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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98화 (98/373)

학사재생 98화

스스로 말해 놓고도 납득시키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굳이 믿을 거라고도 생각지 않았다.

“아뇨, 믿습니다.”

한데 전왕은 어렵지 않게 받아들인다.

보기보다 그릇 자체도 더 클지도 모른다.

“헤헤…… 무신이라면 그러실 수도 있지 않습니까? 자그마치 신(神)이신걸요.”

아니면 그냥 멍청할 정도로 황준우를 동경하는 추종자이거나. 어느 쪽이든 나쁘지 않다. 눈치가 좋고 머리도 있어 보이니 말이다.

“아, 그래. 그러면 내가 이 정도까지 설명을 눈앞에서 해 준 이유도 짐작하겠네?”

“……?”

언제나와 같이 금방 대답할 것이라 믿었던 전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문 가득한 표정을 보인다.

“어, 돌아가서 소문이라도 낼까요?”

“아니, 기왕이면 안 알려지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칠야무신님이라면요.”

“알면서 왜 물어?”

“제깟 놈이 그것 말고는 딱히 할 수 있는 게 안 떠올라서…… 아, 혹시 책이라도 한 편 써 볼깝쇼? 헤헷. 정의의 칠야무신. 사람들의 생각을 바꿀 법한 그런 것 말이죠.”

아무래도 전왕은 머리가 좋은 걸 벗어나 아부에도 제법 특화된 듯 보였다.

“아서라. 이미 지난 일에 무슨. 그냥 난 네가 우리를 조금 도와줬으면 하는 거야.”

“이상한 모임이 있고 사마정도 접근이 쉽지 않다. 근데 보아하니 국자감에도 연결되어 있는 것 같고…… 나름대로 황궁에 인연 있는 친구가 하나 있어서 기왕이면 도와 볼까도 생각 들고.”

말을 하면 할수록 황준우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이야기하다 보니 점점 무슨 협박을 하는 기분이 든 탓이다.

“혹시 해서 말하는데, 싫으면 거절해도 돼. 단지 여기서 한 이야기 정도는 밖에 나가서 안 떠들면 좋겠고. 뭐, 설령 알려져도 어쩔 수 없겠지.”

황준우는 나름 자신만만했다.

만금장을 제하고라도 그의 무력에, 남궁세가라는 배후세력, 사마정이 만들어 놓은 천조회면 설령 다시 일이 커져도 해 볼 만하다. 적어도 전생보다 몇 배는 나은 상황인 것이다.

‘물론 이 녀석이 또 배신을 하면…….’

황준우의 의심스러운 눈이 잠시 사마정을 향했다가 떨어진다. 역시 아직은 진심으로 그를 믿기 어려운 탓이었다.

“……그 말은 어, 그러니까 제가, 무신의 동료가 된다는 뭐 그런 것? 에에, 진짜 그래도 되는 겁니까!?”

잠시 이해를 못 한 듯 고개를 몇 번이고 갸웃거리던 전왕이 이내 목소리를 높이며 펄쩍펄쩍 뛰며 기뻐한다. 그 모습이 황준우에게는 너무 낯설다. 반면 사마정의 생각은 달랐다.

“오히려 여태껏 이런 사람이 하나 없었다는 게 이상한 일인 겁니다. 무신께서는 활동하던 당시…… 그 이름처럼 살아 계신 신이었으니까요. 전설이라는 명칭도 부족합니다.”

“…….”

본인의 일이라 잘 체감이 안 되지만 어쨌든 전왕이 이상한 경우는 아니란 뜻이다.

“영, 영광만 주신다면 충실히 모시겠습니다!”

“그래 주면 고맙겠지만, 내가 사람을 잘 못 믿거든.”

“알고 있습니다. 무수히 많은 배신으로 상처를 받으셨지요. 그런 역경 속에서도 굳건하셨던 모습에 더 감격을 받았던 겁니다. 이 전왕, 그런 분과 함께 된다면 그 영광이 가문의 역사 내내 전해지리라 의심치 않습니다!”

제정신은 아니다.

하나 그 마음이 황준우의 입장에서는 나쁘게 받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방금 전까지 잘 돌아가던 머리가, 황준우의 도와달라는 말 한마디에 제 기능을 잃은 듯 보였으니 말이다. 이성 대신 전설에 다가간다는 흥분감이 그로 하여금 황준우를 따르게 만든 모양이었다.

