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107화
제 107화
동시에 청홍검에서 중(重)의 특성을 가진 경호의 은빛 강기가 무섭게 솟구쳤다. 무기가 과연 전설이라 불릴 정도로 좋은 덕일까? 그 무거움이 일전에 비해 그리 부담스럽지 않다. 생각보다 경쾌하고 빠르게 검을 휘두르는 경호의 눈에 감탄이 경악으로 바뀌는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이거, 왜 이렇게 커?’
기륜을 뭉치고 강기를 펼치는 과정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잘 나와 봐야 삼 척(尺: 1척=30cm), 못하다면 이 척 정도의 강기가 솟아나야만 했다.
한데 지금 경호의 눈앞에 솟아난 강기는 일 장(長: 1장=3m)을 우습게 넘어선다. 잘 하면 이 장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쉽게 설명하면 엄청나게 컸다.
반면에 소모되는 내력에는 큰 차이가 없는 느낌이다.
“우아아악!”
“버텨라!”
“저놈은 무슨 괴물이란 말이냐!”
자신만만하던 적룡삼조의 입에서 비명과 고함, 거친 욕설이 흘러나왔다. 그것이 그들이 남긴 마지막 유언이었다. 엄청난 크기의 강기에 맞선 그들의 발악은 훌륭하였지만 손쉽게 무너졌고, 남궁세가의 여객선 선두(船頭)를 비롯하여 눈앞에 서 있던 범선 중 하나를 절단 내 버리기까지 했다.
“사, 살려 줘!”
“우아악-!”
갑작스럽게 배가 반으로 갈라지고 침몰하기 시작하자 당황한 수적들이 비명을 내지른다. 그래도 나름대로 물에서 사는 놈들이라고 헤엄도 좀 치고, 수공(水功)도 익혔을 테지만 준비가 된 상태에서 당하는 것과 갑작스럽게 침몰하는 배에 끼이는 건 엄연히 다르다.
주변에서 팔짱을 낀 채 풍경을 구경하던 범선에서는 큰 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뿌우우-!
“퇴각! 퇴각하라!”
“엄청난 고수가 나타났다! 퇴각하라!”
싸울 의지도 생기지 않을 정도의 전력 차에 이름 높은 적룡수로채가 뒤도 보지 않고 꽁무니 빠지게 달아나기 시작한다.
“이, 이게 뭐야.”
처음 겪는 청홍검의 위력에 당황한 경호는 말을 더듬거리며 황준우를 바라보았다.
쓸데없이 자신감을 솟게 하는 검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생각보다 더 하다. 황준우가 그에게 자신감 있게 나서라 한 이유를 충분히 납득하고도 넘어설 수준이었다.
“뭐 해, 경호! 도망가는 놈들 잡아야지!”
“어, 그게…….”
“어서!”
질문을 하기도 전 이어진 황준우의 재촉에 허공으로 뛰어오른 경호의 검이 다시 한 번 적룡수로채의 배를 향해 휘둘러졌다.
‘에라, 모르겠다.’
생각보다 위력이 엄청나다는 걸 알고 나니 한 번 제대로 쓰고 싶은 욕심도 있다. 그래서 허공으로 떠올랐고, 장강의 거대한 물길 위로 온힘을 쏟아 내 보았다.
그로 인해 일어난 형상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경호는 결국 삼 장에 가까운 강기를 만들어 냈고, 그를 휘둘러 도망가는 범선 중 두 척이나 되는 배를 또 고꾸라트린 것이다.
“사, 살려 줘!”
“조화경의 고수가 나타났다!”
인간을 넘어선 초인.
오로지 조화경의 고수밖에 보일 수 없을 것 같은 신위에 수적들은 혼비백산하여 달아났고, 황준우를 향해 분노의 눈알을 부라리던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재빨리 시선을 돌리기 시작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허공에서 거대한 강기를 휘두르고 있는 경호를 보는 황준우 그리고 황서연, 거기에 더해 홍산은 마치 짜 맞추기라도 입을 연다.
“굉장히 커.”
황서연이 첫마디를 내뱉는다.
“그리고 단단하지.”
황준우도 감탄을 토했다.
“아름답고, 훌륭합니다.”
홍산은 어딘지 모르게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지금 경호의 모습은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단단하고 크고 아름답다.
그리고 크고 단단한 것은 언제나 훌륭한 법.
