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95화
관기태의 경우는 기세 싸움이 계속 이어진다고 생각했다. 그 역시 원원괴존과 함께 검제와의 협상을 위해 이 자리에 왔고, 존재도 알고 있었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상대가 소문대로 욕심 많은 인물이라면 그리 쉽게만 넘어갈 리 없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된 것이다. 이쯤 되니 그 역시 자연스럽게 원원괴존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반면, 두 사람을 따라 남궁세가와의 협상 자리로 나온 전왕은 달랐다. 그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제주의 명령에 따라 남궁세가를 향했을 뿐인데 원원괴존과 산붕도장이라는 명성 높은 무인들과 동행하게 되었다. 그렇게 남궁세가에 도착하고 일이 쉽게 풀릴 것 같아 안도하던 중이었는데 남궁호량, 가주라는 양반이 누군가에게 모시고 오라는 명을 받았단다.
나름대로 눈치가 빠르고, 잔머리가 좋은 전왕은 어렵지 않게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검제! 그가 살아 있었구나! 애초부터 이 자리는 검제를 만나러 온 거야!’
최악이다.
원원괴존에 있어 강호에서 가장 음흉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도는 검제 남궁천까지!
산붕도장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런 두 사람 사이에 껴 있으면 한 시진도 어렵단 말입니다.’
추가 봉급에 눈이 멀어 임무를 수락한 자신이 한없이 미워지는 순간이다. 자연스레 그 역시 땀을 뻘뻘 흘리며 원원괴존의 눈치를 보았다.
강호무림이 군림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고수들의 기세 싸움.
‘여기서 원원괴존 쪽이 터지면…….’
협상은 물 건너간다.
그리고 그 같은 문인의 목도 저승 강물을 건너가 버릴지 모른다.
“……좋다. 한 번 가서 낯짝이나 봐 보자.”
불쾌한 표정으로 미간을 가득 찌푸린 원원괴존이 볼을 씰룩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다행히 일차적 고비는 넘어간 셈.
“휴우…….”
바싹 긴장해 있던 관기태의 표정이 풀어지고 전왕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럼 모시겠습니다.”
어째서인지 전왕과 비슷한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남궁호량이 고개를 숙인 후 앞장서 걸어 나갔다.
그렇게 세 사람은 본래 남궁세가가 손님을 맞이한다는 청천원을 벗어났다.
남궁세가의 금지.
무애원의 문이 열렸다.
“여기는…….”
불쾌한 표정으로 뒤따라 걷던 원원괴존의 눈매가 살짝 수그러든다.
그 역시 무애원의 존재를 아는 탓이다.
남궁세가의 금지이자 비처.
이런 장소를 아무리 접견을 위해서라지만 공개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검제가 우리를 적대할 생각은 없다는 뜻으로 보아도 무방하겠군.’
이번에도 세 사람의 생각이 일치했다.
자연스럽게 걸음은 느긋하게 이어졌다. 남궁호량 역시 굳이 재촉을 하지 않았기에 무애원의 가장 깊은 심처(深處)에 도달하기까지는 시간이 제법 걸렸다.
“멋은 멋대로 부렸군.”
족히 백장은 되어 보이는 높은 절벽을 뒤에 놓아둔 채 아무런 현판 하나 없지만 화려한 장식과 문양으로 지어진 심처의 모습을 본 원원괴존이 짧은 코웃음을 쳤다. 이후 그는 더 이상 걸음을 옮기지 않은 채 제자리에서 뒷짐을 쥐고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큼큼, 거 손님이 여기까지 왔는데도 방 안에만 앉아 있을 생각인가!”
무인이란 명성과 자존심에 죽고 사는 존재.
원원괴존도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이 남다른 만큼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다는 사실을 표명한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상대 역시 그를 불쾌하게 여기지 않는 듯했다.
방 안에서 기척이 움직이는가 싶더니 닫혀 있던 방문이 열린다.
“뭐, 이쯤 왔으면 됐지.”
이어서 모습을 드러낸 이는 약관도 안 되어 보이는 젊은 청년과 어둠 속에서 웅크린 붉은 눈을 한 사내다.
“이건 또 뭐 하자는 장난이지?”
이번만큼은 정말 기분이 나빴는지 눈매를 찌푸리다 못해 얼굴까지 붉어진 원원괴존의 시선은 젊은 청년, 황준우 쪽을 무심하고 빠르게 스쳐 지나 웅크린 어둠, 사마정을 향했다.