그래서 웃음을 보였다.

“어려울 텐데 괜찮겠어?”

“까짓 간자(間者) 임무는 이미 전에도 몇 번 해 봤습니다.”

나이는 젊어 보이는데 보기보다 경험이 많아 보이는 듯하다. 그것도 간자라니, 잠시 어이없는 사실에 헛웃음이 나올 뻔한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그, 그래. 근데 이 상태로 돌아가면 조금 위험하지 않겠어?”

잠시 생각을 짜내야겠다.

방법이 없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황준우가 사마정과 의견을 교환하려는 순간이었다.

“이거 그냥 검제가 난동 부려서 두 사람 다 죽였다고 하면 됩니다. 저는 문관이라 운 좋게 살아남았고, 가서 남궁세가를 향해 한 발자국도 내밀지 말라는 엄포를 놓았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하던 전왕이 끝에 와서는 살짝 눈치를 본다.

그렇게 하면 전왕은 분명 산다.

하나 남궁세가는 무수히 많은 적을 만들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자연스레 제 의견에 스스로의 욕심만 채운 것으로 보일까 봐 몸이 웅크러 든 것이었다. 이제는 황준우가 불어넣어 줬던 안정된 기우도 효력을 다해 심장이 또 미친 듯이 박동하기 시작했다.

쿵쾅쿵쾅쿵쾅.

“이거 봐라, 진짜 생각보다 훨씬 똑똑하잖아?”

그러거나 말거나, 황준우는 놀란 눈으로 사마정을 바라본다.

사마정 역시 고개를 주억이며 감탄을 흘렸다.

“훌륭합니다. 그렇게 하면 의심 받지 않고 다시 복귀할 수 있겠군요. 아직 직책이 낮아 더 깊게까지 파고들기는 힘들겠지만…….”

사마정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왠지 눈앞의 청년, 전왕이라면 황준우가 명령하는 순간 그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해내리라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었다.

“그, 그런데 그렇게 해도 됩니까? 그 아무래도 무신께서 남궁세가를 접수하신 것 같은데 시선이 몰리면 조금…….”

“뭐 어때? 나를 안다고 하지 않았나?”

“……!!”

황준우의 가벼운 답에 이전보다 더욱 심장 소리가 커진 전왕이 머리를 크게 조아렸다.

“과연 불패(不敗)의 무신! 천하가 적이라 한들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이 그저 존경스럽습니다!”

“아니, 마지막에 한 번은 졌는데…….”

솔직히 불패는 아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황준우라는 술에 취한 듯 눈이 풀어지고, 얼굴을 붉힌 전왕은 두 주먹을 움켜쥐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사마정 너도 슬슬 괜찮지?”

“당장은 무리입니다만. 어차피 남은 시간이 조금 있으니까요.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처음 황준우를 만났을 때부터 아니, 사실 그 이전부터 준비를 해 왔던 일이다. 언젠가 세상에 나와야 한다면 필요하리라 여겼던 일들. 그 모든 것들이 황준우를 만나고 빠르게 규합되고 하나로 합쳐지고 있다. 만금장과 남궁세가, 두 개의 날개를 단 천조회는 결코 작금의 무림에 꺾일 만큼 미약하지 않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좋아. 그러면 전왕 네 의견대로 가자고. 설령 남궁세가가 밝혀지고 시선이 쏟아져도 좋아. 정, 사, 마를 가리지 않고 단체로 모여서 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생각만은 아니랄 게 뻔히 보이고, 이참에 한번 뒤집어 놓자고.”

굳이 원한이 아니더라도 참을 수 없는 구린내가 난다. 그런 집단을 굳이 방치할 이유가 없었다. 당장 싸울 필요는 없더라도 예정된 적의 실체에 대해 알아 두면 무조건 이득이 된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그러면 남궁세가는 밀궁(謐宮)이 되는 게로군요.”

그런 황준우의 의견에 전왕의 눈이 반짝 빛났다.

“밀궁?”

“예. 무신의 밀궁 말입니다. 악의(惡意)를 가지고 남궁세가로 들어온 자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겠지요. 복종하거나, 죽거나. 물론 밖에서 그 사실을 알 수는 없을 것 아닙니까? 헤헤.”

