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재생-100화 (100/373)

학사재생 100화

제 100화

1. 경정기사

풍마채의 습격 이후 며칠이 더 흘렀다.

마을 주민들과 유지량을 비롯한 표사들, 홍산, 경호까지 팔을 걷고 나선 결과 마을 복구 작업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주민들은 그런 그들의 은혜에 감사하며, 만금장 소속이라는 말에 감탄을 감추지 않았다.

명불허전(名不虛傳).

흔히 쓰일 수도 있는 말이 그토록 기분 좋게 들린 적은 또 처음이었다.

걱정했던 황서연 역시 얼마 뒤 방문을 열고 나왔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보여 주듯, 평소보다는 조금 덜했지만 활기차고 씩씩한 표정으로 일상을 시작한 그녀를 바라보는 경호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번질 쯤.

황준우가 돌아왔다.

“이게 무슨 일이야?”

마무리 복구 작업이 이어지던 도중, 모습을 드러낸 황준우가 황당한 표정으로 묻는다.

“도련님!”

“주공!”

“오빠!”

“소장주님을 뵙습니다!”

무인들의 우렁찬 외침에 함께 고개를 돌린 마을 주민들의 표정에도 웃음이 번졌다.

“큰 은인께 감사드립니다!”

어려 보이는 황준우가 만금장의 소장주고, 그들을 살린 무인들이 만금장 사람들이다. 덕분에 마을 사람들이 마음속에 품은 감사함이 황준우에게까지 이어진 것이다.

“어, 어. 그래요. 그래.”

얼떨결에 마을 주민들의 감사 인사를 받은 황준우가 손을 들며 고개를 주억였다. 이후 시선은 품으로 달려드는 황서연을 향한다.

“오빠!”

이제는 습관처럼 품에 달려드는 그녀를 자연스럽게 품으며, 머리를 쓰다듬은 황준우의 표정이 굳었다.

“연이, 뭐 힘든 일 있었구나.”

“살이 좀 빠졌어, 안색도 좋지 않고. 밥을 제대로 안 먹은 거야?”

“그, 그게 표시가 나?”

선자기공의 효능으로 여인으로서는 언제나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황서연이었다.

덕분에 며칠 고생을 했어도 피부가 푸석푸석해진다거나, 몸이 급격하게 망가진다거나 하는 증상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세세하게 따지면 조금쯤 문제가 생기기야 했겠지만 일반적으로 척 보자마자 알아본다는 게 말이 되는 일인가?

“그냥 딱 보면 딱이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우리 오빠?”

“그렇지.”

황준우의 짧은 답에 얼굴을 붉히며 즐거운 표정을 지은 황서연이 웃음을 흘렸다.

“헤헤.”

몇 번이고 고개를 주억이고 있는 그녀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은 황준우의 시선이 다음으로 경호를 향했다.

“보아하니 일이 있긴 있었구먼. 도적들?”

복구 작업 중인 마을과 작은 경상을 입은 표사들 등 황준우가 상황을 예측하기에 있어 어려운 부분은 없었다.

“풍마채였습니다.”

“녹림? 그 녀석들이 여기까지는 왜?”

별것 아닌 일에도 이유가 생기곤 하는 곳이 곧 무림이다. 황준우의 의심은 자연스러웠다.

“우연이었다고 합니다. 제압하고 직접 사로잡아 심문해서 알아낸 사실입니다.”

“그래서 연이 표정이 이렇게 안 좋았구나.”

황준우의 눈매가 굳어졌다. 황서연에게 있었을 첫 싸움과 피, 그리고 끔찍한 풍경을 떠올린 탓이다.

“어떤 개자식들이야. 다들 어쨌어? 데려와 봐.”

황준우가 주먹을 움켜쥐며 이를 뿌드득 간다.

아마 이 자리에 풍마채 도적들이 남아 있었다면 차라리 죽음을 원했을지도 모를 지독히도 고통 가득한 매질이 이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쉽게도 이미 관아에 넘겼습니다.”

경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황준우라고 해도 이쯤 되면 포기할 것이라 생각한 탓이다.

“어디 관아?”

“어디 관아로 넘겼냐고?”

“그야 가까운 선주(宣州)현 관아로…….”

“다녀올게.”

경호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바람처럼 나타났던 황준우가 유령처럼 사라졌다.

그가 어디로 향했을지야 뻔했다.

“은공이 주공을 너무 얕보셨습니다.”