“검제랑 쥐새끼가 힘을 합쳐 농간질을 하고 있다……. 무림협약(武林協約)을 어기면 어떻게 되는지 아직 모르는 건가?”
“무림협약?”
처음 듣는 말에 황준우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달리 무림삼계명(武林三戒命)이라고도 불립니다. 그중 하나가…….”
“아, 이해했어.”
서왕 사마정은 누구의 소속도 될 수 없다.
그를 두려워하는 무림군주(武林君主)들의 소심함이 느껴지는 처사인지라 황준우의 입가로는 자연스레 조소(嘲笑)가 떠올랐다.
“네놈은 또 뭐냐?”
원원괴존의 시선이 사마정을 지나 황준우를 향했다.
처음에는 검제의 제자쯤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불쾌했고, 사마정을 본 순간에는 욕과 함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한데 분위기를 보아하니 모든 시선의 흐름 속 중심에 황준우가 있다. 그들을 이곳까지 데려 온 남궁호량 조차도 그를 보며 쩔쩔매는 모습이 역력해 보였다.
“혹시 검제 놈이 반로환동이라도 한 게냐?”
원원괴존의 질문에는 작은 경계가 담겨 있었다.
반로환동은 전설의 경지.
하나 무림 역사에 있어 아무도 오르지 못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쯤 되면 실질적으로 원원괴존보다 고수라고 보아야 된다는 사실이었다.
“미쳤어? 반로환동? 아, 그래 그렇다고 쳐. 그래도 그렇지 그 영감이 젊어진다고 나만큼 잘생겨질 수 있다고 생각해? 와, 이거 진짜 어이없고 열 받네.”
헛웃음 흘리는 황준우가 지면으로 천천히 내려선다.
그렇게 보였다고 믿은 순간, 어느새 그의 주먹이 원원괴존의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
“……!!”
경악과 침묵, 그리고 긴장감이 장내를 깊게 파고들었다.
“너, 넌 도대체 뭐냐…….”
자신만만하던 원원괴존의 얼굴에 당황이 가득 어렸다. 흐릿한 신영을 보았고, 어느새 당할 뻔했다. 아무리 방심하고 있었다고 하여도 그는 원원괴존이었다.
천하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절대고수이자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능히 천하를 군림하였을 무림군주!
그런 그가 상대의 움직임을 놓쳤었다.
어렵게 생각할 일도 아니었다.
‘죽을 뻔했다.’
원원괴존쯤 되는 인물에게는 너무나 멀게만 느껴지는 이야기다. 나이가 칠순(七旬)이 다가옴에도 불구하고 충만한 내력과 단련된 육체는 시들 줄을 모른다. 감히 그에게 싸움을 걸 정도의 대담한 무인이 하나도 없지는 않았지만 상대가 될 리도 만무했다.
이십여 년 전 겪었던 칠야의 난 이래 그는 단 한 번도 죽음의 위기를 느껴 본 적이 없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드높은 자신감이 무너지며 활화산 같은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이 어린놈이!”
폭발하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원원괴존의 몸 주변으로 거대한 기파가 번져 나갔다.
“우아악-!”
직접적인 타격이 아니고 그 영향력의 인근에 있던 관기태는 신음을 흘렸으며, 전왕은 볼썽사나운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그 짧은 시간에 내뻗어진 원원괴존의 손이 황준우의 칠공을 날카롭게 파고든다.
우내십존 중 유일하게 지법(指法)의 달인인 그가 펼치는 원원도문의 절기 십절지(十絶指)가 순식간에 칠성의 위력으로 펼쳐진 것이다. 원원괴존은 자신 있었다. 지법의 유일한 약점인 거리의 약점이 완전히 사라진 순간에 빠르게 펼쳐진 한 수다. 같은 우내십존 이라 하여도 이런 상황이면 필살(必殺) 못해도 중상(重傷)이다.
“오, 그 동안 제법 늘었네.”
짧은 감탄을 표한 황준우가 그런 원원괴존의 공격을 모두 떨쳐 낸다. 놀라운 신위였고, 경악할 일이었다. 하나 원원괴존은 당황하지 않고 빠르게 다음 초식을 이어 갔다.
‘네놈의 오만이 죽음의 이유다.’