제법 어울리지 않는 섬뜩한 음성으로 시작해 다시 평소와 같은 헤실거리는 웃음을 지은 전왕의 눈에는 진중함이 가득했다.

“무신밀궁(武神謐宮)이라. 전왕 너는 지금 남궁세가라는 함정을 파서 적들을 헤집자고 하는 게로구나.”

사마정의 질문에 전왕이 살짝 고개를 주억이며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아, 물론 이것도 강요는 아닙니다. 저 같은 약자는 또 그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식이 있어서 이런 치졸한 방식을 떠올렸지만 무신이시라면…….”

“그만, 그만. 탓하지 않는다니까. 변명하지 않아도 돼. 전왕. 그리고 네 생각에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어.”

“약자는 약자만의 방식이 있다. 좋은 말이야.”

전생에 이어 재생까지, 따지자면 황준우는 언제나 강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과격했고 거칠었으며, 무지(無智)를 따랐다. 새로 태어난 이후는 교훈을 벗삼아 조금 달리 움직이고 있지만 여전히 강자의 싸움 방식을 고집하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

실제로 눈앞의 전왕이 내뱉은 대부분의 계책을 단번에 떠올리지 못했던 것이 그 증거였다.

“한번 해 보자고. 강자가 약자의 방식으로 싸우는 것. 어둠 속에서 때를 기다리는 척 음모를 꾸미며 차근차근 세상을 먹어 가는 치졸한 짓. 왜 악당들이 잘하는 그런 일이잖아?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나로서는 굉장히 끌리는 말이야. 재미있을 것 같아.”

결정을 내리는 황준우의 입가로 미소가 떠올랐다.

전왕은 남궁세가르 떠났다. 마지막 가는 순간까지 황준우를 향한 공경과 동경을 감추지 않은 그는 제법 들뜬 모습이었다.

“사람을 붙일까요?”

사마정이 물었고, 황준우는 고개를 주억였다.

내뱉었던 말마따나 치졸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믿었다가 배신당하는 쪽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노력하고 있지만 역시 황준우는 사람을 믿기가 힘들었다.

전왕이 다른 생각을 하기는 어려워 보였지만, 세상일이란 또 모르는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황궁에 있을 주연하에 관한 이야기도 묻지 않았다.

‘도울 순 없어도 짐이 되진 말아야지.’

혹시나 전왕이 다른 마음을 먹었을 때 그녀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다는 사실쯤이야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아, 혹시 남궁세가에 이 녀석 좀 실험해 볼 만한 곳 있나?”

수왕검의 반대편에 대충 매달아 놓은 청홍검을 두드린 황준우의 질문에 사마정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쉽게도…… 아시다시피 이곳은 합비 아닙니까.”

지금의 남궁세가가 위치한 곳은 험한 산중이 아닌 안휘의 성도 한복판인 합비다. 덕분에 천조회 육성 계획은 더욱 손쉽게 이어지고 있었지만 황준우가 휘두르는 청홍검을 실험해 볼 장소 같은 건만들 수 없었다.

“끙, 어쩔 수 없지. 가는 길에 적당한 곳 보이면 대충 휘둘러 봐야지.”

“알겠습니다.”

“그럼 난 간다. 놓고 온 동생도 신경 쓰이고 해서 더 이상은 못 있겠다.”

“살펴 가십시오.”

“그래. 또 보자고, 사마정.”

황준우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언제보아도 쫓을 수 없는 신출귀몰한 모습에 혀를 내두른 사마정은 주변을 둘러본 후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또 할 일이 산더미 같이 쌓였군.”

황준우만 오고 가면 이렇다.

그렇다고 딱히 그를 탓할 일은 아니었다.

곁에 있고 싶은 마음에 주변을 머물다 보면 시간 가는 줄을 몰라 일이 쌓여 버리는 걸 누굴 탓한단 말인가?

“내 업보로다, 업보.”

짧은 혼잣말을 중얼거린 사마정의 몸이 다시 어둠 속에 녹아들었다.

앞으로 며칠 동안은 짧게나마 취하는 수면 시간도 없어질 정도로 부담스럽지만 후회는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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