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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113화 (113/373)

학사재생 113화

제 113화

황준우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말한 바 있듯 황준우는 황서연의 벌모세수를 직접 해 주었다. 어린 시절이어서 내력이 부족했던 만큼, 매일 밤 자주 찾아가 나누어서 그녀의 쌓인 탁기와 음기를 몰아낸 것이다.

일반적인 상식을 가진 무림인이 들었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손가락질을 했을 이야기다.

탁기와 음기를 단번에 몰아내지 않고 자극만 주면 오히려 역효과로 돌아와 혈도를 망칠 수 있다. 이미 밝힌 바 있듯 이런 이론이 무림에 있어 정석적이기 때문이다. 황준우 역시 그 이론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조화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라면 그게 맞는 말이니까.’

조화란 무엇일까?

대부분 초절정의 고수들은 이 사실을 고민한다.

인간으로서의 한계라는 초인의 경지에 발을 들이기 위한 각고의 노력.

하나 재능 넘친다는 초절정고수들도 대다수 이 벽을 넘지 못한다.

단순히 인간의 육체와 자연의 호흡이 하나가 되는 것만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음과 양의 조화.

양과 음의 합일.

도가에서 말하는 태극(太極)과 일원(一元)이란 바로 조화를 뜻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벌모세수에 있어서도 이런 음양의 조화를 이해하는 것은 큰 도움이 되는데, 무식한 것들은 그저 탁기와 음기를 쫓아낼 생각만 하고 무작정 몰아붙인다. 그러니까 당하는 상대는 아프고, 괴로우며, 한 번에 몰아내지 못할 경우 탁기의 반발에 오히려 해(害)를 입는 것이다.

세상 모든 만물의 순리라는 것을 이해한 조화의 경지에 올라 그것을 명확하게 다룰 수 있는 인물이 이러한 음과 양의 이해를 도와 서로 맞물리듯 작용케 하여 벌모세수를 해 준다면, 시간은 더욱 오래 걸리나 편안하고, 촉박하지 않은 상태로 상승의 효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물론 이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마 지금 당장 천하에서 이러한 일을 해낼 수 있는 일은 많아야 두 명 정도를 꼽을 수 있을 터였다.

‘아, 원공 영감도 나랑 같이 갔지.’

원공 역시 부활하지 않았다면 많아야 한 명이 전부일 터였다.

비록 내력의 양은 못 미치지만 어린 시절 당시에도 이미 전생의 기억에 따라 천조신공 오단공, 그러니까 조화의 극(極)에 대한 깨달음을 가지고 있던 황준우였기에 가능한 일. 이런 비밀을 알지 못하는 황석후는 그저 황서연의 체질이 탁기와 거리가 먼 줄로만 이해했다.

황준우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가족에게 관대한 그의 성격은 이상함을 느끼더라도 무심코 지나가 버리는 것이다.

어쨌든 황서연은 뛰어난 오성에, 타고난 무재, 거기에 더해 영약과 천하제일 고수였던 오빠의 벌모세수까지 받은 몸이다.

‘이거 생각해 보면 내가 말했던 것들이 다 갖춰졌네?’

오성에 운, 육체와 노력.

이 모든 것이 있으면 황서연이 고금을 논하는 여중고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한데 이 중 노력을 제외한 모든 것을 이미 황서연은 가지고 있는 셈.

질투가 나지는 않았다.

그저 뿌듯했다.

‘역시 내 동생. 훌륭해.’

물론 그런 마음을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일단은 지친 표정으로도 놀라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 경호와 홍산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으니 말이다.

“참고로 서연이가 내공은 너희 둘보다 많아.”

“그게…… 가능합니까?”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홍산의 말에 황준우는 긴 설명 대신 손가락을 둥글게 말아 쥐었다.

“이거면 다 돼.”

“아…….”

역시 복잡한 설명보다 이쪽이 훨씬 편하다.

“그리고 너희 둘은 기본적으로 경지에 비해 내력이 너무 적어. 그런데도 사용 시 효율은 떨어지고. 경호 같은 경우 중검을 만들어서 사용하는 데 힘들어하는 것도 그런 이유고. 홍산은 오래 싸우기는 힘들지?”

두 사람 모두 부정을 못 한 채 얼굴을 붉혔다.

“경호야 뭐, 청홍검으로 어느 정도 약점을 극복했다지만 어디까지나 무기 덕이고, 홍산은 아직 답이 없지.”

