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86화
서시의 눈에 호기심이, 황서연의 눈에는 경계가 떠오른다. 생각보다 더한 두 모녀의 격렬한 반응에 황석후는 황준우를 바라보았다.
어찌 됐든 그를 돕다 보니 처한 상황 아니던가?
“아버지, 힘내세요.”
“……아들아?”
배신당했다.
충격적인 표정을 지은 황석후를 뒤로한 채 황준우가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예의를 따지자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자칫하면 생명이 걸린 위협감이 식탁 주변을 감싼 탓이었다.
“오빠, 잠깐.”
그런 황준우의 기색을 어렵지 않게 읽은 황서연이 무서운 기운이 뚝뚝 흐르는 목소리로 그를 부른다.
“으, 응?”
“대답은 본인이 해야지?”
“암, 그렇고말고.”
황서연이 시선이 홱 돌아가고, 기다렸다는 듯 황석후가 동의했다.
“어머, 그러고 보니 아들 입에서 여자 이야기는 처음 듣네. 어서 이야기해 주렴.”
그런 날이 선 분위기에 상관없다는 듯 혼자만이 태평한 목소리를 흘린 서시도 황준우에게 다가오며 묻는다.
“그건 말이지. 음, 말 그대로 친구랄까. 우리는…….”
“똑바로 말해, 오빠.”
“정확하게 말이다, 아들아.”
“우리 아들이랑 나이 차이는 얼마나 나고? 혹시 엄마도 아는 아이니?”
“그, 그게…….”
뒷걸음질을 주춤주춤 쳐 보지만, 어차피 달아나 봐야 집 안.
황준우에게 물러날 곳은 없었다.
“똑바로 대답하라고, 오빠아!”
배신자의 처참한 말로였다.
약간의 소동이 있었지만 그저 친구라고만 외치는 황준우의 강렬한 의지(?) 덕에 사건은 더 이상 번지지 않았다. 황서연의 의심 가득한 눈초리와, 서시의 기대 가득한 시선, 황석후의 배신감 뚝뚝 떨어지는 눈빛을 동시에 받아야 했지만 어쨌든 사는 게 우선 아니겠는가? 황준우는 식은땀을 훔치며 식사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남은 시간 오 주야. 어디를 갈지 고민 좀 해 봐야겠네.’
본래 목적은 북경이었지만, 식사 시간의 대화로 인해 방향이 완전히 바뀌었다. 여행의 목적지부터 새로 정해야 되는 상황이 찾아온 것이다. 잠시 자리에 앉아 고민한 끝에 황준우는 목적지를 정할 수 있었다.
‘하남(河南)으로 가 보자.’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 데에는 얼마 전 만총과 나누었던 명력에 대한 부분이 컸다. 몇 번을 생각해 보아도 원공이 마지막에 보여 주었던 힘에는 의문점이 너무나 많았다. 그리고 그런 의문에 명력을 가진 보물의 힘이 더해진다면 납득이 갈 만한 가설이 생긴다.
황준우는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 소림사(少林寺)를 직접 방문해 볼 생각이었다. 태산북두 소림이라면 분명 그런 명력을 가질 만한 물건이 여럿 있을 테니 말이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확인해 보는 게 좋겠지.’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이름값이 높다 하여 알 수 없는 힘을 가지게 된다면, 고대의 무구라는 것은 대다수 상상을 초월하는 영능(靈能)을 가지고 있을 테니 말이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또 알 수 없는 위화감이 황준우에게 있어 명력에 대한 의문을 좇게 만든다.
‘혹시 모르니까 사마정에게도 알아보라고 해야겠군.’
결정을 내린 황준우가 책상에 앉아 서신을 쓴 후, 기운을 일으켜 몸을 숨기고 있는 혈안서를 불러내었다.
특유의 붉은 눈을 으스스하게 빛내며 다가온 혈안서의 입에 서신을 물린 황준우가 손을 내저었다.
“사마정에게 전해. 제일 순위로 알아보라고.”
황준우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작게 울음을 터트린 혈안서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자, 그럼 쉬어 볼…….”
대체적으로 해야 할 일과 여행의 목적을 정한 황준우는 침상에 몸을 던지려다 말고 시선을 돌린다. 머지않은 곳, 정확하게 연무장 위치에서 예리한 기운이 몇 번이고 솟아났다 사라진다. 하나 몇 번이고 그런 시도가 반복되어도 기운이 꼬여 하나의 륜(輪)을 만들고 응축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경호, 정말 분했나 보네.”
