겁게 열렸다. 게거품을 물고 기절한 경호를 보니 그냥 안 받고 싶다는 생각도 들어 의견을 꺼내려던 참이었다.
“접수 완료. 시작한다.”
황준우의 봉이 허공을 갈랐다.
휘익, 딱!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이, 참! 입 열면 아프다니까!”
“끄아악-!”
눈앞으로는 지옥도가 펼쳐졌다.
무한에서 융중산까지의 거리는 그리 가깝지 않다.
아무리 좋은 마차를 타고 잘 뚫린 길을 빠르게 달려가도 최소 보름은 잡아야 하는 거리. 지금 주연하와 황준우 일행처럼 느긋이 움직인다면 한 달 내외의 시간이 걸린다. 그동안 일행들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성장을 거듭했다.
우선 주연하의 황궁 일행.
어린 황서연의 놀라운 실력과, 잘은 알지 못하지만 경호와 홍산의 뼈를 깎는 것 같은 비명을 내지르는 단련 과정은 주연하뿐만이 아니라 그녀를 따르는 황궁 무인들 모두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스스로 성장을 위한 기폭제가 폭발한 셈으로 많은 수련을 한 만큼 돌아오는 과정을 겪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무인들이 흔히 말하는 좋은 시기였다. 노력을 하면 곧장 결과가 돌아오는 시기. 일종의 기연과 다름없는 신비한 시기가 황궁 무인들 모두에게 찾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황준우 일행.
황궁 무인들이 노력한 만큼의 성과를 가져갔다면, 이들의 수련은 모두가 그 이상의 효과를 발휘했다.
천재였던 황서연이 절정고수가 되고 더욱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괜히 천재는 아니라는 듯, 무서운 속도로 무공이 진일보하고 있는 그녀는 황준우가 보기에 향후 일, 이 년 이내에 곧장 초절정의 경지까지도 올라설 것으로 보였다.
스물도 되지 않는 나이에 말이다.
때문에 황준우는 제 동생에 대한 평가를 한 번 더 수정했다.
‘어쩌면 전생의 나 못지않은 천재일지도.’
전생의 황준우는 황서연 나이 때 그만큼을 못했다.
물론 무공을 익힌 시기도 늦고, 이렇다 할 스승이 오래토록 없었던 탓도 있지만 황서연의 성장은 정말 기하급수적이라고밖에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경호와 홍산.
매일 밤 황준우가 수련 겸, 효율을 높이기 위해 든 봉으로 추궁과혈을 받은 두 사람의 몸에서 대다수의 탁기가 제거되었다.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두 사람은 봉을 든 황준우의 모습을 볼 때면 경기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일단 추궁과혈이 지속될수록 내력의 수발이 자유로워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기에 거부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놀랍게도 맞을 때는 아픈데 다음 날이면 몸이 견딜 만하게 개운해지는 효과도 있었다.
어쨌든 그렇게 한 달이 지나갈 쯤, 추궁과혈이 끝나고 두 사람은 스스로의 무공이 급성장한 것을 느꼈다. 적어도 오 년 이상 수련을 해야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강함을 한 번에 얻은 기분. 과연 귀한 추궁과혈의 효과라 할 수 있었다.
별개의 이야기로 이 추궁과혈 수법에는 큰 상처도 남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이걸 잘만 이용하면 훌륭한 고문법으로도 쓰일 수 있겠다고 공통적으로 생각했다.
황준우로서도 적지 않은 배움이 있었다.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는 누구보다 큰 성장을 겪었다고 볼 수 있었다.
우선 이론적으로 두 사람의 추궁과혈은 일반적인 경우와 달랐다. 이미 쌓인 탁기가 많다 보니 그를 완전히 뽑아낼 수가 없는 탓이다. 그래서 황준우는 봉 끝으로 두 사람의 내력을 자극해 탁기가 쌓인 혈도로 강제로 밀어 넣었다. 이후 조율을 이용해 두 기운을 강제로 부딪치게까지 이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몸속의 탁기와 자연지기가 싸움을 시작한다.
인간의 전쟁과 같다. 이긴 쪽은 살아남지만, 지는 쪽은 사라지게 된다. 전쟁이 발생하는 동안 땅이 황폐화되듯 육체의 주인은 고통을 겪고 아픔에 몸서리치게 된다. 황준우는 그를 지켜보며 탁기가 이기려 할 때면 두 사람의 본신내력을 더욱 강하게 일으켜 승리로 이끌었고, 자칫 망가질 수 있는 황폐해진 혈도에 자연지기를 불어넣어 수복을 도왔다.