십절지 칠성의 공격이 막혔지만 그사이 원원괴존 역시 놀고 있던 것만은 아니다.
십절지란 본래 열 개의 손가락이 동시에 상대의 약점을 공격하여 무너트리는 절세무공!
급하게 펼치느라 칠공을 노릴 수밖에 없던 방금 전과 다르게 이번에 펼쳐지는 것은 자그마치 극성(極星)의 십절지다.
“죽어라.”
타다다닷.
차가운 목소리를 흘린 그의 손가락이 황준우의 전신 서른 곳을 눈 깜짝할 새에 가볍게 두들기고 빠져나간다. 깊게 파고드는 중상은 아니었다. 언뜻 보자면 아무런 변화도 없어 보이는 상황. 하나 원원괴존이 이겼다. 적어도 본인과 관기태 그리고 전왕은 그렇게 생각했다.
“흠…….”
짧은 신음을 흘리며 제 몸을 내려다보는 황준우의 모습에도 세 사람의 마음에는 변화가 없었다.
“십절지가 제대로 들어갔다. 왜? 네놈이 아직도 살아 있는 것 같으냐?”
원원괴존이 싸늘한 미소를 흘렸다.
관기태와 전왕은 곧 펼쳐질 끔찍할 모습을 생각하며 고개를 젓거나, 눈을 질끈 감았다.
십절지는 상대의 몸을 직접적으로 관통하는 표면적인 무공이 아니다. 상대의 내부를 짓이기고 파괴하여 비틀어버리는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인 것이다. 가볍게 두들기고 지나간 원원괴존의 십절지에 담긴 내력이 황준우의 혈도를 통해 몸속으로 파고 들었으니 이제 곧 그는 온몸의 구멍에서 피를 쏟으며 끔찍하게 일그러지듯 죽게 될 것이다.
“고통 속에서 스스로의 오만을 후회하여라, 어리석은 녀석. 흐하하!”
원원괴존이 황준우를 향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흐하하하하!”
계속해서 웃고 있었다.
“흐하하…….”
또 웃는데, 시간이 제법 흐른 것 같다.
천천히 웃음을 멈춘 원원괴존의 눈이 황준우를 향했다.
“으음…….”
짧은 신음이 원원괴존의 입새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반각은 된 것 같은데…….”
물론 체감 시간일 뿐일 수도 있지만, 어찌 됐든 십절지의 살수(殺手)에 걸려 죽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런 경우는 그의 일생에 있어 두 번째였다.
“어, 어째서 안 죽는 것이냐?”
당황한 원원괴존을 향해 짧은 웃음을 보인 황준우가 고개를 내저었다.
“네 녀석은 변한 게 없구나. 초식을 펼치는 실력은 늘었지만 여전히 오만하고 치졸해. 무공의 약점도 전혀 극복하지 못했고 말이야.”
“뭐, 뭣이!?”
“기억 안 나? 내가 알려 줬었는데, 네 무공의 약점.”
황준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몸에서 흘러나오는 살기가 점점 더 증폭되어 주변의 공간을 장악해 나간다. 그 엄청난 기세에 원원괴존을 비롯한 관기태, 전왕을 비롯하여 남궁호량의 얼굴까지 창백하게 떠올랐다.
“어, 어어?”
“원원괴존, 십절지의 수법은 내력을 혈도에 밀어 넣어 강제로 파괴시키는 데서 시작된다. 한데 만약 상대가 더 강한 내력으로 혈도를 지키거나 파고든 십절지를 집어삼키면 어떻게 해야 될까?”
오랜 기억을 더듬어 처음 원원괴존과 손속을 나누었을 때의 대화를 떠올린 황준우가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는다.
“너, 넌 누구냐……?”
원원괴존 역시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며 몸을 떤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불안함을 지울 수가 없다. 문득 얼마 전 승선 모임에서 나타났던 칠야무신의 새 무공서가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래도 다행이야. 네놈이 여전히 오만하고, 성질 나쁘고, 재수 없는 성격이라. 복수를 포기했다고는 해도 나쁜 놈 정도는 때려잡을 수 있는 거잖아?”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황준우를 따라 뒷걸음질 치기 시작한 원원괴존이 고개를 내젓는다.
“그럴,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단 말이다…….”
“관기태, 그 자리에 멈춰.”
원원괴존을 향해 걸어가며, 뒤도 돌아보지 않은 황준우가 싸늘한 목소리를 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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