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112화
제 112화
“그게 전부야. 더 이상은 나도 몰라. 돈을 어디다 쓰려고 했는지, 현재 천마신교의 상황이 어떤지 같은 걸 묻기도 전에 죽어 버렸으니까.”
“다행히 가장 궁금한 건 해결하셨군요.”
후자의 정보는 제법 가치가 있을지 모른다.
하나 황준우가 궁금했던 것은 분명 전자의 물음일 터였다.
“당연하지. 그러니까 조금 찝찝해도 괜찮은 거 아니겠냐.”
“몰랐으면 천마신교까지 쫓아갔을 기세입니다.”
“그것도 나쁘지 않지.”
피식 미소를 지은 황준우의 시선이 장강 너머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일단은 무한에 들러야 하지만 말이지.”
“무한이라…… 태어나서 처음 가 봅니다.”
“어린 시절부터 나랑 함께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경호도 세상 구경 제대로 한 지는 얼마 안 됐네.”
“그런 셈이죠.”
“괜찮은 곳이야, 무한. 동호(東湖)도 볼만하고.”
황준우의 여유로운 말에 경호의 눈이 길게 가늘어졌다.
“어째 도련님은 다녀오신 척을 하십니까? 생각해 보니 예전부터 혼자서 다 아는 척을 많이 하셨는데 혹시 무슨 병이라도 있으신 것 아닌지?”
경호의 질문에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손을 내저은 황준우가 기대고 있던 난간에서 재빨리 등을 뗐다.
“아, 그러고 보니 가서 서연이나 위로해 줘야겠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지만 소녀의 감성에 그런 끔찍한 것이 계속 얹어지기만 해서는 안 되지. 위로, 위로가 필요하다. 경호도 오늘 같은 날은 적당히 있다가 푹 쉬라고.”
딴청과 함께 손을 내저은 황준우가 여객선의 객실로 향한다.
그 뒷모습을 당황스럽게 바라보던 경호는 언제나 그렇듯 어쩔 수 없이 한숨을 내쉴 뿐이다.
“그래요. 굳이 제가 알아서 뭐 하겠습니까. 도련님은 도련님인 것을.”
어딘지 모르게 황석후와 닮은 미소를 짓고 있는 경호였다.
5. 무한(武漢)
황준우의 예측대로 주연하가 질문을 한 이후 보름이 되었을 무렵 무한에 도착했다. 물류의 중심지이자 호북의 성도이기도 한 무한은 강과 호수를 낀 거대한 도시였다. 천하의 내로라하는 부호들이 모였다는 물의 도시, 소주에서 자란 황서연에게 있어 무한과 같은 풍경은 당연히 처음이었다.
“와아-! 오빠, 무한 진짜 최고야!”
무한에는 활기가 넘친다.
기본적으로 호북의 성도이니 주민이 많고, 유동인구까지 많으니 언제나 힘이 넘치는 느낌이다. 황준우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오히려 북경보다도 이쪽이 더 볼 것이 많은 편이기도 했다.
“우와! 우와! 와아-!”
“내 동생이지만 감탄이 질리지도 않나 보구나.”
배에서 내려, 주연하 일행과 살짝 거리를 둔 채 걷기 시작한 황준우가 황서연을 향해 말했다.
“무슨 소리야, 오빠! 감탄이 질리면 어떡해. 원래 놀란 건 솔직하게 표현해 줘야 한다고.”
“굳이 번거롭게 입으로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만…….”
“쯧쯧, 이러니까 남자들이 감성적이지 못하다고 하는 거야. 예쁜 건 예쁘다! 귀여운 건 귀엽다! 멋진 건 멋지다! 다 나름의 환호성이 필요한 거라고. 꺄아! 저기 고양이 봐, 오빠. 너무 귀엽다!”
“알았다, 알았어.”
귀가 아플 정도로 소리를 지르는 황서연을 말리기를 포기한 황준우의 시선이 살짝 주연하를 향해 돌아갔다. 이미 접선하기로 한 활협단 측 사람과 만났는지 대화를 하고 있던 주연하가 황준우를 향해 전음을 보냈다.
[인시(寅時) 말(末) 황학루.]
[알겠어. 이따가 보자고.]
주연하에게서 더 이상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 역시 어린 나이에 절정의 경지에 오른 수재급이지만, 아직까지 대화와 전음을 동시에 자연스럽게 이어 나갈 정도는 아니었다.
“인시 말이라…….”
“무슨 말?”
