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103화
제 103화
“뭐 그런 끔찍한 건 없어. 그냥 전투의 흔적이 조금 남아 있는데 제법 격렬하게 싸운 것 같아서 잠시 쳐다본 거야.”
“그렇습니까.”
짧은 대화가 이어졌고, 일행들 모두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동릉현으로의 걸음을 이었다. 얼마 전 기사를 여러 번이나 겪은 탓인지 고작 격렬한 전투 정도로는 성에도 안 차는 모습들이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는지 반나절이 지나기 전에 일행들은 동릉에 도착했다.
장강의 물길을 맞대고 있는 선착장인 탓인지 제법 번화한 도심의 풍경과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왁자지껄하고, 난잡한 듯한 풍경은 그간 살아온 또 다른 물의 도시인 소주와는 전혀 상반된 느낌이었기에 황서연은 연신 눈을 반짝이며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다. 황준우 역시 즐거운 시선으로 그런 황서연을 바라본다.
그 와중에 아주 재수 없게, 황서연과 어깨를 부딪친 흑도 왈패가 눈을 부라리며 시비를 걸었지만 당연히 좋은 꼴을 보지는 못했다.
애초부터 천재인데다 일류에서 절정 사이에 위치한 황서연의 무공을 왈패 따위가 어쩔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남은 시간을 바쁘게 보내고 나니 금세 해가 졌다. 마을 주민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고 바쁘게 움직이던 상인들도 휴식을 취하기 위해 객점으로 들어간다.
“이러다가 방 못 잡겠다. 일단 우리도 객점으로 가자.”
황준우의 말에 별 아쉬울 것 없는 표정의 황서연이 고개를 주억였다.
동릉 구경을 모두 마친 것은 아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오늘만 날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객점을 잡고, 목욕물로 따뜻하게 씻은 일행들은 일 층에 모여 음식을 주문했다.
“어때, 첫 여행은 마음에 들어?”
소주를 벗어나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돌아다닌 황준우의 질문에 황서연은 음식을 먹던 채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응, 너무 좋아.”
이후 잠시 고민하는 표정으로 객점 지붕을 바라본다.
“음…… 배우는 것도 있고?”
황서연의 말에 웃음을 보인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좋은 일이야.”
여행은 즐거움과 함께 배움을 남긴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여행길에 오르고, 누군가에게 떠나라고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제법 일이 많은 여정 속에서 황서연이 그만큼 착실하게 과정을 즐기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내일은 한 번 선착장 주변을 둘러보자.”
“좋아!”
동릉에 들른 첫날이라 대부분을 시장에서 보낸 황서연이 활기차게 외친다.
‘그나저나 내 동생이 역시 인기가 좋구먼.’
목소리를 높일 때는 더욱 몰려들었지만, 그 전부터 황서연을 힐끗거리는 시선의 수가 보통이 아니다. 그중 몇은 시장에서부터 그녀를 좇은 시선도 있었다.
제 눈에는 당연히 예쁘지만, 그래도 황준우는 새삼 뿌듯한 마음을 느꼈다.
가끔 섞여 있는 불쾌한 시선이 심경을 건드리곤 했지만 직접 무슨 행동을 하지만 않는다면 그쯤은 용납해 줄 수 있었다. 그런 것을 일일이 신경 썼다가는 손발이 수십 개여도 모자랄 테니 말이다.
여러 가지 생각과 대화를 하며 식사를 하다 보니 밥맛도 더욱 좋게 느껴진다.
실제로 약간 늦은 저녁의 객점에는 활기가 가득했다.
식사와 술이 공존하고 웃음소리가 더욱 많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런 객점 문이 열리고 새로운 손님들이 들어온다.
아니, 손님이라 보기는 힘들었다.
눈을 부라리며 주변을 둘러보는 모습이 흉험하여 오히려 난봉꾼이라 보아야 하는 게 분명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길거리 흑도 왈패들보다는 조금쯤 점잖았다. 눈을 부라리고 흉흉하게 걷지만 쓸데없는 시비는 걸지 않는다. 다만 그 시선이 사람들 하나, 하나를 모두 훑고 있기에 부담스럽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자연스레 밝기만 하던 객점 내의 공기가 살짝 무거워졌다.
‘누굴 찾고 있나 보군.’
시선을 마주친 순간 살짝 내력을 흘려 상대를 훑어본 황준우가 입술을 핥았다.
