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87화
“저거, 저거 저러다가 조만간 쓰러질라. 쯧.”
의지는 좋다. 하지만 경지를 넘어서는 벽이란 것이 꼭 육체의 고련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만약 순수하게 육체의 극한 단련으로 가능한 일이었다면, 이미 황준우와 함께했던 보름의 망아 수련 기간 동안 경호 역시 완성된 강기를 펼치며 나왔을 터였다.
“어쩔 수 없지.”
한숨을 쉰 황준우의 신형이 방 안에서 단숨에 사라졌다.
눈 깜빡할 사이, 다시금 황준우가 모습을 드러낸 곳은 뻗어지는 경호의 검 앞이었다.
“……!”
놀란 경호가 지친 와중에도 눈을 크게 뜨며 검의 방향을 돌리려 하였지만 그보다 황준우의 손속이 훨씬 빨랐다. 예기를 가득 머금은 검을 잡아채고 허공으로 날려 버린 황준우가 뒷짐을 진다.
그 긴 동작이 고작 눈 깜짝 한 번 할 사이에 벌어졌다.
뎅그렁-!
검이 지면에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쳐지는 소리가 들리고 황준우와 시선을 마주한 경호가 밤하늘에 휘영청하게 뜬 달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흘린다.
“하, 하하…… 벌써 시간이 이렇게 오래되었나요?”
“왜, 다시 망아에라도 들었었나 보지?”
짧은 웃음을 보인 황준우의 손이 다시 한 번 벼락처럼 움직였다. 경호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지만 황준우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겁먹지 마. 누가 잡아먹는대?”
경호의 어깨를 부여잡은 황준우가 고개를 내젓는다.
“그, 아직 본능이란 게 남아 있나 봅니다.”
지옥 같던 보름간의 대련, 당시의 끔찍한 기억은 망아에 돌입해 있었던 만큼 정신보다 몸이 더욱 확실히 인식하고 있었다.
“차차 나아지겠지. 그나저나, 뭐가 그리 조급한 거야?”
“조급하지 않습니다.”
“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하네. 우리 경호 늘었다, 늘었어.”
“…….”
“조급해하지 마. 홍산과 네 경우는 달라. 뭐 재능이란 게 있다면 분명 녀석 쪽이 앞서겠지만, 경호 너한테도 홍산에게 없는 게 있으니까.”
“그래 봐야 재능이 우선 아닙니까…….”
감정을 감추는 걸 포기했는지, 실망한 기색을 한 경호가 쓴웃음을 흘렸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조급해지지. 재능이 중요하다고 해도, 제일은 아니야. 경호 너는 느리지만 확실해. 반면 홍산의 경우는 빠르지만 완벽하지 않지. 이 차이를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어.”
“위로의 말씀이라면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확실해도 늦으면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딱히 위로라고 한 말은 아닌데…….”
“저도 제 자신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근골이 좋은 편도 아니고 오성이 발달하지도 않았죠. 외모도 그리 잘나지 않았고, 도련님 말대로 노총각입니다. 이런 바보 같은 녀석이 느리기까지 하면 어떻게 해야 된다는 겁니까?”
“……미안, 경호. 다신 노총각이라고 놀리지 않을게.”
평소답지 않은 경호의 격정 어린 음성에 당황한 표정을 지은 황준우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거 진심이라기 보다 그냥 여자들이 보는 눈이 없다고 생각해서…….”
“저도 농담입니다. 저 사실 노총각인 것 싫지 않아요. 덕분에 도련님 곁에 더 오래 있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경호…….”
당황하는 황준우를 향해 입가 가득 웃음을 보인 경호가 어깨를 넓게 폈다.
“단지 전, 그런 느림보라는 걸 잘 알아서 더 노력하고 힘을 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란 겁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 마세요.”
“쳇…… 경호 주제에 어른인 척하는 것 봐.”
“원래 제가 도련님보다 어른입니다.”
“끙…….”
“걱정 마시고 그만 들어가서 주무세요. 저도 이만 정리하고 쉬겠습니다.”
“그래, 무리하지 마. 이미 말했듯이 경호는 느리지만 확실한 길을 가고 있는 것뿐이니까. 마음의 짐도 덜고.”
“알겠습니다.”
대답을 하는 경호는 평소와 같은 얼굴빛에, 음색을 찾았다. 망설이던 황준우가 내력을 일으켜 그런 경호에게 건넨다. 순식간에 황금빛 기운이 두 사람 사이를 오가고, 지친 기색이 가득했던 경호의 얼굴이 더 밝아졌다.
“이제야 좀 볼만하네.”
“도련님?”
“전에 했던 것과 비슷한 원리야.”
“그렇군요…….”
