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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102화 (102/373)

학사재생 102화

제 102화

그렇다면 주변에 기척이 느껴져야 할 텐데 아무것도 없다. 눈앞의 청년에게 큰 의미를 둘 것은 없었다. 그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으니 말이다.

“일행들이란 게 유지량 표두 쪽 맞아?”

“어, 유 표두님을 아십니까!?”

청년 표사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청년은 유지량을 곤혹스럽게 했던, 표행 중 마차와 함께 사라진 표사다.

“기다려 봐.”

황준우는 청년이 나타났던 수풀을 가르고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황서연과 경호, 홍산이 그 뒤를 쫓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청년 표사 역시 침을 꿀꺽 삼키고는 네 사람의 뒤꽁무니를 따랐다. 혼자 있기 불안한 탓이었다. 그렇게 앞장서 나간 황준우는 오랜만에 전력을 다해 주변으로 기운을 떨쳤다.

황준우의 기운에 대기가 짧게 진동하며 공명을 토한다. 그러자 황준우의 시야가 나무를 넘고 산을 넘어 하늘로까지 이어졌다. 마치 주술에서 말하는 천리안(千里眼)을 발휘하는 것 같은 모습이다.

‘어디냐? 분명 주변에 있을 텐데?’

황준우의 미간이 점점 찌푸려지는 순간이었다. 백 리(里) 밖. 무언가 희끗한 형체 하나가 스치듯 황준우의 시야를 스쳐 지나갔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제대로 인지하기도 힘든 수준이었지만, 그 순간 황준우는 분명 무언가를 보았다.

‘진짜 영소?’

깜짝 놀라 비명을 내지를 뻔했다. 또 한편으로는 그 뒤를 쫓고 싶었지만 더 이상 보이거나 느껴지는 기척이 없었다. 이를 질끈 깨문 황준우가 빠르게 허공으로 날아올라서까지 기운을 펼쳤지만 이미 언뜻 보았던 영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허…….”

황준우가 지면으로 내려서며, 믿기지 않는 사실에 허탈한 웃음을 한참을 흘렸다.

‘진짜 영소? 진짜 영소라고?’

언뜻 스쳐 간 모습이었지만 산해경에서 보았던 산신령 영소의 모습과 일치한다. 황준우는 분명 그것을 보았고, 눈앞에서 놓쳤다. 온몸의 털이 잔뜩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천하제일의 무공을 얻었다고 자신하여 게을러져 있던 그를 누군가 강하게 채찍질하는 기분이다.

“다음에 만났을 때는 절대 놓치지 않는다.”

물론 이와 같은 우연이 또다시 있을 줄은 모를 일이다.

하지만 한 번이 있었는데 두 번이 없으란 법도 없는 것 또한 사실.

황준우는 콧김을 강하게 내뿜으며 등을 돌렸다.

시선은 영소를 좇다 결국 멀어진 일행들에게로 향했다.

“여어-!”

평소처럼 돌아온 황준우가 한 손을 들어 올리자,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가다듬고 있던 일행들이 힘겹게 시선을 들어 올린다.

“도, 도련님…… 헉! 헉!”

“하아…… 하아…… 너무 빨라, 오빠.”

무릎을 부여잡고 거친 숨을 토해 내고 있는 경호의 말에, 제자리에 벌러덩 누워 버린 황서연이 손을 내저으며 말한다.

홍산 역시 별다른 말을 하지 못한 채 거친 숨만을 토해내고 있었다.

본래 전화상단의 표사였을 청년은 보이지도 않았다.

‘당연한 일인가?’

기껏해야 일류 무인.

초절정고수 두 사람을 쫓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오히려 고작 일류에 불과하면서 여기까지 쫓아온 황서연이 대단한 것이다.

물론 도착한 시간이 두 사람보다야 월등히 늦었겠지만 근성이든, 체력적인 면이든 칭찬해주어야 할 일이었다. 이는 재능의 경계를 벗어난 일이었으니 말이다.

“진짜…… 진짜 요괴였습니까? 헉, 헉.”

경호의 지친 물음에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아마? 근데 잡지는 못했어.”

“진짜입니까?”

홍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다.

“그럼 내가 거짓말하는 것 같아?”

“그러실 리는 없겠지만…….”

“진짜야. 요괴라기보다는 산신령이라는 느낌은 분명했지만.”

얼핏 보았던 모습과 그 속에서 느껴진 기운은 요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맑고 정순했다.