“음…….”

동호에 도착한 지 시간이 제법 지나며 호흡을 가다듬은 두 사람이 비슷한 신음을 흘렸다.

강해졌다.

한데도 여전히 모자라다.

“두 사람 모두 너무 자괴감 느끼지 말라고. 애초에 이건, 뭐랄까. 내가 생각해도 비교 대상 자체가 잘못됐어.”

전생부터 천재였던 천하제일고수에, 십만 명에 한 명 꼴로 있을 법한 재능을 가진 황서연.

언제나 말하지만 경호와 홍산이 모자란 게 아니었다.

다만 황준우는 격이 다르고 황서연은 혈맥의 천재성을 입증할 뿐이다.

‘그러고 보니 검제 영감이 한 말이 제법 신빙성이 있는 듯도 한데.’

마냥 미친 영감으로만 알았는데 본인을 제외하더라도 황석후에 황서연까지 이어진 재능을 보면 분명 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한테 아주 희망이 없는 것도 아니고.”

“알고 있습니다. 노력하면 나름의 방법이 있다는 건 얼마 전에 깨달았으니까요.”

“오호, 그게 우리 경호 중검의 특징이 발현된 이유였구먼.”

황준우가 살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홍산은 어때?”

“부족하면 더 노력하면 됩니다.”

어찌 됐든 두 사람 모두 짧은 자괴감을 느꼈지만 금방 회복한 것 같은 모습이다.

황준우의 부족한 위로보다는 스스로의 마음을 이겨 낼 수 있는 정도의 성장은 했다는 뜻이다.

“흔히 명경지수(明鏡止水)라고 하지. 고수의 마음가짐으로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라고.”

물론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흔들리지 않는 굳건하고 맑은 마음이 허(虛)와 실(實)을 구분하여 고수들 간의 싸움에서 간격을 가르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흔들리는 마음속에서도 본능적이다시피 적의 약점을 쫓는 맹수도 있는 법이다.

바로 황준우가 그에 속했다.

반면 경호와 홍산은 확실히 전자에 속한다.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유지할수록 더욱 강해질 수 있다.

“이제 두 사람 모두 고수로서 자격이 갖춰진 것 같네. 그러니까 미뤄 놨던 걸 해 보자고.”

“미뤄 놨던 거요?”

경호가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며 물었다.

왠지 모를 불길함이 느껴진 탓이었다.

“말했잖아. 희망이 없지는 않다고. 우선 벌모세수부터다.”

“벌모세수요? 그게 지금 우리, 제 나이 때 가능합니까?”

경호의 눈동자가 더 커졌다.

홍산도 크게 놀란 듯 보였다.

일반적으로 벌모세수란 탁기를 몰아내는 일.

당연하지만 이는 탁기가 많이 쌓이는 늦은 나이일수록 힘들어진다. 아니 실상 나이 열 살이 넘어가면 불가능이라고 봐야 했다.

한데 이립(而立)을 넘어선 두 사람에게 벌모세수를 말한다.

절정의 경지인 두 사람을 보름 만에 초절정의 고수로 만들겠다고 말했을 때보다 더 충격적인 선언이었다.

“어, 일단 가능할 것 같아.”

사실 황준우는 이 부분에 대해서 꽤나 오랜 고민을 했다. 경호는 말할 것도 없고, 홍산 역시 그가 매우 아끼는 사람들. 해 줄 수 있다면 해 주고 싶다. 무림 아니, 작금의 천하에 있어 강하다는 것은 더욱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는 뜻이니 말이다. 그래서 고민했고, 제법 시간이 많이 남는 나날, 그러니까 여객선 안에서 수련을 이어 가던 중 의외의 실마리를 잡아 이론을 만들었다.

“아, 아프겠지요?”

일반적인 벌모세수는 어린아이 때 받아도 엄청난 고통을 수반한다고 전해진다.

결국 그를 견딜 수 있는 강골의 재능도 벌모세수의 요건 중 하나일 터였다.

“음, 일단 가설은 있어. 입증은 아직 안 됐지만…….”

황준우는 뒷말을 작게 줄였다.

자신은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두려움이 엇비치는 두 사람의 눈동자를 보니 괜히 미안해진 탓도 있었다. 아마 이전에 겪었던 망아지경 때의 고통을 떠올렸겠지. 그리고 실제로 황준우가 정립한 이론을 따른다 한들 두 사람은 엄청난 고통을 견뎌야 할 터였다.

