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116화
제 116화
진무영을 보고 황준우가 느낀 감정을 짧게 정리하자면 분명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이 내가? 경계심을 느꼈다고?’
입가로는 절로 묘한 미소가 떠오른다.
당황스럽지만 이래서 세상은 재밌는 것이다.
무엇 하나 미래에 대하여 확신을 할 수가 없다.
어쩌면 황준우는 먼 과거부터 이런 사실을 직감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때문에 천하에 적수가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단 한 번도 절대자의 고독(孤獨)과 같은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더 강해져야 될 이유가 늘어났다.
그런 의미에서 주연하의 제갈세가행을 알게 된 것은 황준우에게 있어 의외의 복이었다.
‘제갈세가라면 술(術)에 대해서도 잘 알겠지. 내 부족한 지식을 채울 좋은 기회야.’
물론 그들과 접촉할 수 있고, 부탁을 들어줬을 때의 일이겠지만 일단은 확실한 방향이 생겼다. 망망대해 속에 작은 실마리에 기뻐하던 그에게 있어 이런 기회는 결코 흔치 않은 일이었다.
“좋아, 좋아. 역시 좋은 일을 하면 복이 온다고, 친구를 도우니까 알아서 떡고물이 떨어지잖아?”
닮은 말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은 같은 무한의 거리에 서, 서로를 향해 등을 돌린 채 멀어져 가고 있었다.
6. 융중산으로 가는 길
본래라면 당일 날부터 바로 시작하기로 예정되었던 경호와 홍산의 벌모세수가 하루 미루어졌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 황학루에 머물러 있기도 한 데다, 황준우 나름대로 많은 생각을 갈무리할 필요가 있는 날이었던 탓이다.
“무한은 돌아갈 때 다시 둘러보기로 하고, 우선 융중산으로 가자. 두 사람 벌모세수는 오늘 밤부터 진짜 시작하자고.”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황준우의 선언에 조금 잠이 덜 깬 표정의 황서연이 가장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돌아갈 때 꼭 들러야 돼.”
“약속할게.”
경호와 홍산은 기대했던(?) 고통이 하루 더 미루어진 데에 안심과 불안을 동시에 느끼면서도 황준우의 융중산행에 의문을 표했다.
“한데 왜 갑자기 융중산입니까, 도련님? 설마 제갈세가? 아니, 이건 아닌가.”
“제갈세가는 외인의 침범을 불허(不許)하지 않습니까. 그냥 산행이시라면…….”
경호의 말을 받아 뒷말을 읊조리던 홍산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황준우의 성격상 고작 산행 따위를 하기 위해 융중산에 갈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답은 하나였다.
“제갈세가, 가실 생각이군요.”
두 사람이 하나가 된 듯 동시에 말했다.
“뭐, 그렇지. 그래도 제갈세가에 대해 조금 알고 있나보네.”
“워낙 유명하지 않습니까? 말만 오대세가지 따로 노는 신비가문에 가까우니…….”
경호가 고개를 내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한편으로는 기대도 엇비쳤다.
신비가문이라 일컬어지는 제갈세가에 황준우는 무슨 수로 들어갈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무림의 이름 높은 명사들도 불가능하다고 포기했다지만 황준우라면 다를 것도 같았다. 여태껏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일들을 여럿 해내는 모습을 이미 무수히 보아 왔지 않은가?
“근데 기대는 하지 마. 나도 대책 없이 가는 거니까.”
“…….”
“뭐, 어떻게든 되겠지.”
“그, 그렇군요.”
어쩌면 경호는 평생 모를 터였다. 늘상 일을 쉽게 처리해 온 것 같은 황준우도 애초부터 큰 그림을 준비하고 행동에 나선 적은 손에 꼽는다. 대다수 부딪치고 나서 어떻게든 맞춰 나갔을 뿐. 이는 황준우가 가진 싸워서 이기는 법이라는, 직감을 넘어선 본능의 탓이 컸다.
“근데 제갈세가가 그렇게 폐쇄적이야?”
다른 두 사람과 달리 무림에 대하여 지식이 부족한 황서연이 물어왔다.
“반백년 전 이후로 한 번도 제갈세가의 영토에 들어간 사람은 없다고 하지.”
“반백년? 흐에엑. 내가 태어나기도 전이잖아?”
“아버지도 집에서 당과나 물고 계셨을 때일걸?”