그런 경호의 기척을 느끼며 망설이던 황준우가 침상에 몸을 누였다.
“지금은 괜한 참견이 방해가 되겠지.”
때로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법도 있다.
황준우는 지금 경호의 수련이 바로 그러한 때라고 믿었다.
“오 주야…….”
그때까지 경호가 목표를 이룰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애초에 황준우 역시 두 사람 모두 초절정의 경지를 만들고 싶었으니 말이다.
“경호라면…… 해낼 수 있겠지.”
믿음을 가득 담은 혼잣말을 중얼거린 황준우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또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그 다음 날부터는 여정 준비를 비롯한 여러 가지의 일로 바쁜 하루가 연이어졌다.
나름대로 짐을 싸야 하고, 목적지를 가기 전 거쳐 가는 길목도 정해야 한다. 혼자가 아니라 여동생인 황서연이 함께였기에 노숙은 되도록 피하는 길을 잡은 황준우였다. 그렇게 며칠을 정신없이 보내고 나니 어느덧 만총이 황준우를 찾았다. 그가 투덜댔던 기억을 떠올려 황서연까지 이끌고 가서 함께 차를 마신 후, 부탁했던 물건을 전해 받은 황준우의 표정에는 웃음이 가득 번졌다.
힘 빼고 만들라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용장이라고, 쉽게 볼 수 없는 보물이 또 셋이나 탄생한 탓이었다.
차를 마시고 한동안 여정을 떠난다는 인사를 할 겸 만총과의 시간을 보낸 이후 황준우는 경호와 홍산을 만나 만총이 만든 무기를 건네주었다. 두 사람 모두 무인으로서 무기를 보는 눈은 있었기에 감탄과 감사를 연신 표했다.
황준우는 모두 만총에게 되돌려 주었지만 말이다.
그런 하루를 보내고 나니, 어느덧 여정을 결정한 날이 다가왔다.
일행은 황준우와 황서연, 경호 그리고 마지막 홍산으로까지 단출하게 이루어졌다.
이미 거창하게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자식들의 성정을 잘 알고 있는 황석후와 서시도 딱히 반대하지 않았다. 무공 하나만 보자면 짐작을 할 수 없는 황준우에, 여장부 황서연, 오랜 시간 신뢰를 쌓아 온 데다 제법 실력이 좋은 경호, 그리고 젊은 천재 홍산까지 더해진 일행은 실상 무림 어디에 내놓아도 부족하지 않은 수준인 것이다.
“그럼, 몸 조심히 다녀오거라.”
“몸 조심히 다녀오렴. 우리 딸, 아들.”
황석후의 간결한 말과, 황준우와 황서연을 품에 안아 주는 서시와의 인사 이후 네 사람은 힘찬 걸음으로 하남을 향했다. 그렇게 나가고 싶어 하더니 못내 아쉬운 듯, 멀어지는 집 모습을 몇 번이고 되돌아보던 황서연은 이내 시야에서 소주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이후 제자리에서 펄쩍 뛰며 환호성을 질렀다.
“이제 완전 자유야!”
“여, 연이야. 아쉬운 기분 아니었니?”
“아쉽긴! 드디어 이 황서연 님이 강호출도(江湖出道)를 하는 마당인데 그런 섬세한 감성에 시달릴 틈이 어디 있어? 히히.”
“내 동생이지만 참 당차구나. 그래도 막상 닥치는 감정이란 게 있는 법인데.”
“뭐 나중에는 생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야. 매일 집에서 요리에, 다도에, 꽃꽂이에 오빠가 내 심정을 알아? 하아…… 어쩌면 난 잘못 태어났는지도 몰라.”
“너 아무리 그래도 그런 말은 아니지.”
황서연의 짙은 한숨에 황준우가 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전생에 워낙 갖은 고생을 한 탓에, 지금의 삶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황준우였던 만큼 그런 말을 쉽게 넘어갈 수 없던 탓이다.
“에, 오해하지 마! 그런 의미 아니니까. 그냥 단지 난 아들로 태어났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는 것뿐이야.”
황준우의 진지한 표정에 놀란 황서연이 재빨리 손을 저었다.
“그야 나는 여성스러운 옷보다 이런 무복이 편하고, 또 가만히 있는 건 더 싫고, 차라리 무공이라도 익히는 게 좋고 하니까…….”
“음…… 그런 심정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
황준우만 하여도 어린 시절, 얼마나 공부가 하기 싫었던가.