아무리 조율의 힘이 있다고 하여도 두 사람은 나이가 너무 많고, 탁기도 그만큼 많이 쌓였다.

“역시 엄청 고통스럽겠군요.”

“그, 그래도 그때만은 못할 거야.”

황준우가 재빨리 시선을 회피하며 말했다.

물론 진실 하나는 쏙 빼놓은 채였다.

망아지경 때는 그래도 정신이 나간 상태였던지라 견딜 만했을지 몰라도 두 사람의 벌모세수는 정신을 똑바로 차린 상태에서 견뎌 내야 한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훨씬 더 괴로울지도 몰랐다.

“전 하겠습니다.”

홍산이 이를 악물고 눈을 불태우며 말한다.

그 역시 얼마 전 경호가 청홍검을 휘두르며 신위를 자랑하는 모습에 자극을 받은 게 분명했다.

“저도 참겠습니다.”

경호는 조금 겁이 난 표정으로 말했다.

어쨌든 과거의 아픔을 딛고, 또다시 두 사람의 동의를 얻은 황준우의 입가로는 미소가 떠올랐다.

“좋아. 벌모세수를 받고 나면 확실히 훨씬 더 강해진 기분이 들 거야. 두 사람 모두. 아마 초절정무인들 중에서도 중간 이상이 될 수도 있을 거라고 봐. 어쨌든 기본 바탕이 좋으니까.”

“음…… 역시 지금은 중간도 못 되는 수준이었군요.”

“경호 네 생각보다 초절정무인은 많아. 그리고 그중에는 조화를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고, 아주 오랜 시간 초절정의 경지를 갈고닦은 사람도 있지. 같은 경지의 이름이라서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그 차이는 종이 한 장과도 같아 보이면서도 엄청 커. 이미 알고 있잖아? 절정의 초입과 말미의 차이.”

“음…….”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주억였다.

절정의 초입과 말미.

이미 겪어 본 경험상 두 간극은 황준우의 말처럼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지만 너무나 두텁다. 아마 일반적인 재능을 가진 절정 초입의 무인 셋 정도가 동시에 덤벼들어야, 절정 말미의 고수를 상대할 수 있을 듯했다.

“그 간격은 고수가 될수록 더 커져. 이것 역시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거야.”

또다시 두 사람이 하나가 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삼류에서 이류, 이류에서 일류, 일류에서 절정까지.

아래에 속해 있을수록 정말 별것 아니었던 차이가 경지가 올라갈수록 점점 벌어진다.

그런 사실을 깨달을수록 마음속에 미약하게나마 남아 있던 자만심이 사라진다.

이제 고수라 불릴 수 있는 몸이 되었지만 아직 중원천하는 넓다. 그들보다 강한 고수는 널리고 널려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좋아, 그러면 허락했으니까 빠르면 오늘 밤, 늦어도 내일부터는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자고.”

두 사람의 얼굴에 확실한 결심이 섰다는 것을 확인한 황준우의 입가로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적어도 저런 각오는 있어야지 벌모세수를 견딜 수 있는 것이다.

“오늘 밤부터 시작…….”

홍산이 작게 읊조린다.

“동호에서 보내는 지금 이 시간이 마지막 행복일까요.”

경호는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두 사람 다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죽이진 않잖아?”

그런 본심을 감추고 적당히 위로에 나서는 황준우다.

“맞아요, 맞아. 일단 우리 놀아요, 경호 아저씨 홍 무사님. 처음 보는 동호잖아요!”

황서연은 진심으로 두 사람을 위로하고, 응원하기 위해 힘껏 목소리를 높였다.

“자자, 일단 놀자고. 놀아. 잊고서 즐겁게 노세!”

그래, 죽진 않을 터였다.

황준우의 이론 어디에도 죽음에 닿을 정도의 위험 구간은 없었으니 말이다.

단지 죽을 만큼 괴로울 뿐이다.

동호에서의 시간은 제법 즐거웠다.

황서연도 평소에 비해 활기차게 놀았고 경호와 홍산도 곧 다가올 시련 전 마지막 행복이라 생각했는지 의외로 모든 걸 벗어 던지고 순수하게 감탄하고, 즐겼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어느 덧 인시 말이라는 약속시간이 가깝게 다가왔다.

“어때, 세 사람 다 더 놀고 있을래?”

황준우의 질문에 황서연을 비롯한 모두가 고개를 내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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