때문에 황준우는 산신령이라는 생각에 더 의견을 기울인 것이었다.

“끙…….”

앓는 소리를 내는 홍산을 향해 웃음을 보인 황준우가 말을 이었다.

“나도 자세히 보지는 못했어. 하늘도 날고, 무지 빨랐거든.”

“도련님이 쫓지 못했다고요?”

경호가 놀란 음성을 흘린다.

“그러게나 말이다.”

어깨를 으쓱한 황준우의 시선이 또 한 번 수풀 사이로 향했다.

“푸학! 하악! 하악, 하악!”

첫 등장 때와 마찬가지로 수풀을 가른 청년 표사가 거의 토를 할 듯 거친 숨을 내쉬며 모습을 드러냈다.

“이쪽도 근성 하나는 보통이 아니네.”

“여, 여러분 모두, 푸하아! 너무, 너무 빠르십…….”

“그만 말해. 알고 있으니까.”

피식 웃은 황준우의 시선이 이번에는 오른편을 향했다.

“그나저나, 나 재미있는 걸 발견한 것 같은데 가 볼래?”

“재밌는 것?”

바닥에 엎어져 있던 황서연이 반쯤 몸을 벌떡 일으킨다. 이 역시 무공의 재능과는 별개의 능력이었다.

“조, 조금 쉬었다 가면 안 될까요? 헉, 헉.”

경호는 손을 내저었다.

홍산은 억지로 몸을 일으켰지만 마찬가지로 힘들어 보인다.

“하악, 하악! 꼭…… 하아악!”

청년은 숨넘어가지 않으면 다행인 꼴이다.

“아니면 여기 있어. 내가 가지고 올 테니까.”

그 말과 함께 황준우의 모습이 사라졌다.

남은 네 사람은 의문을 느낄 힘도 없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또 다른 생각을 하는 것조차 힘든 탓이었다.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모습을 드러낸 황준우의 한 손에 들린 것은 끄는 말 없이 몸체만 덜렁 남은 마차였다. 마차의 양쪽 문에는 전화상단을 상징하는 금자를 가득 품은 꽃이 그려져 있다.

“그 마차는! 푸하아악!”

청년이 호흡을 가다듬지 못한 와중에도 비명을 내지른 후 또다시 숨넘어갈 듯한 꼴을 보인다.

“자자, 진정하고.”

무거운 마차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려놓은 황준우가 황서연과 경호, 홍산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이로써 확실해진 것 같지?”

“예, 그렇군요. 헉, 헉.”

청년 표사는 유지량 밑에 있던 전화상단의 표사다.

그리고 마차와 함께 사라졌었다.

범인은 아마도 황준우가 짧게 보았던 영소.

하나 함께 납치되었던 말은 사라졌고 청년은 기억을 잃었다.

“참고로, 마차 안은 텅 비었어.”

표물, 그러니까 찻잎이 사라졌다는 말에 청년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나머지 일행들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사실에 입을 턱 벌렸고 말이다.

그야말로 기사(奇事)가 벌어진 셈이었다.

마차와 표사는 돌아왔다.

하나 황준우가 보았다는 영소는 마치 헛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졌으며, 표물이었던 찻잎과 말들도 모두 사라졌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분명히 벌어진 현실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아주 가끔이나 마주친다는 기사를 겪은 것이다.

일행들은 충격 속에 잠시 당황했지만 곧 마음을 정리해 나갔다.

어찌 됐든 그들에게 무슨 탈이 있던 것은 아니다.

또한 이런 기사를 앞으로 마주칠 일 역시 없을 것이라 생각한 탓이었다.

‘인간이 망각의 동물인 탓도 가장 크겠지.’

충격과 공포마저도 금세 지워 버리는 인간이 가진 편의성에 감사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어째서인지 그런 망각의 은혜를 가장 깊게 입은 것 같은 청년 무사는 황준우가 직접 아직 멀리 가지 않은 유지량 일행에게 인도해 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유지량과 표사들 역시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지었지만, 황준우의 말을 거짓이라 생각하기도 힘들었기에 청년 표사를 어렵지 않게 받아들였다. 평소 그의 행실이 예의 바르고 모나지 않은 덕도 큰 것 같았다. 분명히 죄가 있을진대 모든 표사들이 그를 반기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청년 표사를 떠맡긴 황준우는 일행들과 함께 걸음을 재촉했다. 목적지는 없었지만 방향은 일단 서쪽을 향했다.