‘이거, 황궁 쪽 무공을 익힌 것 같은데?’
보통 황궁의 무공을 익힌 무인이라 하면 금의위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그 다음쯤 가는 곳이 동창이다.
실상 무력 단체가 아닌 정보 단체에 가까웠지만, 기본적으로 동창의 무공 실력 역시 어디 가서 부족한 수준은 아닌 탓이다.
하나 그들만이 황궁 무인의 전부라고 볼 수는 없었다.
황궁에는 생각보다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중에는 무공을 익힌 이들이 더 많았다. 음흉한 귀계와 암계가 넘치는 황궁에서 살아남으려면 제 한 몸 지킬 호신술 정도는 필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군부에 속한 군인들의 경우는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일반 병졸마저도 쉽게 익히고 빠르게 사용할 수 있는 삼류 무공 정도는 사용할 줄 안다.
세간에 존재하는 황궁에는 무공을 익힌 무인이 적다는 것 자체가 편견이었다.
황궁 역시 드넓은 무림에 못지않게 많은 무인들이 존재한다.
황준우가 그들을 한눈에 알아본 데에는 황궁 특유의 내공심법의 흔적 탓이었다.
대다수 정파 무인의 내공심법은 잔잔하면서도 흔들려도 금방 본래의 모습을 찾는 물을 닮았다면, 사파는 빠르게 몰아치는 급류를 떠올리게 한다. 반면 황궁의 무공은 무거웠다. 마치 산을 떠올리게 만드는 형태랄까? 이유는 짐작이 되었다.
‘아마도 소림 무공을 기반으로 무공을 갈고닦은 탓이겠지.’
정파 무공 대다수의 특성을 바다라 말하였지만, 소림의 경우는 비슷하면서도 조금 달랐다. 부드러운 물보다는 탄탄하면서도 포용력이 큰 대지의 형태랄까. 아마 황궁의 무공은 이런 소림과 연관이 큰 듯했다.
중요한 것은 지금 객점을 훑어보는 무인들의 무공이 바로 그런 황궁의 무공의 특성을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산이라 부르기에는 아주 많이 부족하지만 말이지. 기껏해야 작은 언덕?’
최고수가 일류, 대다수가 이류의 무인들.
무림에 있어 흔하디흔한 수준이라는 뜻이다.
물론 황궁 무인들 중 최고수라 볼 수 있는 이는 거대한 산악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러한 부분은 실상 정파, 사파를 가리지 않고 비슷하였다.
일반적인 정파의 고수는 우물 혹은 샘물에 비유되지만, 손가락에 꼽히는 초고수들은 강과 바다를 비유한다. 사파의 경우도 비슷한 표현이 많았다.
“오호…….”
그런 생각을 하는 중, 문득 황준우의 눈에 뜨이는 인물이 있었다.
별 관심이 없어 신경 쓰지 않고 있던 객점 내부의 인물들 중 황궁 무공을 익힌 흔적을 가진 이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찾은 탓이다.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있지만 눈을 부라리는 하수들과 다르게 제법 실력이 있는 고수다.
절정의 초입쯤.
또 한 번 비유를 하자면 제대로 된 언덕 하나를 가진 인물이었다.
나머지 이류, 일류의 무인들이 동시에 덤벼든다 한들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 당연하다.
한데도 오히려 시선을 피하고 조심스럽게 움직인다.
‘아무래도 숨어야 되는 입장인 것 같지?’
대충 그림이 보였다.
“없는 것 같군.”
“가자.”
음식을 먹으면서도 상황을 살피는 황준우의 곁으로 돌아온 황궁의 무인들이 자기들끼리 지껄이며 바깥으로 나간다.
‘눈 뜬 장님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잘 숨었다고 해야 될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위기를 넘긴 사내가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얼마 뒤,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향했다. 이후 그가 돌아왔을 때에는 일행들과 함께였다.
처음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내가 나갔다 돌아오고, 일행과 함께 오자 또다시 흥미를 보인 황준우는 깜짝 놀랐다.
‘어, 이거?’
익숙한 내음과 무공의 흔적이 눈에 뜨인다.
사내들 사이로 숨어 모습을 감추고, 무공을 이용하여 기척마저 감춘 채 면사를 눌러쓰고 있었지만 황준우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주연하.”
황준우의 짧은 중얼거림에 황서연이 귀를 기울였다.
