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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83화 (83/373)

학사재생 83화

바람 질 날이 그리 많지 않은 만금장에 소문이 하나 돌았다. 갑작스럽게 장원 내부에 비명귀(悲鳴鬼)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불길하고도 섬뜩한 이야기. 다행히 그로 인한 분란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 비명귀가 내지르는 소리의 근원이 소향 연무장임이 밝혀졌고, 그 안에서 삼 주야가 넘는 시간 동안 한 발자국도 바깥으로 나오지 않은 세 사람이 있음 또한 알려진 탓이다.

사실이 알려진 이후, 식솔(食率)들의 호기심은 다른 방향을 향했다.

과연 며칠이나 버틸 것인가?

평소에는 연무장의 문을 걸어 잠그고, 끼니때가 되면 황준우 혼자서 바깥으로 나와 식사를 챙겨 들어간다. 늦은 밤이 되면 역시나 황준우가 나와 물을 길러 서너 통씩 챙겨 다시 연무장 안으로 모습을 감춘다.

그 외의 시간에서는 연무장 내에서 끊임없는 비명이 울려 퍼지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한 나날.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황준우가 연무장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몰래 지켜본 시종의 이야기로는,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안에는 검고 거대한 암흑의 아가리가 존재하는 것 같다고 말하였다. 대체 무엇을 보았기에 저런 끔찍한 표현을 한단 말인가? 심지어 그 내부에서 수련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심경이 어떨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때가 이미 두 사람이 지옥 수련으로 들어간 지 오 주야가 넘은 시점.

대부분의 시종들은 칠 주야 내외로 견디지 못한 누군가가 뛰쳐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칠 주야가 흐르고, 그다음 날이 되고, 또 한 번의 밤과 낮이 흘러도 연무장의 문을 박차고 나오는 사람은 여전히 황준우뿐이었다.

들려오는 비명 소리가 여전했으니 누군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헛소문은 신빙성을 잃었다.

그렇게 보름.

드디어 모두가 호기심을 가득 담은 채 지켜보았던 연무장의 문이 활짝 열렸다.

비교적 아니, 혼자만 깔끔한 차림의 황준우와 달리 마치 야인(野人)들처럼 넝마로 찢어진 옷에, 산발한 머리, 먼지투성이의 모습을 한 경호와 홍산이 그 뒤를 따랐다.

평소보다 훨씬 굳어진 얼굴에 사나운 눈빛을 한 두 사람은 마치 굶주린 짐승을 닮아 있었다.

“자, 보름 동안 정말 죽을 만큼 수고했어. 일단 삼 주야 정도 푹 쉬고, 다시 이곳으로 온다. 두 사람 다 알겠지?”

“…….”

말은 없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두 사람 모두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황준우의 말에 따라 각자의 방을 향했다.

“녀석들, 많이 피곤했나 보네. 하하, 좋아. 그럼 나도 또 할 일을 하러 가 볼까나.”

주변에 위치한 시종과 시녀들의 질린 시선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린 황준우가 또 어딘가를 향했다.

세간에 알려지길 천하제일상가라 불리는 만금장을 지탱하는 큰 상업은 본래 총 네 가지였다.

첫 번째는 바로 전장.

금전 혹은 물품을 보관하고 내어 주는 역할을 하는 전장에 있어 만금장의 신뢰도는 가히 천하제일. 일반적인 양민에서부터 부유층의 인사들과 무림문파, 심지어 호족(豪族)을 비롯한 귀족, 그리고 왕족들까지 만금전장을 이용하니 그 성세를 다른 상가가 따를 수가 없을 정도였다. 물론 그런 만금전장의 명성을 무너뜨리고자 도전을 하는 이들도 많았다.

전장의 신뢰란 결국 맡긴이의 돈을 얼마나 잘 지켜 주냐는 것. 결론만 말해 만금전장의 금고는 그 어떤 대도(大盜)에게도 뚫린 적이 없어 철옹성이라는 별명까지 갖추고 있었다.

두 번째는 바로 표국이다.

대표두 여선위라는 초고수를 필두로, 당장 무림에 뛰어들어도 이름을 내놓을 고수들을 앞세운 만금표국은 전장과 마찬가지로 천하에서 가장 신뢰받는 안전한 표국이었다.