그냥 황서연이 그쪽이 끌린다고 한 탓이었다.

며칠이 지나고, 모두의 머릿속에서 경정기사(敬亭奇事)의 사건은 점점 흐릿해져 갈 때쯤이었다.

향하던 길에 들른 마을 인근이 쑥대밭이 된 모습을 보았다.

도적떼의 소행은 아니었다.

나무가 부러지고, 마을 집 안에 물이 가득 찬 상황에서 땅이 갈라진 풍경은 기이하면서도, 고작 도적 떼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 사실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마을의 한 주민이 말하기를, 얼마 전 천둥번개와 함께 빗물이 쏟아지고 하늘에서 붉은 불꽃이 수도 없이 터져 나갔다고 했다. 주민들은 진짜 하늘이 노하셔 큰 벌을 주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집 안으로 숨어들었다. 밤이 새도록 이어진 무서운 풍경에 떨리기도 했지만 비가 너무 많이 와 물이 집 안까지 스며든 것을 제외하고는 큰일은 아니었다곤 한다.

다만 마을과 인근 주변을 제외하고는 어디에서도 그와 같은 사태가 없었다는 사실이 기이할 뿐.

일행들은 자연스레 다시 한 번 경정산에서의 일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연관이 있으려나?’

누군가는 부정했지만, 황준우는 확신했다.

‘영소, 진짜 잡아 보고 싶네.’

한때 천하를 오시하며 유아독존하였다고 믿는 그의 주변에서 알지 못하던 일들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단순한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우연이 필연(必然)이 되는 때도 있는 법.’

그러기 위해서라도 지식과 힘, 모두가 필요했다.

‘어찌 됐든 학문을 익힌 건 잘한 셈이 되어 버렸네.’

무식하게 힘 하나만 가지고 상황을 처리할 때와 많은 게 달라졌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새로운 것들이 주변에 가득해졌다.

배운다는 것은 이제 황준우에게 즐거움을 벗어나, 필요한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 역시 우연이 필연이 된 과정 아닌가?

황준우는 진심으로 황석후와 백교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나, 배를 타고 싶어.”

갑작스러운 선언과 같은 황서연의 말에 황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태호에서 배 타보지 않았어?”

아주 가끔 태호까지 놀러 가곤 했다니 뱃놀이 정도는 해 봤을 것이라는 생각에 한 질문이었다.

“호수하고는 다르지! 내 말은 장강에 올라보고 싶다는 거야!”

“장강이라…….”

나쁘지 않다.

오히려 알아 두면 좋을 일이다.

천하의 남쪽은 물길을 따르니, 만금장의 물류업 역시 장강과 회하를 따르고는 한다. 그중 하나를 돌아보는 일은 미래에 만금장을 짊어지게 될 사람에게 있어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제법 지겨울 텐데.”

그래도 한마디는 해 주었다.

태호에서 하는 뱃놀이와는 다르다.

장강의 물결은 마치 바다를 닮아 끊임없이 이어지고 도도하게 흐른다. 그를 보며 누군가는 인생의 희노애락을 더하여 깨달음을 얻는다곤 하지만 이미 겪어 본 황준우의 입장은 글쎄, 실상 지겹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다.

“그래도 타 볼래.”

“반대는 안 해. 그냥 미리 알아 두란 거지. 아, 그리고 뱃멀미하면 무지 괴롭다.”

“걱정 마, 태호에서는 괜찮았어.”

태호와 장강이 같을 줄 아는가.

속으로 그리 생각하면서도 겉으로 음흉한 웃음을 지어 보인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본인이 그렇게 자신하니까 뭐.’

만약 진짜 뱃멀미를 한다면 한 번쯤 고생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다 경험이잖아, 경험.’

설사 뱃멀미가 심하다고 하여도 황준우 나름의 방법 또한 있었다.

“일단은 가까운 곳은 동릉인가.”

경정산을 벗어나 서쪽으로 제법 이동했으니 가장 가깝게 배를 탈 수 있는 지역은 역시 동릉현이다. 황서연을 뺀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었기에 일행들의 걸음은 곧장 살짝 북쪽으로 이어졌다.

제법 잘 닦여 있는 길을 지나던 중 황준우의 시선이 잠시 숲길 어딘가를 향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 별건 아니야. 그냥 누가 근처에서 싸웠나 본데.”

“혹시…….”

얼굴을 싹 굳힌 경호의 질문에 황준우가 손을 내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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