“방금 여자 이름 불렀지?”
“아니.”
본능에 가까운 부정을 한 황준우의 시선이 계속해서 면사 여인, 주연하를 좇는다.
“흐음…….”
황서연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시선을 함께 옮겼지만 그녀의 수준에서는 아직 주연하를 콕 짚어 낼 수 없었다.
자연스레, 황준우에게 첫 번째로 생긴 마음은 반가움이었다.
그와 동시, 두 번째로 떠오른 마음은 바로 의문.
‘네가 왜 여기에?’
황석후에게 듣기로 자금성의 정쟁이 한창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주연하 역시 황궁을 빠져나오기 힘든 상황일 터.
한데 북경과는 한참 거리가 있는 안휘의 동릉에서 그녀를 보게 된 것이다.
그런 시선을 느낀 것일까?
무인들 사이에 둘러싸여 자연스럽게 객점의 식탁에 앉던 주연하의 눈이 움직여 황준우에게로 닿는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허공에 얽힌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눈치챈 이후 놀라는 기색을 보이던 주연하가 면사를 살짝 들어 올린다.
옆에 앉은 시녀가 말리는 시늉을 했지만 듣지 않았다.
올곧이 드러난 얼굴.
때가 묻고, 많이 수척해진 모습에 황준우가 걱정 섞인 시선을 보낼 무렵 주연하의 붉은 입술이 달싹였다.
‘반갑구나, 친구여.’
전음도 아닌 입 모양일 뿐이지만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때문에 황준우 역시 걱정 가득한 기색을 지우고 밝은 모습으로 답변해 주었다.
“나도 반가워, 친구.”
짧은 답변에 주연하가 활짝 웃었다.
식사 시간이 끝나자 황서연과 경호, 홍산은 또다시 개인 수련에 들어갔다. 본래에도 그랬지만 시간이 갈수록 더욱 열심히 하는 일행들이다. 자극을 받을 상대가 더욱 가까이 있는 것과, 얼마 전 있었던 풍마채의 습격 등이 더욱 마음에 촉진을 가한 것이 분명했다.
평소였다면 일행들을 돕거나, 본인의 수련을 했을 황준우는 객점 바깥에 나가 사람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객점 문이 열리고 익숙한 기척이 바깥으로 나왔다.
느린 걸음으로 살금살금.
팔짱을 낀 채 앞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미 그 기척을 느끼고 있던 황준우가 뒤로 확 돌아서며 외쳤다.
“왁-!”
“어맛!”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인지, 놀란 표정으로 비명까지 내지른 주연하가 휘청이며 넘어지려 한다. 그런 주연하의 손을 낚아채 일으켜 세워 준 황준우가 웃었다.
“이거 봐, 못된 습관 아직 못 버렸구먼.”
“노, 놀라지 않았느냐!”
“먼저 놀래려 했으면서 말이 많다.”
“…….”
짧은 소란에 주변의 시선이 잠시 몰려들었지만 손을 잡은 황준우가 몇 걸음을 내딛은 순간 모두 사라졌다. 정확하게는 두 사람이 서 있던 장소가 완전히 바뀐 것이다. 순식간에 몇 가지나 되는 풍경을 지나, 조용한 산책로 사이에 떨어진 주연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황준우를 바라본다.
“여기는…….”
“동릉 바깥이야. 아무래도 시선이 신경 쓰일 것 같아서.”
황준우의 말에 고개를 주억인 주연하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면사와 죽립을 완전히 벗어 던졌다. 늦은 밤의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휘감는 느낌이 제법 상쾌하여 더욱 짙은 미소가 흘러나왔다.
“덕분에 조금 살 것 같구나.”
“별말씀을.”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황준우가 주연하를 닮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굳이 그런 고민을 할 필요는 없었다. 아무런 말없이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기분이 좋다. 단지 늦은 밤 조용한 숲길이 주는 안정감과 상쾌한 바람 탓만은 아닐 터였다.
‘이런 게 사랑인가?’
잠시, 그런 고민을 한 황준우의 입가로 짧은 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그럴 리가.’
주연하는 황준우에게 있어 분명한 친구다.
아직까지 누군가와 제대로 된 연애를 한 번 해 본 적이 없기에 장담하는 것도 우습지만, 황준우는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아마 주연하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니 얼굴이 괜스레 붉어지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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