세 번째는 무역(貿易).

고려에서부터 동영, 유구(琉球), 섬라(暹羅), 심지어 서장 바깥과 북쪽의 북해(北海) 너머까지 뻗쳐 있는 만금장의 무역상권은 그야말로 천하를 아우르고 있었는데 농담처럼 흘러가는 이야기 속에는 만금장이 세외에도 달리 세력을 갖추고 있다는 말도 있었다.

이러한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의 상업을 기반으로 둔 탓에 만금장의 무력은 어지간한 무림문파를 뛰어넘어 구파일방이라고도 불리는 대문파와 비견된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오기도 했다. 물론 실제로 서로 붙어 본 적은 없는 데다, 만금장 측이 극구 부인하는 탓에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바로 부동산이었다.

실질적인 만금장의 제일사업(第一事業)으로서, 호사가들이 농담으로 말하길 천하의 삼 할이 만금장의 땅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하고는 했다. 실제로 만금장은 이런 방대한 땅을 소작농들에게 값싸게 내주며 이득을 얻는 한편, 건물을 세워 부자들에게 비싼 값으로 판매를 하곤 했다.

물론 만금장은 이 외로도 천하의 상계 곳곳에 영향을 끼치고 있지만 그 영향력과 규모는 말한 바 네 가지에 비할 수준은 아니었다.

한데 얼마 전, 앞선 네 가지 최대 규모의 상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새로운 이름이 올라왔다.

바로 만금철방.

천하에서 내로라고 뽑을 수는 있지만, 제일이라고는 할 수 없던 만금철방에 천하제일의 용장 만총이 합류했다. 어디에도 머물기를 원하지 않던 그의 합류는 세인들의 놀라움을 샀으며, 부유층의 호기심을 끌었다.

첫째는 소문이 사실이냐는 것.

이 부분을 입증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만총은 만금철방에 취직한 지 보름이 되지 않는 이례적으로 짧은 시간 내에 방주(坊主)의 직위에 올랐고, 곧 그의 인상착의와 실력에 대해 천하 곳곳에 알려졌다. 실제로 만총은 한사코 방주의 자리를 거부하고자 하였으나, 전대 방주가 자신의 모자람을 인정하고 스스로를 낮추니 결국 고집을 꺾고 제 자리를 찾아간 셈이다.

두 번째 호기심은 만총의 실력이 정말 천하제일이라 불릴 만하냐는 것이었다. 그는 이십여 년 전 용장의 칭호를 받았고, 그 이후 이렇다 할 물건을 세상에 내놓은 적이 없다.

걱정이 될 법도 한 일이다.

물론 이를 대놓고 입 밖에 내어 의심할 수 있는 간 큰 인물은 어디에도 없었다. 용장의 칭호는 오로지 황제만이 내릴 수 있으며, 지금까지 만총 이후 그 이름을 물려받은 이는 누구도 없다.

결국 만총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은 황제를 의심하는 일.

아무리 콧대 높은 권문세가의 인물이라 한들 함부로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이 증빙에는 제법 시간이 오래 걸릴 줄로만 알았다.

한데 얼마 후, 만총이 세상에 내놓은 언월도 한 자루가 모든 분란을 뒤덮어 버렸다.

그 언월도의 주인은 다름 아닌 황궁 군권(軍權)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오호도독부의 수장인 대도독(大都督)이 되었는데, 절친하던 영왕의 권유로 만금장의 경매에 참가하여 언월도를 얻게 된 그는 평소 과묵하고 신중한 성정이라는 세간의 평을 비웃기라도 하듯 큰 웃음을 터트리며 최고의 보물을 얻었다고 천하 곳곳에 자랑을 하고 다녔다.

실제로 그의 언월도를 본 이름 높은 무인 혹은 군인들은 가히 삼국시대 무신(武神)이라 불렸던 관운장의 청룡언월도에 비견 가는 보물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손잡이의 중간 부분쯤에 새겨진 황금용 문양을 보며 금룡언월도(金龍偃月刀)라는 별칭을 지어 주었다.

곧, 숨죽이고 있던 만총이 다시 실력 발휘를 하며 아홉 번째 용기(九代龍器)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천하를 크게 울렸다.