만금장의 무명(無名) 호위무사였던 경호에게 거기검(巨氣劍)이라는 별호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적룡수로채가 쫓기듯 달아나고, 여객선에 탄 사람들 사이로는 거기검 경호의 이름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대다수가 태어나서 그토록 크고 아름답고 훌륭한 강기를 본 적이 없다는 평이었다.
몇몇 부인들은 경호의 보이지 않는 다른 부분도 그런 훌륭함을 갖췄을 것이라고 눈을 흘기기까지 했다.
경호, 거기검이라는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을 것은 뻔해 보였다.
“좋겠네, 경호. 인기 많아져서.”
노골적이기까지 한 부인들의 시선 속에서, 얼굴을 붉히고 있는 경호를 향해 황준우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대단해, 경호 아저씨.”
“과연 은공입니다.”
어찌 됐든 연신 이어지는 감탄과 칭찬.
그런데도 경호는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거기검, 거기검이라니…….”
물론 나름대로 멋있는 별호이기는 하다.
다만 그 능력이 본신의 것보다는 청홍검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하나 더, 왠지 모를 부끄러운 상상마저 자극한다는 것 역시 위험했다.
“우리 경호, 부담스럽게 느끼는 것 같은데 그러지 마. 솔직히 다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그렇……습니까?”
“응. 만약 경호가 그 이름을 듣고 처음부터 이상한 생각을 했다면, 그건 애초에 변태이기 때문일 뿐이야.”
“왠지 또 다른 자괴감이 밀려듭니다.”
엄청난 실력으로 수적들을 물리치고 무명(武名)까지 얻었지만 어두운 안색으로 기가 죽은 경호가 다시 쭈그러든다. 그 모습을 장난스러운 시선으로 지켜보던 황준우가 어깨를 두드렸다.
“에이, 그럴 필요 없다니까. 별호 멋있네. 거기검, 거기검. 아버지한테도 알려 줘야지.”
“도련님…….”
“아, 여객선 선두는 걱정하지 마. 내 이름으로 다 처리하라고 했어.”
물론 그 이름으로 처리될 때에도 남궁세가의 돈이 빠져나갈 테지만 말이다.
“감사합니다.”
“뭘, 감사까지야. 원래 내가 시킨 일이었잖아?”
“처음부터 이리 될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문득 이어진 경호의 질문에 황준우는 곧장 딴청을 피웠다.
“아, 그나저나 적룡삼조인가 뭔가 하는 놈들이 왜 갑자기 나를 찾아온 거지?”
이미 쫓기고 있던 주연하가 아니라 황준우와 황서연을 노렸다.
일단 생각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하나였다.
“아무래도 만금장을 노린 게 아닐까요?”
홍산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황준우와 황서연을 목표로 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없던 탓이다.
“적룡채가? 이제 와서 왜?”
이런 근거가 없는 사건은 아무리 황준우라고 해도 단번에 알 수가 없다. 이쯤 되니 구경이나 할 게 아니라 한 놈쯤 사로잡을걸 그랬다는 생각도 들 정도였다. 너무 단서가 없는 탓이었다.
‘전왕 그 녀석이라면 달랐으려나?’
한 번밖에 못 보았을 뿐인데 이런 순간이 오자 괜히 아쉬워지는 얼굴이다.
“아무래도 남궁세가의 여객선이라 협의를 보기도 좋을 것 같고, 기회를 기다린 것 같기는 합니다.”
“경호 네 생각에는 갑작스럽게 벌인 일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기죽어 있던 경호가 분위기에 휩쓸려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는데. 어쩌면 내가 배에 탄 순간부터 계획한 것일 수도 있지.”
“음…….”
“아, 아니다. 적어도 나를 노린 건 분명 여객선에 탑승한 이후겠지만, 만금장을 향해 칼을 간 건 그 전이겠지. 아버지가 적룡채와 무슨 척질 일을 하셨나?”
물론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가정 내에서는 조금 허술한 모습을 보일지 몰라도, 상인 황석후는 굉장히 빈틈이 없는 사람이다. 괜한 분란거리를 만들어 내어 손해를 만들 리가 없었다.
“적룡수로채, 만금장.”
상행 도중 자주 마주치지만 그 이상의 접점을 찾을 수는 없는 두 세력.
“아, 이것 참. 어렵네.”
조금 짜증이 나는 일이었지만 걱정은 길지 않았다.