“그렇다고 나 믿고 무리하게 혹사해도 된다는 건 아니다. 이런 치료로는 한계가 있다고, 알지?”
“명심하겠습니다.”
“알겠으면, 어서 들어가.”
“도련님 먼저 들어가시지요.”
“나 들어가면 더 수련하려 그러지?”
“아닙니다. 어차피 창문 바깥으로 다 보고 계실 것 아닙니까? 제가 무슨 수로 도련님을 속인다고요.”
“그렇기야 하지만…….”
눈을 가늘게 뜬 황준우와 한참을 눈싸움하던 경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면 같이 들어가죠.”
“좋은 생각이야.”
서로에게 합의를 본 결정에 눈빛을 푼 황준우가 경호의 손목을 잡고 성큼성큼 객점을 향한다. 괜히 민망해진 기분의 경호가 살짝 손을 빼려 했지만 제대로 힘을 쓰는 황준우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은근슬쩍 잔머리 쓸 생각하지 말고 그냥 따라와.”
“안 그런다니까요. 도련님, 저 못 믿습니까?”
“난 우리 경호를 믿어. 하지만 경호를 유혹하는 사특한 무욕(武慾)은 못 믿어.”
“그게 뭡니까 대체…….”
“시끄럽고, 나도 민망하니까 어서 들어가기나 해.”
자연스럽게 경호를 객점 안으로 밀어 넣고, 뒤따라 들어간 황준우가 갑작스럽게 함께 들어온 두 사람을 보며 멀뚱히 눈을 뜨고 있는 점소이를 향해 외쳤다.
“여기, 목욕물 하나! 이 구질구질한 아저씨 씻겨야 되니까 가득 담아서 부탁할게.”
“알겠습니다.”
“진짜 안 도망간다니까요.”
한숨을 쉬면서도 얼굴에 그려진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경호였다.
황준우가 다소 무리하면서 이끈 덕일까?
아니면 어설프게나마 해 줬던 위로가 힘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다음 날부터 경호는 무리한 수련을 하지 않았다. 여정 역시 별 탈 없이 이어져 일행들은 어느덧 안휘를 걷고 있었다. 태호 정도까지는 가 보았어도, 강소는 벗어난 적이 없던 황서연은 마치 처음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펄쩍펄쩍 뛰며 감탄과 환호성을 연신 토해 냈다.
처음으로 중원을 제 발로 돌아다니고 있는 그녀에게는 세상 모든 것이 신기하고, 놀라운 것들뿐이었다.
‘그래, 너무 온실 속 화초로 키우는 것도 안 좋겠지.’
어쩌면 지금까지는 너무 감싸려고만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여동생이라는 사실 하나가 황준우의 심리를 크게 막아섰던 것도 사실이었다. 한데 지금에 와서 보니 그런 황서연의 모습이 참 좋다. 몇 번이고 뿌듯한 웃음을 짓던 황준의 일행은 어느덧 경정산(敬亭山) 초입에 위치한 작은 마을에 도달했다.
평소처럼 객점을 잡고 저녁을 먹을 때까지만 하여도 크게 특이한 일은 없었다.
상황은 그리 크지 않은 객점 문이 벌컥 열리고, 무인을 여럿 대동한 상인 집단이 나타나면서부터 변했다.
“이런, 제기랄. 대체 물건 관리를 어떻게 한 거야?”
쓰고 있던 죽립을 객점의 식탁 위로 내던지며 인상을 잔뜩 찌푸린 상인 하나가 중년 무인을 향해 눈을 부릅뜬다. 그런 상인의 의복에 새겨진 화(華)라는 글자를 꿰뚫어본 황준우의 눈에 의문이 깃들었다.
“전화상단(錢華商團)이잖아?”
만금장이 천하제일상가라고 하면, 그 뒤를 따르는 상인들도 있는 법이다. 전화상단은 그중에서도 제법 수위에 속하는 자금을 가진 상가로서, 주로 먹는 것에 관련된 사업을 크게 하고 있었다.
특히 차(茶) 사업이 가장 큰 주류였는데, 만금장과 마찬가지로 상단 내에 따로 표국을 운영 중이기도 하여 스스로 생산에서부터 유통, 판매까지 독점 운영을 하고 있는 중이기도 했다.
“맞는 것 같은데요. 무슨 문제가 생긴 걸까요?”
처음 출발했을 때에 비해 확연히 생기를 찾은 경호가 의문스러운 눈초리로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척 보아도 화가 난 상인과, 어쩔 줄 몰라 하는 무인들이 가장 먼저 눈에 뜨인다. 뒤이어 들려온 이야기는 계속해서 물건에 관하여 따지는 목소리다.