이쯤 되면 만총의 실력을 의심하는 인물은 남지 않게 된다.

자연스레 그런 그가 방주로 취임한 만금철방의 인지도가 눈에 뜨이게 올라갔다.

천하의 내로라하는 철방을 세워 두고 이름을 놓으면 열 번째와 여덟 번째 사이에 간신히 들어가던 만금철방이 천하제일이라는 하남철상 바로 아래까지 치고 올라간 것이다.

만총이 만든 열 번째 용기의 주인이 되고 싶은 이, 혹은 돈과 인지도가 부족하여 그의 밑에서 수학(受學)한 장인들의 무기라도 다루고 싶은 이들의 주문이 쇄도했다.

만금장의 주요 수입원이라 할 수 없던 만금철방이 단숨에 날개라도 단 듯 하늘 위로 떠오르는 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취직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까지 시장 판도를 뒤바꿔 놓는 건지. 진짜 완전히 살아났구나. 과연 천하제일 용장이야.”

만금철방, 방주실을 찾아온 황준우의 말에 만총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장주님의 수완이 좋으신 덕이겠지요. 저는 그저 언월도를 만들고 싶어 제작했을 뿐인데, 마치 짜인 그림처럼 가장 알맞은 형태로 세상에 퍼져 나가 버리니……. 이래서 만금장이 천하제일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지 말입니다. 허허.”

“아버지는 그저 가장 잘 어울리는 주인을 찾아 줬던 것뿐이겠지. 모두 만총 영감의 솜씨 덕이야. 고마워, 덕분에 식솔들의 삶이 한층 윤택해질 거야.”

“그리 봐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그러실 것 같았습니다.”

“거참, 민망하구먼. 이렇게 속내 뻔히 보이게 찾아와서 뻔뻔하게 말하기도 쉽지가 않네.”

“아시면 가끔이라도 조금 들러 주시지요. 요즘 제 삶의 낙 중 하나가 찾아오는 아가씨랑 차 한잔하는 겁니다. 그럴 때면 생각하게 됩니다. 이 자리에 소장주님도 함께였음 얼마나 좋을까 말이지요.”

“끙……, 미안해. 영감이 나를 그 정도로 생각해 줄 줄은 몰랐지.”

“저도 제가 이렇게 말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왠지 소장주님을 보고 있으면 솔직하게 말을 하고 싶어요. 기분 탓인지, 아니면 다른 영향인지…….”

웃음을 흘린 만총이 찻잔을 들어 올린 후 평온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이후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황준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참, 알고 계십니까? 말씀하신 금룡언월도가 제 아홉 번째 작품으로 알려졌더군요.”

“수왕이나 매영에 대해서 아무도 알리지를 않았으니까. 그러고 보면 금룡언월도까지 해서 벌써 십일대용기(十一 代龍器)인가? 많기도 하네.”

“허허, 사실 그렇게 볼 수도 없습니다. 실상을 따지자면 수왕이나 매영의 경우가 아주 특별하지요. 제 생에 또 한 번 두 자루 검과 같은 작품을 만들어 낼 날이 오기나 할지 의문입니다.”

“수왕과 매영은 엄연히 말해, 제 이전 작품들을 비롯해 금룡언월도마저 뛰어넘었습니다. 역작(力作)이라고 할까요……. 우연히 보았던 간장막야(干將莫耶)를 떠올리며 만든 덕도 크겠지요.”

“간장막야? 전설의 부부검 말이야? 그게 실존해?”

“예. 저도 단 한 번 보았습니다. 당시 주인은 서역에서 건너온 색목인(色目人)이었는데 가진 바 무공 솜씨에 비해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더군요. 만약 무림의 일류 무인이 그 검을 든다면 초절정 고수와도 비견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잠깐, 검의 성능이 그 정도라고? 그래 봐야 춘추시대에 만들어진 물건 아니야?”

일류와 초절정.

한 계단도 아니고 두 계단.

심지어 강기를 제대로 쓰기 시작하는 경지와 이제 막 검기를 펼쳐 내는 격이 다른 경지의 무인이 비견될 수 있다고 한다. 무공에 대해서만큼은 천하의 누구와 비교해도 지식이 밀리지 않는다 자부하는 황준우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수준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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