“그래, 그냥 그런 의미라고. 오빠 기분 나쁘게 하려는 의도는 없었어.”
진심 어린 황서연의 표정에, 미소를 보인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아니야. 말했듯이 이해 못 할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난…… 그래도 우리 연이가 여동생이라 좋아.”
“남동생이었으면 싫었고?”
“좋았겠지. 그래도 남동생이었으면 지금 우리 연이처럼 발랄하고 귀여운 맛은 덜하지 않았을까?”
“에헤이, 오빠. 무슨 소리야. 난 태생부터 귀엽고 발랄하다고. 깔깔!”
“아마 잘난 체는 유전일 거야.”
큰 웃음을 터트리는 황서연의 말에, 저도 모르게 벙찐 표정이 된 황준우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생각해 보니 전생에 비해 잘난 체가 늘었다 싶었는데, 황서연을 보니 피의 영향이 분명해 보였다.
“잘난 체가 아니라, 잘난 거야 오빠. 솔직히 오빠 동생이지만 예쁜 편 아니야?”
“네, 네. 제 눈에는 세상에서 제일 예쁘죠.”
“연하인가 하는 그 여자보다?”
“그 이야기는 또 왜 나와! 그냥 친구라니까.”
“그러니까. 친구랑 비교해서 어때.”
“어허, 잡소리에 불과하다. 어서 안휘로 가자.”
“어라, 안휘로 가려고? 산동으로 안 가고?”
안휘에는 남궁세가가 있다.
그리고 만금장과 남궁세가가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쯤은 황서연이라고 해도 잘 알았다. 물론 지금에 와서야 그런 남궁세가가 황준우의 발밑에 있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 아니던가? 게다가 황준우는 진실을 말해 줄 생각도 없었다.
‘아마 음흉한 것도 핏줄일 거야.’
문득 만금장의 대다수를 감춘 채로 세력을 키워 나가는 황석후의 얼굴을 떠올린 황준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괜찮아, 별일 없을 거야.”
“그래도 괜한 문제 생기면 엄마 아빠 걱정할 텐데…….”
“으이구, 우리 기특한 여동생. 그러면서도 집은 그렇게 나오고 싶었어요.”
“이건 별개.”
웃고 떠드는 두 남매와 홍산, 경호는 느긋한 걸음으로 여정을 이어 나갔다.
목적이 있다지만 급한 일도 아니고, 처음 세상에 나온 황서연에게 이것저것 보여 주기 위해 경공과 말은 최대한 자제해서 움직이기로 선택한 황준우 탓이었다.
그렇게 느긋한 걸음을 옮기면서 나아가다 보니 어느덧 해가 진다.
황준우는 곧장 눈에 보이는 마을에 들러 객점을 잡고 저녁 식사를 시켰다.
“여기가 어디야?”
“아마 무석(無錫)현 근처일 거야.”
“그러면 바로 옆이 태호네? 생각보다 멀리 못 왔구나.”
“느긋이 왔으니까. 왜, 이따가 태호라도 구경 갈래?”
“아니, 태호는 그래도 몇 번 봤어.”
“완전히 소주 내에만 갇혀 있던 건 아니구나.”
“그럼, 내 나이가 몇인데. 오빠는 날 너무 무시해.”
“하하, 미안하다.”
크게 웃는 황준우와 황서연, 경호, 홍산은 같은 원형 식탁에서 식사를 했다.
“많이 먹어. 경호, 홍산. 나 이제 돈 많아. 흐흐.”
황준우의 듬직한 음성에 두 사람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렇게 식사 시간이 끝난 이후 황서연과 황준우는 각자의 방으로, 경호와 홍산은 각자의 병장기를 들고 수련에 나섰다.
“앗, 나도 수련할래.”
그 모습에, 방에서 쉬기로 마음먹었던 황서연도 검을 뽑아 들고 뛰어나갔다. 그녀 역시 어린 나이에 일류의 경지에 오른 무인으로서 경호와 홍산에게 호승심을 느낀 게 분명했다.
그렇게 밤늦게까지 수련이 이어지고, 홍산과 황서연이 먼저 객점으로 들어와 씻고 침상에 올랐다.
내일은 또 내일의 여정이 있는 만큼 수련에도 어느 정도 안배를 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 경호는…….”
객점의 창 밖.
어둠과 작은 달빛밖에 없는 혼자만의 공간에서 검을 내뻗는 경호가 보였다. 이미 온몸이 땀으로 젖다 못해 검을 뻗기조차 힘들어함에도 멈추지를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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