“볼일 있으면 또 찾아오겠지. 그때 물어보면 되지 뭐.”
어쨌든 경호의 활약을 구경하고 싶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해 제법 기분이 좋은 황준우였다.
“그때 되면 또 잘 부탁해, 거기검.”
“안 할 겁니다.”
“어허, 고용주의 엄명이시다!”
“……칫.”
아마도 경호는 평생 황준우를 이기지 못할 듯했다.
4. 흑풍(黑風)
적룡수로채.
수적집단인 그들의 서식지는 당연히 강 위다. 그래서 적룡수로채의 거처를 수채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나 그렇다고 하여 정녕 물 위에 건물을 쌓을 수는 없는 일. 하면 수적들이 기거하는 수채란 정녕 무엇이란 말인가? 어려울 것도 없었다. 말만 그럴싸할 뿐, 애초에 수채란 본래부터 존재했거나 강물 위로 흐른 토사물 등이 쌓여 만들어진 작은 섬 위에 지어진 건물인 것이다.
적룡수로채의 이름을 빌리는 작은 수적 집단은 그런 수채마저도 작다. 토사물 위에 지어진 건물은 사실 채(砦)라고도 부르기 민망한 지경인 수준도 많은 것이다.
하나 먹고살 길이 막막하여 수적질에 오른 이들이 그런 것을 따질 수나 있겠는가? 기껏 만든 수채가 불편하면 차라리 수적질하기 위해 튼튼하게 만든 배에서 잠을 청하면 될 뿐이다.
반대로 말하여 거대 수적 집단일수록 수채는 크고 웅장해진다.
모든 수적들의 정점에 서 있다는 적룡수로채의 본단쯤 되면 울타리 정도가 아니라 아주 요새다. 배들이 기거할 수 있는 선착장은 물론이요, 그 뒤편으로 가면 돌로 쌓은 성벽도 있다.
심지어 성벽 내부에는 하위 수적들이 머무는 마을이 따로 존재한다.
중심에는 본단의 간부들과 수로왕이 기거하는 작은 요새가 달리 세워져 있는데, 말이 작다뿐이지 어지간히 큰 장원 하나에 비견해도 부족하지 않을 수준이었다.
거기에 더해서 또 한 번!
그런 장원의 중앙, 높게 쌓아 올린 칠 층의 전각은 오로지 수로왕과 그의 형제나 다름없는 적룡의 후예들만이 들어설 수 있다.
때문에 전각은 적룡영토(赤龍領土)라 불리며 수많은 수적들의 경외심을 받았다. 소문으로는 모두가 잠든 밤, 아주 가끔이지만 영토에 수적들의 수호신 적룡이 나타나 수로왕과 술잔을 기울이며, 수적들의 미래를 논하기도 한 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런 신비스러운 이야기는 하위 수적들이 적룡영토에 대한 존경심과 경건함을 한층 더 높일 뿐 아니라, 그 내부에 사는 중진들과 수로왕에 대한 신뢰를 한층 더 단단하게 다지게 해 주었다.
물론 적룡의 후예를 비롯한, 강림(降臨)에 대한 이야기는 적룡수로채의 수장인 수로왕이 만든 헛소문이고 과장 된 이야기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지 못하고, 깨달음이 적은 수적들은 손쉽게 믿고 공경심에 취하여 제 목숨마저 거침없이 바친다.
수많은 수적들의 정점에 군림하고 그들 전체를 수족처럼 굴리는 수로왕의 힘은 이러한 심리적인 전략 면에서도 크게 유효했다.
정도를 알고, 사람을 지배하고, 부릴 줄 안다.
때문에 그는 언제나 여유로울 뿐 아니라 수적들의 왕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온화하기까지 했다.
오죽하면 적룡수로채의 수적들 사이에서 수로왕의 또 다른 별호가 수로보살(水路菩薩)이다.
그런 수로보살의 얼굴이 오랜만에 붉어졌다.
크게 감정을 토하지는 않았지만 양 미간이 팔(八)자로 접힌 모습만 보아도 그가 전에 없이 상당히 불쾌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적룡삼조가 죽었다라…….”
입가로는 씁쓸한 웃음이 감돈다.
오랜만에 쥔 술잔에는 술이 가득 차고, 비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입맛이 유독 쓰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 않소. 설마 아직 불혹도 되지 않은 만금장 소장주의 호위무사 초인일 줄 누가 알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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