“말도 안 돼! 그게 대체 어떤 시대야? 불은 있었던 거지!?”
“아버지가 그런 말 들으면 섭섭해하실 거다.”
“그렇기야 하겠지만, 하여튼 진짜 까마득하다. 대체 어떻게 오대세가로 계속 남아 있는 거지?”
기실 황서연이 가지는 의문은 황준우를 비롯하여 무림인 대다수가 느끼고 있는 부분이었다. 제갈세가는 고작 반백년 전에 한 번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고, 아주 짧은 시간 만에 오대세가라는 명성을 이룩했다. 그것이 설령 당시 그들이 보여 준 천재성과 놀라운 지략을 높게 평가한 덕이라고는 해도, 융중산에 은거한 채 오십 년 넘게 숨어 있는 지금까지도 인정해 주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불합리하다.
지금도 수많은 강호의 명가들이 오대세가라는 이름에 도전을 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의아할 일이었다.
“아마 아주 가끔씩이라도 세상에 나와서 뭔가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오대세가가 주측인 정의회라든지…….”
말을 하는 황준우의 눈이 가늘어지며 반짝 빛났다.
추측을 하고 나니 그럴싸하다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만약 융중산행에서 얻는 것이 없다면 정의회 내부로 들어가 제갈세가를 찾아봐도 나쁘지 않다.
‘그러려면 슬슬 남궁세가와 만금장의 관계도 완화시켜야 되는데…….’
이미 주인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남궁세가 내에서도 모르는 이들이 대다수. 설령 안다 한들 자존심 때문에라도 그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가문을 떠나거나 오히려 검을 역으로 쥘 사람들이 팔 할 이상이다. 부족한 남궁호량과 남궁호욱의 통치력은 큰 의미가 없었다.
결국 주인이 바뀌어서 따르라는 말도 안 되는 식의 강제는 통하지 않을 터다.
관계를 완화시키는 것은 두 세력의 교류와 화합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져야 한다.
하나 그것이 쉬울까?
이미 두 집단간의 오랜 골은 깊다 못해 수렁에 가까웠다. 오죽하면 천마신교가 남궁세가의 여객선에 탄 황준우를 노렸겠는가? 실제로 남궁세가 무인들은 황준우를 지켜 줄 생각이 전혀 없기도 했다.
그만큼이나 깊은 골.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이든 자존심을 버리고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할 터였다.
물론 황준우는 아버지인 황석후에게 그를 요구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남궁호량과 남궁호욱이 사과를 하는 것도 그림이 좋지 않다. 자존심만 더럽게 센 남궁세가 무인들의 반발은 여전할 테니 말이다.
“결국 나밖에 없네.”
“아냐, 만약의 경우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늘어나서.”
물론 어디까지나 만약이다.
제갈세가에 들어갈 수 있다면 귀찮게 그런 일을 벌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어쨌든 슬슬 화합의 장을 만들어 두는 건 나쁘지 않지.’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두 세력의 힘을 다 이용해서 싸워야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때 돼서 갑작스럽게 준비하는 것보다는, 미리 대비해서 물과 기름 같은 두 집단을 어느 정도는 융화시켜 놓는 편이 편한 것은 당연했다.
심지어 그쯤이라면 황준우가 직접 나설 필요도 없었다.
‘사마정에게 시켜야지.’
마음속으로 손쉽게 결정을 내린 황준우는 다른 일행들을 둘러보았다.
“어쨌든 그래서 융중산 가는 데 반대하는 사람 있어?”
“반대하면 받아는 주십니까?”
“아니.”
질문을 한 경호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시무룩한 척하지 마. 솔직히 반대할 생각도 없으면서.”
“그래도 그렇게 단칼에 잘리면 마음이 상처 받는다고요.”
“그럼 다시 물어볼래? 내가 최대한 단호하지 않게 말해 볼게.”
“됐습니다.”
“단호한 녀석.”
손을 내저은 경호가 황당한 표정으로 황준우를 돌아보았다. 물론 황준우는 이미 그에게서 관심을 끊은 뒤였다.
“난 아까도 말했지만 돌아올 때 다시 무한에 들르면 좋아.”
황서연은 여유로웠다.
오히려 신비문파라는 제갈세가에 대한 호기심으로 눈이 반짝이고 있는 게 뻔히 보였다.
“홍산은?”