황준우의 혼잣말에 황서연이 뒤돌아보며 물었다.
“인시 말에 약속이 생겨서.”
“약속? 오빠가 무한에 아는 사람 있어?”
“정말입니까?”
“놀랍군요.”
황서연에 이어 경호, 홍산까지 동시에 감탄하니 어딘지 모르게 자괴감을 느낀 황준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뭐야 너희들, 내 인간관계를 그렇게 얄팍하게 본 거야? 나 생각보다…….”
인간관계가 깊지는 않다.
전생과 재생의 살아온 시간을 따지자면 더욱 초라해 보일 정도였다.
가족을 제외하고 나면 경호, 홍산, 주연하, 사마정, 흑백쌍노, 총 여섯.
실상 매일같이 붙어 다니는 경호와 홍산마저 빼 버린다면 네 명밖에 없다.
자그마치 한 갑자에 가까운 인생에 지인(知人)이라 할 만한 사람이 고작 넷이란 것이다. 솔직히 사마정과 흑백쌍노도 조금쯤 욱여넣은 기분도 들었다.
“본인이 생각해도 그렇죠? 그러니까 우리가 놀라는 겁니다.”
“큭……. 부정을 할 수가 없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전생의 마지막 순간, 황준우를 향한 원공의 마지막 말은 단순히 그의 무공만을 논한 것은 아닌 듯했다.
“그래서 누군데?”
황서연이 눈을 반짝 빛냈다.
“친구.”
“여자?”
“넌 요즘 그게 제일 궁금한가 보다.”
꿇리지도 않고 당당하게 대답하는 당돌한 여동생을 보며, 시선을 피한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아마?”
“진짜!?”
“음…… 다음에 소개시켜 줄게.”
아무래도 그 편이 좋을 것 같다.
‘어차피 친구 사이니까.’
심지어 주연하는 황녀다.
그것도 차기 황제로 내정된 제위권자.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황서연도 괜한 의심은 거둘 터였다.
“일단 가자. 무한은 볼 게 많다고.”
무언가 불만이 있어 보였지만, 소개시켜 준다는 말에 일단은 마음을 접은 황서연이 고개를 주억였다.
“그럼 어디부터 갈 거야?”
“동호부터 보자. 태호랑은 또 다른 느낌일거야.”
“기대된다.”
이 나이 또래의 여자아이들이란 본래 그런 것일까?
기분이 나빴다가도, 금방 좋아진 표정으로 말을 한다.
당장의 상황에서는 황준우에게 다행인 셈이었다.
“마차를 타고 가실 겁니까?”
인근이라지만 무한과 동호의 거리가 제법 있기에 경호가 질문했다.
“아니. 이참에 경신법들도 수련할 겸 뛰자.”
“진심이십니까?”
“어차피 반 시진 정도면 충분해. 서연이는 어때?”
“난 좋아!”
어려서부터 몸 움직이는 것 하나만큼은 엄청나게 좋아하던 여동생이다. 아마 굳이 선자기공 같은 걸 알려 주지 않았어도 살이 찌는 일은 결코 없지 않았을까? 물론 지금처럼 고운 피부와 균형 잡힌 몸매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자, 그럼 가자고.”
그 말과 함께 황준우가 제일 앞에서 속도를 조절하며 달려 나가고 나머지 세 사람이 재빨리 뒤를 쫓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황준우의 입장에서는 속도를 많이 조절하여 뛴 것이다. 하나 홍산과 경호에게는 제법 힘든 일에 속했던 것 같았다. 얼마 전 영소를 쫓았을 때처럼 숨조차 가다듬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얼굴에 제법 지친 기색이 가득하다.
의아할 정도로 멀쩡해 보이는 사람은 황서연이었다.
초절정고수인 두 사람이 지쳤는데, 아직 일류밖에 되지 않은 황서연이 멀쩡한 것은 어찌 보면 이상해 보일 수 있으나 이 역시 이유는 존재했다.
기본적으로 어린 시절, 무공을 익히기 시작한 이후 황준우가 밤에 잘 때 찾아가 몰래 해 준 벌모세수의 덕. 거기에 더해 지금까지 만금장에서 구하여 먹인 영약은 현재 그녀의 몸에 조금씩 녹아들며 엄청난 내력으로 불어나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그런 내력이 왜 이제야 힘을 발하느냐?