싸움은 무조건 이길 수밖에 없고 약해진 혈도도 다시 복구되니 다음 날이면 오히려 개운해지고 부작용도 없다.
사실 이는 황준우 본인도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그가 얻은 깨달음 중 궁극에 속하는 조율을 지속적으로 펼치면서 자연지기의 조화로 수복까지 동시에 해내야했으니 말이다.
어찌 됐든 이런 과정을 반복한 덕분에 황준우가 자신하던 조율의 공능이 훨씬 더 강력해졌다.
본래 황준우가 조화가 아닌 조율로 부릴 수 있는 자연지기가 삼(三)이였다면, 한 달 사이 그 수치가 오(五) 이상으로 증가했다. 이미 무한이나 다름없는 자연의 힘을 끌어 쓰는 마당에 그게 무엇이 중요하냐 할 수도 있겠지만, 한 번에 사용할 수 있는 최대치의 증가는 분명 위력적인 결과를 만들 수 있을 터였다. 이는 황준우로서도 예상치 못한 성장이었다.
추가로 목표로 했던 무기술의 이해도도 크게 늘었다.
확실히 모든 무기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봉을 열심히 휘두른 덕일 터였다. 검을 사용할 때만으로는 알 수 없던 찌르고 베고, 휘두르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이 더욱 깊게 황준우의 정신과 육신에 새겨졌다.
그 말은 곧 별것 아닌 베기와 찌르기 등에 심상(心想)의 힘을 보탤 수 있다는 뜻이다. 조화의 경지에서도 극에 가깝게 오른 무인이 펼쳐는 심상의 무공은 같은 동작을 가지고도 훨씬 더 다양한 능력과 강한 힘을 보인다.
때문에 누군가는 그런 능력으로 펼쳐지는 무공을 일컬어 심상지기(心想之技)라고도 부르며 초인급 고수의 진정한 오의(奧義)라 일컫기도 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전생 권각술만으로 무림의 정점에 달했던 황준우의 모든 동작에는 그러한 심상지기의 힘이 담겨 있었다. 때문에 당시 평범한 정권으로도 경천동지할 위력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미 조화의 경지를 넘어 조율의 단계에 달한 황준우에게 있어 이러한 심상지기는 사실 어렵지 않은 행위로 보일 수 있었다. 실제로 수왕검을 든 황준우는 심상지기를 얼마든지 쓸 수 있었으니 말이다. 다만 가장 익숙한 권각술을 사용할 때에 비해 아쉬운 점이 많았다. 생각하고 있는 심상의 그릇은 바다인데, 검을 통해 펼쳐지는 것은 그에 못 미친다. 그나마 수왕검쯤 되니 바다를 흉내라도 내주었던 느낌이란 것이 옳았다.
한데 봉을 통해 무기에 대한 근간을 이해하고 육체에 새기니 이제야 무기를 들고 올바른 심상지기를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결국 조율이라 불리는 무공의 경지에서조차 심신일체(心身一體)의 중요성은 최우선인 셈. 정신, 심상이 이미 한참 앞을 향해 있어도 육체가 모른다면 그를 따르질 못한다. 그를 깨달은 황준우의 시선이 다시 한 번 정신을 넘어 육체를 향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어쩌면 술이 아니라 순수한 육체의 단련이 아닐까?’
생각은 하지만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기실 어린 시절부터 자연지기를 품으며 성장한 황준우의 육체는 인간으로서 가히 정점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닌 탓이었다.
뇌력을 일깨워 활발하게 활동하는 뇌는 극한의 오성을 발휘하며 탁기를 몰아내는 것이 아닌, 쌓이기 직전에 자연지기로 보호한 육체는 가장 맑고 순수한 상태에 가깝다. 근골과 근육 역시 무공을 위해 만들어졌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가장 균형 잡힌 상황이다.
한데 이런 상태에서 어떠한 육체의 단련을 한단 말인가? 언뜻 떠오르는 방법으로는 전설상의 환골탈태(換骨奪胎)를 겪는 방법이 최선이었다. 물론 환골탈태가 괜히 전설은 아니니, 그 누구도 방법을 알지 못한다.
‘어렵네.’
황준우는 입맛을 쩝 다셨지만 조급해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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