당황하는 경호의 어깨에 손을 얹은 홍산이 고개를 내젓는다.

“홍 공자…….”

“이제 그만 적응하실 때도 되지 않으셨습니까?”

아닌 게 아니라, 품에 안겨 있던 황서연마저 아무렇지 않게 제 할 일을 찾아간다.

유지량을 비롯한 표사들은 경호와 닮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많이 다르지 않은가?

‘난 이십 년 가까이 도련님이랑 함께 지냈는데…….’

그래, 황서연은 그렇다고 치자.

애초부터 친동생이고, 피를 나눈 일족이니 저 이해 못 할 상황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홍산은 아직 일 년도 되지 않은 따지자면 신입무사다.

“자자, 정신 차리시고 하던 일 합시다. 아마 밤쯤은 되어야 돌아오실 것 같으니 그때까지 끝내 놓죠.”

그런 그가 당황한 표사들을 다독이고 한 자루 삽을 들고는 다시 마을 복구 현장으로 돌아간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단지 저건 신입의 패기…….’

스스로를 위로하면서도 어딘지 모를 자괴감을 느끼는 경호였다.

홍산의 말마따나 황준우는 밤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그 사실에 저녁쯤이면 돌아올 것이라 내심 생각만 하고 있던 경호는 어딘지 모를 패배감을 느꼈다. 무공으로 밀렸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경험이었다.

“오빠가 그놈들 다시는 어디 가서 칼질 못 하게 만들어 주고 왔어.”

그러거나 말거나 황준우는 황서연을 향해 당당히 말하고는 웃어 보일 뿐이다.

“고마워, 오빠. 그런 나쁜 놈들은 독하게 벌을 받아야 돼.”

“후환(後患)을 남겨 두어서 좋을 것도 없고 하니까, 다음부터 이런 일이 있으면 더 확실히 처리하라고.”

“더 확실히?”

“응, 말했잖아. 어디 가서 나쁜 짓 못 하게 어디 한 군데를 영영 못 쓰게 부러트린다든지 그렇게 만들란 말이야. 칼 쓰는 못된 놈이면 팔이나 다리를 부러트리고, 혀가 간사한 놈이면 혀를 뽑아 버려. 그리고 다른 곳을 휘두르는 놈이면…….”

“싹둑 잘라 버리라 이거지? 알았어, 오빠. 다음에는 꼭 그렇게 할게.”

“옳지, 내 동생. 역시 하나를 말하면 둘을 아는구나.”

“헤헤헤.”

너무나 밝은 표정으로 섬뜩한 이야기를 나눈 두 남매의 시선이 짜 맞춘 것처럼 동시에 움직였다. 어딘지 모르게 몸을 떨고 있는 경호를 비롯한 나머지 일행들을 향한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다들 밥은 먹었어?”

얼굴에 음영을 드리우고 있던 경호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금방 오실 줄 알고 기다렸습니다.”

직접적이지 않은 이 말은 경호가 했었다.

결국 애매하게 밤까지 기다리게 되었지만 말이다.

“오, 잘했어. 혼자 먹는 밥은 맛이 없으니까 말이지. 다들 오래 기다렸을 테니 맛있게 먹자고. 여기 상다리 휘어지게 차려 달라 그래.”

“역시……! 제가 들어가서 미리 이야기해 놓겠습니다.”

칭찬이 이어진 황준우의 말에 어딘지 모르게 잘 보필한 기분을 느낀 경호가 밝은 미소로 고개를 주억였다.

이후 객점으로 뛰어 들어간 경호가 목소리를 높였다.

“주인장, 여기 상다리가 부러지게 가득 차려 주게! 다 함께 가득 먹을 수 있도록 말이야. 다 함께. 하하하!”

경호의 밝은 웃음소리가 객점 바깥까지 크게 울려 퍼졌다.

식사 시간은 왁자지껄하게 이어졌다.

황준우의 복귀를 기념한 기쁨과, 풍마채가 쳐들어왔을 때 개인이 간직했던 영웅담, 어린 황서연의 위엄과 지도력. 그리고 초절정고수인 홍산과 풍마채주, 경호의 일격까지 더해져 이야기는 풍성하게 이어졌다.

황준우는 때로는 놀라고, 긴장하고, 감탄하며 이야기를 듣다가 끝내 박수를 쳤다.

“이야, 우리 경호. 그렇게 아쉬워하더니 결국 해냈네?”