아직 어렸던 시절, 적리단 도적들과 싸울 때 황준우가 실상 초절정고수의 무공을 넘어선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천조신공 사단공의 경지에 오른 상태로도 꽤나 고전을 면치 못한 근원이 바로 이 이유에 속했다.
도적단 주제에 절정고수가 둘이나 있다는 사실은 문제도 아니었다.
가장 큰 이유를 꼽자면 역시 육체의 문제에 관해 말할 수 있었다. 어린 육체에 과한 내력을 가지게 되면 단기적으로는 큰 힘을 보일지 모르나 성장기에 이르러 불균형이 생기고 이는 곧 안정적인 내력 수발에 큰 장애로 변화한다. 이는 일상생활에 있어 큰 치장은 없지만 치열한 격전 중에는 아주 큰 단점으로 작용한다. 급박한 상황에서 내력이 꼬여 주화입마라는 무시무시한 상황까지 순식간에 직결되는 것이다.
결국 영약이란 것이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다라는 말이다. 독이 약이 되기도 하듯, 때로는 약이 독이 될 수도 있다.
그저 어중이떠중이 수준이 아니라 천하를 논하는 고수를 노린다면 그런 사실도 잘 알아야만 했다.
때문에 어린 시절 황준우는 가진 바 깨달음에 비해 큰 힘을 육체에 담을 수 없었고 펼치기도 힘들었다. 적리단을 상대로도 꽤나 고전을 했고 말이다.
황준우는 육체가 그런 힘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성장하는 순간을 정확하게 열다섯, 지학(志學)을 넘어선 순간이라고 보고 있었다.
이는 실제로 대다수의 상승무인들이 인정하고 있는 부분으로써 황석후 역시 알고 있었기에 황서연에게 영약을 오랜 시간 꾸준히 복용하게끔 조치해 왔다. 황준우에게도 비슷하게 영약이 전해졌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오랜 시간 천조신공으로 준비를 해 왔던 황준우는 이미 지학의 나이를 넘어선 순간 영약으로 얻을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난 엄청난 내력을 손에 넣게 된 것이다.
어쨌든, 때문에 황서연의 잠재 내력 역시 시기에 맞춰 조금씩 터져 나오고 있는 중이었다.
이는 무공을 수련하고 내공을 사용할수록 더욱 자연스럽고 빠르게 증폭할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몇 번 말한 바 있는 바로 그녀의 천재성과 직결되어 있었다.
내력의 미세한 조절과, 흐트러짐 없는 호흡, 그리고 정확한 동작이 하나로 자연스럽게 연계되는 황서연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최소한의 힘으로 최대의 효율을 뽐내게 되어 있었다.
오성의 뛰어남과 함께 갖추어진 무재(武才)란 바로 이런 것이다.
황서연이 지금 고민하고 있는 절정의 벽 역시 머지않아 훌쩍 뛰어넘을 것이 뻔히 보였다.
‘지금 이 속도로 보자면 길어야 보름인가?’
나이 열여섯 여자아이가 벌써 무림의 절정고수가 되는 것. 아마 강호 역사상에서도 몇 번 없던 일일 터였다.
그런 황서연 개인적인 이유에 더불어 하나 더 사실을 꼽자면 경호와 홍산, 두 사람의 내력이 일반적인 초절정 고수에 비해 부족한 것 역시 사실이었다.
일단 경호보다야 낫지만 홍산까지 두 사람 모두 무공을 익힌 시기가 조금씩 늦다. 그렇다 보니 몸에 제법 탁한 기운이 쌓여 있었을 텐데 그를 털어 낼 벌모세수를 해 줄 고수, 그리고 돈 모두 없었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말이 좋아 벌모세수지, 이게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었다. 이 벌모세수란 것은 몸에 탁기가 많이 쌓일수록 더욱 높은 난이도를 자랑하게 되는데, 아주 어린 시절, 가장 순수한 상태 때에도 최소 초절정고수 한 명 분의 내력을 요구한다.
거기에 내공에 정확하게 순차적으로 혈도를 때려 탁기만 흩어 버리는 집중력과 손속까지 필요하다. 심지어 이론적으로 있어 이런 벌모세수를 한 번에 끝내지 못하면 역효과가 날 수도 있기에 남은 탁기를 몰아낼 수 있는 비싼 영약도 몇 챙겨 놔야 한다.
괜히 오대세가나 구대문파쯤 되는 곳이 자신들이 아끼는 귀한 제자 한둘한테만 이런 벌모세수를 해 주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이나 어렵고, 힘든 일인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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