“아무래도 뭘 잃어버린 것 같지?”
“전화상단이면 찻잎이겠군요. 저토록 성을 내는 걸 보니 제법 많은 양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경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삿대질을 하며 성을 내던 상인이 의자를 들어 무인의 머리를 내리쳤다.
무공을 익히지는 않았는지, 그리 위력적인 힘은 없었지만 무방비 상태인 중년 무인의 입장에서는 큰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상인이 무슨 소리를 하건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있던 무인의 눈빛이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웅크리고 있는 기도에서는 자연스레 살기가 배어 나온다.
“와, 저건…….”
“자존심이 엄청 상했겠는데요.”
황준우가 짧은 감탄을 흘리고, 경호의 눈에도 긴장이 깃들었다.
느껴지는 분위기와 점점 높아지는 상인의 목소리, 이 상태로 두고 본다면 분명 피를 볼 것 같은 기분이었다.
“더 이상은 못 참겠다. 표두님이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이냐! 이 개자식아!”
아닌 게 아니라, 중년 무인의 뒤편에서 함께 고개를 숙이고 있던 젊은 무인이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가 주먹을 크게 내뻗었다.
“힉-!”
갑작스럽게 쏟아진 날카로운 기세에 놀랐는지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집어삼키는 상인의 앞을 막아선 것은 다름 아닌 중년 무인이었다.
“물러서라, 조청.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하지만 표두님!”
“어허!”
“저, 저, 저놈이 아주 눈에 뵈는 게 없나! 상단으로 돌아가면 네놈 모가지를 당장에!”
“그만하시오!”
참고, 또 참던 중년 무인의 화 역시 그 순간 폭발했다.
“물건을 비롯하여 아랫사람을 관리하지 못한 것. 모두 내 잘못이 맞소! 그러니 탓을 하려거든 나를 향해 하시면 될 뿐 아니오!”
“그래. 맞는 말이다. 네놈이 아랫사람 관리를 똑바로 못 하니 기강이 서지 않고 물건을 가지고 달아나는 새끼까지 생기지! 본단으로 들어가면 네놈 목을 치라고 해야겠구나!”
상인의 목소리가 더욱더 커지고, 중년 무인은 눈을 부라리면서도 손을 들지도, 기세를 내뿜지도 않은 채 묵묵히 듣고만 있다.
“듣자하니 표사 중 하나가 물건을 들고 잠적 탔구먼.”
“그렇다고 해도 상인의 행태는 심합니다.”
“저건 도의에 어긋난 수준입니다. 주공.”
음성을 듣고 있던 덕에 상황을 모두 이해한 황준우가 짧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주억인다. 분노한 듯 보이는 경호와 홍산이 동시에 불만을 토로했다.
황준우 역시 두 사람의 의견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켜만 볼 수준은 아니네.”
아무리 계약 관계라고 한들 홍산의 말마따나 도의가 있다. 어쩔 수 없을 때라면 모를까, 충분히 수습할 능력과 힘을 가진 채로도 불합리한 관계를 보고 지나친다면 그 역시 안 될 말이었다.
‘딱히 협객까지 될 생각은 없지만…….’
직접 나서기로 마음먹은 황준우의 두 눈에 문득, 황서연이 주먹을 움켜쥔 채 몸을 떨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굉장히 화가 나 속에서 뜨거운 불길이 차오르는데 힘겹게 억누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안휘에 가서 남궁세가와 부딪치면 혹시 만금장에 피해가 가지 않을까 걱정했던 속 깊은 아이였다. 지금 그 속내가 어떨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거 굳이 내가 먼저 나실 필요도 없고…….’
작은 미소를 보인 황준우가 황서연을 향해 물었다.
“직접 할래?”
“그래도 돼?”
놀란 표정의 황서연이 묻고, 황준우는 고개를 주억인다.
“물론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이 악덕 상인!”
“……빠르네”
당황한 표정을 한 황준우가 헛웃음을 짓는 사이, 바람처럼 뛰쳐나간 황서연의 뒷발차기가 상인의 턱에 정확하게 작렬했다.
“케엑-!”
상인이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지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상인들과 무인들 모두 입을 떡 하고 벌렸다.
“사, 상주(商主)!”
“상주님!”
놀라는 이들을 전혀 염두에도 두지 않은 황서연의 발이 몇 번이고 다시 상인의 몸을 짓밟았다.
“이 나쁜 자식! 돈 나고 사람 났냐!? 사람 나고 돈 났지!? 사람이 때론 실수도 할 수 있는 거지! 그걸로 목숨을 죽이네 살리네. 아주 개자식! 개자식!”
“악! 악! 아파! 거, 거긴 안 돼!”
퍼버버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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