“주공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형식적인 과정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일행들 모두의 합의를 받아 낸 황준우가 다시 한 번 크게 고개를 주억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융중산으로 가자. 아, 그 전에 소개시켜 줘야 될 사람도 있어.”
“소개?”
“응. 연이 네가 그렇게 경계하는 여자.”
“……!”
“가자고. 대충 지금쯤 모여 있을 테니까 말이야.”
“자, 자, 잠깐. 잠깐만!”
황서연이 손을 들어 그런 황준우를 잠시 막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면 또 쌩 하고 나가 버릴 테니 말이다.
“후우…… 후우…….”
황서연은 한참을 호흡을 가다듬으며 마음을 안정시켰다.
일단은 준비가 필요한 탓이었다.
반면 경호와 홍산의 얼굴에는 의아함이 어렸다.
황준우의 여자 친구?
물론 생긴 것만 봐서는 없는 게 이상하지만, 평소 그의 행동을 보면 오히려 있는 게 이상한 일이다. 애초에 여자란 것도 흥미가 있어야지 만나는 법이니 말이다. 한데 황준우에게는 그런 흥미가 없다.
‘그런 사람이 있었나?’
홍산이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경호를 바라보았다.
누구보다 늘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당연하지만 경호 역시 고개를 내저었다.
‘차라리 남자를 좋아하신다고 하면 믿을지도.’
아니, 이건 오히려 믿고 싶지 않다.
경호는 생각했던 바를 빠르게 정정하며 머리를 털었다.
그 즈음, 거칠게 쏟아지던 호흡을 가다듬은 황서연이 무거운 목소리를 흘렸다.
“가자, 오빠.”
마치 마지막 전장으로 향하는 장군의 모습과도 같은 비장한 모습이었다.
보통의 남매지간은 서로를 원수 보듯 한다고 하더라.
실제로 황서연 주변의 다른 친구들도 오빠 혹은 남동생을 대할 때 꽤나 과격한 모습을 많이 보이고는 했다. 심할 때는 정말 말 그대로 원수 보듯 이를 갈기도 하더라. 황서연은 그 사실이 이해가 안 되었다. 아주 가끔 가족 간의 일에 그녀를 배신할 때도 있지만 대다수 자신을 아껴 주고, 귀여워해 주고, 사랑해 주는 오빠다.
싫어할 이유가 있는가?
오히려 너무 잘나서 걱정되는 것은 있었다.
동생인 자신이 봐도 멋진 오빠라면, 일반적인 다른 여자가 보면 어떨까?
‘눈 돌아가겠지.’
거기까지는 좋다.
그런데 만약 순수하고 착한(?) 오빠가 그런 여우에게 꾐을 당한다면? 황서연은 상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세차게 머리를 내젓고 단호하게 얼굴을 굳혔다. 용서할 수 없었다. 그녀가 열심히 익힌 무공은 바로 그때를 위해 배운 것이 될 수도 있었다.
물론 그녀의 친구들은 그런 황서연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리 잘났다고는 하지만 친오빠가 아닌가?
보통 불쾌한 일이 한둘, 아니지 수십, 수백쯤은 쌓이기 마련인데 어찌 저런 사이가 될 수 있을까?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물론 입 바깥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자신의 오빠를 욕한다고 생각한 황서연이, 그 순간을 위해 익혀 온 무공을 쏟아 낼지도 모르니 말이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남의 오빠여서 그런지 황준우가 멋지다고 생각하는 친구들도 많았다.
그래서 때로는 소개시켜 달라고도 했고, 황서연은 대다수 칼같이 잘라 냈다.
‘어디서 여우 같은 것들이!’
효령의 경우는 특별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황서연과 친했고, 곁에서 지켜본 결과 절대 여우가 아니었다. 만약 황준우가 꼭 누군가 이성을 만나야 한다면 차라리 효령을 밀어 줄 것이다.
황서연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때문에 이번에 만난다는 여자 친구에게도 냉정한 모습과 차가운 태도, 그리고 위엄 있는 모습으로 황준우와의 선을 명확하게 그을 생각이었다.
‘난 그래도 되니까.’
나름대로 잘난 만금장의 딸이라는 자긍심쯤은 있었다.
팔짱을 끼고, 콧대를 높이고, 최대한 도도한 눈빛으로 말을 한다.
친구들한테 그런 것도 배워 놨다.
한데 멀리서 상대를 본 순간 어째서인지 절로 팔짱이 풀어진다.
콧대도 묘하게 수그러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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