“도련님 덕분입니다.”

경호가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인다.

“당연히 내 덕분이지. 그러면 누구 덕이겠어?”

황준우는 태연하게 그 말을 받았다.

“거참, 이럴 때는 말이라도 다 ‘우리 경호가 열심히 한 덕이야’라고 해 주시지…….”

“와하하!”

경호가 투덜대자 한바탕 웃음이 터져 나온다.

“경호 아저씨 귀여워!”

“아저씨 아닙니다, 아가씨. 차라리 다른 호칭은…….”

“그럼 경호 오빠?”

“……그건 또 아닌 것 같은데요.”

양심적인 경호의 말에 또 한 번 웃음이 터졌다.

“그럼 역시 경호 아저씨네.”

황서연의 마지막 일격은 그야말로 치명적이었던지라, 얼굴을 붉힌 경호가 괜히 말을 꺼냈다며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그런 경호를 뿌듯하고, 흡족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황준우가 다시금 말을 건넨다.

“참 그래서 경호, 뭐 질문할 것 없어?”

“아, 그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경호가 눈을 번쩍 빛내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검을 뽑아 들었다.

얼핏 흉험할 수도 있는 풍경이었지만 그 누구도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경호의 검에서 흘러나온 강기를 보며 감탄을 토하기까지 했다.

“오오…….”

“과연, 저것이 강기.”

아직 절정도 되어 보지 못한 표사들에게 있어 강기란 그야말로 꿈의 경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영광인 힘이었다.

표두인 유지량이라고 하여도 고작 일류 무인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이거, 무언가 이상합니다.”

“무겁지?”

“아, 네.”

마치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한 황준우의 말에 떨리는 팔을 살짝 보여 준 경호가 머쓱한 웃음을 흘렸다.

“솔직히 계속 휘두를 자신이 없습니다. 이래서야 여전히 반쪽이 아닐지…….”

“무거운 만큼 크고 단단하지. 과연 경호에게 어울리는 모습이야.”

“왠지 거 말이 참…….”

어이없는 표정의 경호가 강기를 거두며 고개를 내저었다. 더 이상 강기를 유지한 채 팔을 들어 올리고 있기가 힘든 탓이었다.

“하지만 사실인걸. 예를 들자면 홍산의 강기와는 엄연히 다르니까 말이야. 그렇지 않아?”

황준우의 질문에 유지량을 비롯한 표사들 심지어 홍산과 황서연마저 고개를 주억였다.

빛도 그렇고 크기도 그렇고, 검을 쓰는 경호의 강기가 어째서인지 더 장병기에 속하는 창을 휘두르는 홍산의 것보다 훨씬 더 크다. 단단함은 몰랐지만 황준우가 말했으니 맞는 말일 터였다.

“이미 한 번 한 말이지만 절정의 경지 때 강기를 쓸 수 있다고는 하지만 그건 가짜야. 이 부분은 이해했지?”

“예, 확실히.”

경호와 홍산, 초절정의 영역에 완연히 오른 두 사람이 고개를 주억였다.

하나 나머지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녀만큼은 뭔가 가닥을 잡은 듯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이다.

‘내 동생이 역시 뭔가 다르기 다르구나.’

동생의 천재성에 혀를 내두른 황준우가 아직 완전히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는 유지량을 비롯한 표사들을 향해 세세한 설명을 풀어 주었다.

강호무림에서 말하길 강기를 펼칠 수 있는 경지는 절정고수 이후부터라고 한다. 실질적으로 경호와 홍산 역시 절정에 올라 강기를 펼쳐 본 적이 있다.

검기를 몇 겹이나 둘러 훨씬 더 강력하게 힘을 끌어올려서 사용하는 법. 내공의 움직임이 일류 때에 비해 훨씬 더 자유롭고 폭이 넓어지는 덕에 가능한 일이다. 덕분에 검기를 뛰어넘는 위력을 보여 줄 수는 있지만 그만큼 내력 소모도 심하다.

일류와 절정.

수련한 시간에 의하여 경지가 증가하는 만큼 내공의 차이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 폭을 모두 메울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그래서 절정고수 때 사용하는 강기는 일종의 필살기(必殺技)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틈을 노려 사용한다면 적을 일격에 참살할 수도 있지만, 만약 그 공격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면 큰 빈틈이 생기게 된다. 때문에 절정고수의 강기는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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